소설리스트

79. 내가 있을 곳은 여기다. (79/146)


#79. 내가 있을 곳은 여기다.
2022.06.02.


슈가의 형, 아니 쓰레기를 데려다가 일을 시켰다는 하인데르 후작이 찾은 신.

고대신이라고 꼭 짚어 말하지 않았지만, 하인데르 후작이 평소 특정 신전을 찾는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만큼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16583989354308.jpg

“뭐, 하인데르 후작이니만큼 순순히 저는 고대신과 이런저런 식으로 얽혀 있습니다. 하고 고해바치지는 않겠지. 협박이나 구슬림이 통할 상대도 아니고.”

16583989354313.jpg

“필요하다면 손을 쓸…….”

16583989354308.jpg

“아냐. 그녀에겐 고문이나 협박이 정말로 통하지 않아.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리고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사람이니…….”

말을 하다 말고 눈을 깜박거리던 올리비아는 이내 얼굴을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쏟아냈다.

16583989354308.jpg

“하인데르 후작이 정말로 고대신과 연관이 있다면, 이유는 알겠어.”

16583989354313.jpg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에 미치나.”

크라이어의 신랄한 말에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덧붙였다.

16583989354308.jpg

“마법사나 다른 미친 것들은 모르겠지만, 하인데르 후작은 이유가 있는 거 같아. 그 이유 때문에 후작을 움직이기는 지극히 힘들고.”

16583989354313.jpg

“그 이유는?”

16583989354308.jpg

“자식을 잃었거든. 태어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는.”

공공연하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진 않지만,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는 꽤 오래된 이야기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리 드물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16583989354308.jpg

“하인데르 후작, 아니 그 당시에는 차기 후작이었던 보니타 하인데르는 금단의 사랑에 빠졌고, 결과는 뭐.”

16583989354313.jpg

“좋지 않았군.”

16583989354308.jpg

“그렇지. 상대가 지나치게 질이 안 좋았거든. 물론 사랑에 빠진 차기 후작은 두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채 그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저 하룻밤의 불장난이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하룻밤의 불은 보니타의 인생을 송두리째 태우는 겁화가 되어 그녀를 살라 먹었다.

16583989354308.jpg

“아이가 죽은 경위가 명확하지 않아. 그리고 선대 후작의 죽음도.”

본래부터 그리 사교적이지 않았던 하인데르 가문은 차기 후작이었던 보니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휘발되어 버린 후 더더욱 폐쇄적인 가문이 되었다.

결국 사람들이 보니타의 아기가 눈도 뜨지 못했다는 사실과 얼마 지나지 않아 선대 후작 역시 눈을 감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16583989354308.jpg

“보니타 하인데르가 후작위를 계승하기 위해 황궁에 왔을 때 대략적인 이야기만 알려졌어.”

16583989354313.jpg

“그렇다면 고대신을 추종할 만한 이유라는 게 결국 그 비극적인 사랑 때문인가.”

16583989354308.jpg

“아기를 잃었으니까.”

자고로 부모는 자신을 잃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가슴에 평생 잊을 수 없는 멍울을 새긴 보니타의 선택이, 온 세상을 불태우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는 없어도 납득할 수는 있지 않겠나.

그래. 이유를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녀를 결코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올리비아는 보니타가 고대신을 따른다면 기꺼이 그녀를 마법사의 딸과 똑같이 취급하리라.

16583989354308.jpg

“황녀 궁의 사용인과 황녀 궁에 숨어들어 칼을 내지른 여자. 두 사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남자를 하인데르 후작이 처리해야 할 이유가 뭘까.”

올리비아는 설렁줄을 담기며 한쪽 눈썹을 비죽 밀어 올렸다.

16583989354308.jpg

“그뿐만이 아니라 황녀 궁에 자꾸만 간섭하려고 했었지. 과연 후작이 신에 관해 무슨 말을 할지 들어는 봐야 하지 않겠어?”

빈말로도 해맑거나 순하다고 할 수 없는 비열한 미소를 지은 올리비아가 손을 내밀자, 크라이어는 기꺼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처음 만나 그녀의 손을 잡은 이후로 늘 그랬던 것처럼.

16583989371926.jpg

 

***


16583989354308.jpg

“후작.”

16583989371934.jpg

“전하를 뵙습니다.”

선약도 없이 들이닥친 하인데르 후작가는 무덤같이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무채색의 옷을 입고 무표정하게 두 사람을 맞은 보티나와는 상반되게 올리비아는 어느 연회에라도 가는 듯 화사한 차림새였고, 그에 맞춰 크라이어 역시 실용성보다는 심미적인 부분에만 집중한 화려한 모양새였다.

다과는커녕 차도 없이 미지근한 물을 내온 사용인이 물러나자 보니타가 입을 열었다.

16583989371934.jpg

“송구합니다. 저택에서 차를 마시지 않아서요. 지금 찻잎을 구하러 나갔으니…….”

16583989354308.jpg

“괘념치 마. 선약도 없이 온 걸. 뭐, 후작이 요즘 내게 관심이 많은 거 같아서 말이야.”

올리비아가 말속에 뼈를 담아 웃었지만, 보니타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숙였을 뿐.

묵직한 크리스탈 잔을 들고 입술을 축인 올리비아가 소소하게 둘러가는 말들을 모조리 생략한 채 물었다.

16583989354308.jpg

“후작, 내가 차기 황제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나?”

16583989371934.jpg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주 민감한 질문이었지만 보니타는 즉각 답했고, 올리비아도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83989354308.jpg

“폐하의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겠네.”

깨끗이 비운 물잔의 섬세한 음각 너머 보니타를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평이하게 덧붙였다.

16583989354308.jpg

“후작이 바라던 대로 황녀 궁의 기강을 해치던 사용인은 사직했네.”

16583989371934.jpg

“알아서 물러났다니 염치를 아는 자군요.”

16583989354308.jpg

“글쎄.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은 모양이라 쉬고 싶어 한다더군.”

은근히 말을 던졌지만, 역시나 보니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16583989371934.jpg

“책임감도 없는 부류였군요.”

16583989354308.jpg

“책임이라.”

판에 박힌 보니타의 답을 반복한 올리비아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꺼냈다.

16583989354308.jpg

“항거할 수 없는 불행에 휩쓸렸는데도?”

마치 보니타와 같이 사용인 역시 불행에 휘말렸기에 다른 길을 택했다.

하지만 보니타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16583989371934.jpg

“항거할 수 없는 건 자연재해뿐입니다. 그 사용인은 잘못된 선택을 스스로 한 것뿐이지요.”

16583989354308.jpg

“스스로?”

16583989371934.jpg

“네. 누구도 그녀를 등 떠밀며 그런 선택을 하라고 하지는 않았겠지요.”

16583989354308.jpg

“흐음, 과연.”

동의하듯 고개를 까딱거린 올리비아는 마침 생각난 듯 덧붙였다.

16583989354308.jpg

“궁을 나선 사용인은 신전에 몸을 의탁했다고 하더군. 신의 자비를 바라면서.”

그리고 둘 사이에는 아주 건조한 침묵이 흘렀다.

올리비아는 할 말을 다 했기에 입을 닫았고, 이제껏 막힘없이 답하던 보니타도 동시에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신’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죽은 생선 같던 보니타의 눈빛이 기묘하게 반들거렸고, 그 변화를 크라이어는 물론이고 올리비아도 놓치지 않았다.

다음 순간, 보니타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피어났다.

16583989371934.jpg

“신의 자비라. 올바른 신을 찾았기를 바라죠. 자신의 죄업을 정화할 수 있도록.”

올리비아는 치맛자락에 감싸 보이지 않는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지나치게 노골적이지 않은가.

감출 생각이 전혀 없는 건가? 어째서?

16583989371934.jpg

“그건 그렇고, 신이라. 전하께는 먼 이야기군요. 볼셰이크는 신과 대적한 역사가 많으니 말입니다.”

16583989354308.jpg

“글쎄. 선대의 일은 선대의 일일 뿐이지.”

올리비아가 모호한 답을 흘리자 보니타는 물잔을 매만지며 눈을 내리깔았다.

서로가 서로를 가늠하는, 아니 한쪽은 확신하면서 의심하고 한쪽은 의심의 싹을 틔우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보니타는 문득 올리비아의 뒤에서 묵묵히 그녀를 지키듯 서 있는 크라이어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16583989371934.jpg

“당신.”

그녀는 크라이어를 기사라고 지칭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도 알아차렸다.

하나, 보니타는 개의치 않고 물었다.

16583989371934.jpg

“여전히 노르덴 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돌아가겠다고 하면 제가 직접.”

심지어 후작인 그녀는 그에게 말을 높이고 있었지만, 그 또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16583989354313.jpg

“내가 있을 곳은 여기다.”

그리고 크라이어는 보니타의 말을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녀가 고대신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사실에 쐐기를 박듯 답했다.

제국의 후작의 말을 노르덴 국의 일개 기사가 잘라버리고 아예 말을 놓아버리다니.

후작이 격노하여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무례였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콕 짚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크라이어가 어떤 존재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6583989425066.jpg

 
보니타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고, 크라이어는 올리비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16583989354313.jpg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황녀의 손을 잡지 않으면 길을 잃어버릴 테니까.”

정말로 그러했다.

올리비아의 손을 잡고 있지 않으면 자신은 다시 빛 한점 없는 어둠 속에 침잠해, 다시는 떠오를 수 없을 테지.

그러니 놓을 수가 없다. 놓아 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순간,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올리비아가 그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치며 입을 열었다.

16583989354308.jpg

“답이 되었을까, 후작. 아니, 누구라고 해줄까?”

입은 웃고 있었지만,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는 날카롭게 벼린 검처럼 보니타를 꿰뚫었다.

그에 보니타는 삭막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16583989371934.jpg

“개인적인 호기심이었습니다. 돌아갈 수 없다. 그렇군요.”

보니타는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 크라이어를 바라보았지만, 그 이상 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짝.

올리비아는 주위를 환기하려 손뼉을 가볍게 친 후 그린 듯이 미소지었다.

16583989354308.jpg

“오늘 아주 유익한 대화였어. 후작.”

16583989371934.jpg

“황송합니다. 전하.”

보니타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올리비아가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고 악수를 나눴다.

맞닿은 보니타의 손이 사막의 모래보다 껄끄러우면서 동시에 생선 비늘처럼 미끈거렸지만, 올리비아의 미소는 무너지지 않았다.

***

하인데르 후작저에서 돌아온 올리비아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16583989354308.jpg

“으아악, 무거워!”

온몸에 주렁주렁 달려있던 보석들을 내던진 올리비아는 치렁치렁한 옷부터 갈아입었다.

16583989354308.jpg

“하, 너무 힘들어.”

우르르 몰려왔던 사용인들이 제 할 일을 다 하고 물러가자마자 올리비아는 곧바로 책상에 뺨을 대고 늘어졌다.

보니타 하인데르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은 익히 알고, 방문 자체가 고되리라는 사실을 예상했는데도, 그 예상 이상으로 진이 다 빠져버렸다.

하인데르 후작이 고대신과 얽혀 있고, 그 빌어먹을 고대신의 뜻인 세계의 ‘정화’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나, 알았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를 후작위에서 끌어내려 다시는 빛을 볼 수 없게 만들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하인데르 후작가가 아무런 명분 없이 황녀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는 가문이 아닐뿐더러, 보니타도 순순히 물러날 위인이 아니지 않나.

16583989354308.jpg

“이렇게 최악의 가정이 딱 맞아 떨어질 줄이야. 전보다 훨씬 골치 아파졌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