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 올리비아. (81/146)


#81. 올리비아.
2022.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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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취하지 않았다고 우길 셈인가.”

그녀를 안다시피 지탱해서 테이블에 얼굴을 박을 뻔한 것을 막아준 크라이어의 어깨에 턱을 기댄 올리비아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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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정말로 안 취했어. 그냥 기분이 좋은 것뿐이지. 다행이지 뭐야? 내가 술을 마시면 땅끝까지 기분이 가라앉아서 후회만 곱씹지 않아서.”

마치 누군가는 그랬다는 어투에 크라이어의 눈동자에 한순간 이채가 스쳤다.

그는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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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만 마시면 과거를 후회하는 놈이라도 있었나.”

물론 단어 선정에 ‘놈’이 들어간 만큼 아무렇지도 않기는커녕, 그녀가 누군가를 언급했다는 사실이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평소와는 달리 그렇게 사소한 단어 하나를 잡아내어 위화감을 느낄 만큼 정신이 맑지 못했다.

그녀는 헤실헤실 웃는 얼굴 그대로 술술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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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있었지. 황실 기사 중에서 아, 지금은 기사가 아니려나? 아무튼 막내나 다름없는 애가 있었거든. 선임들이 다 사라지고 난 후에 결국 남은 건 막내뿐이라 전쟁 막바지까지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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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과도 술을 마셨다는 말이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라이어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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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도록 술을 마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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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마시긴 했……. 그보다 너무 가깝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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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지?”

이미 지나간 일, 아니 아직 일어나지도, 앞으로도 자신이 그녀의 곁에 있을 테니 절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거슬리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놈의 목 줄기를 당장이라도 틀어쥐고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본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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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너무 가깝지 않냐고. 가까운데? 너무 가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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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멍한 눈으로 연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저 깊은 공동에서 기어 올라오듯 지독하게 낮아서, 그의 숨결이 닿는 부분의 솜털이 일시에 곤두섰다.

그쯤에서 뒤로 물러났어야 했다. 이쯤에서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어버렸어야만 했다.

정말로 그를 밀어냈어야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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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우.”

살짝 벌어진 도톰하고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숨결이 술기운에 이지러지는 공기 중에 흩어지는 순간까지도 올리비아는 물러나지도, 그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둘 사이의 공기가 순식간에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올리비아의 이성의 끈은 술기운에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 진지 오래였고, 크라이어의 인내의 끈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정말로 끊어질 듯 말 듯한 아주 가느다란 각자의 끈을 쥔 채 서로를 응시했다.

검붉게 물든 노을 속으로 푸른 꽃잎이 하늘하늘.

다시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건지, 피어나는 건지.

올리비아가 눈을 깜박하고 감았다 뜬 순간, 크라이어의 콧날이 그녀의 콧방울에 스치며 둘의 숨결이 섞일 만큼 아주 가까워졌다.

달큰한 향기는 마지막으로 마신 꿀이 섞인 위스키 탓인지, 아니면 도톰하고 붉은 입술에서 퍼져나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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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술기운에 뜨거워진 올리비아가 날숨을 뱉는 순간, 크라이어는 더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올리비아의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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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흐읍!”

그녀의 숨은 향기만큼이나 지독하게 달았다.

깊이 들이켠 숨결은 온몸을 타고 휘돌아, 피부 한 겹 아래 몸을 웅크리고 있던 그의 욕망을 부추기고 있었다.

크라이어는 말 그대로 잡아먹을 듯 그녀의 숨을 빼앗고 집어삼켰다.

마셔도 마셔도, 충족되지 않고 미칠 듯이 갈증이 나는 것처럼.

며칠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여행자가 처음 오아시스를 발견해 입술에 물을 머금은 순간처럼, 그렇게 게걸스럽게 그녀의 숨을 들이켰다.

그가 안을 한껏 제멋대로 헤집고 다니는 통에 올리비아의 고개가 점점 뒤로 꺾이자, 크라이어의 커다란 손이 그녀를 당겼다.

올리비아는 정신이 없었다. 아니, 정신이 나갔다.

그와 숨을 섞기 전부터 반쯤 머리가 제 쓸모를 다 하지 못했던 거 같기는 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뇌가 녹아버리는 느낌이었다.

숨이 모자라서, 맞닿은 그의 입술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서, 마치 용암을 삼키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도 팔다리는 나른하게 풀려갔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올리비아의 허리를 당긴 크라이어의 팔에서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과 함께 허기가 밀려왔다.

머금고 있는데도 부족해서, 타는 목마름을 축이는 데는 턱없이 모자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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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하…… 하아. 하아.”

크라이어가 입술을 떼어내자 잠시 숨을 쉴 틈이 생긴 올리비아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동그란 어깨가 들썩거렸고, 가쁘게 숨을 내쉬는 가슴께가 크게 부풀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단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던 크라이어의 목울대가 낮게 울렸다.

그에 반사적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올리비아의 달아오른 눈가에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둥근 눈물방울이 맺혔다.

크라이어는 기꺼이 그녀의 눈가에 입술을 내려 투명한 눈물에 입을 맞췄다.

가뜩이나 열이 오른 눈가에 그보다 더 뜨거운 열감이 머물자, 올리비아는 참지 못하고 그를 밀어내려 손을 들려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일렁이는 검붉은 눈동자에 오롯이 그녀만이 담겨 있었다.

다음 순간, 그 눈에서 넘치는 갈망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밀려와 올리비아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리고 해일처럼 밀려오던 그 욕망은 기어코 다시 그녀의 숨을 탐욕스럽게 마시기 시작했다.

마르고 까칠했던 입술에 제 눈물방울이 스며 조금쯤 식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눈물 한 방울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여전히 그의 숨은 불덩이를 삼킨 듯 뜨겁기만 했다.

그의 향기와 술 내음이 뒤섞여 올리비아는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시승감이 좋지 않은 마차를 타고 험한 산길을 달리듯 몸 전체가 덜덜 떨리다가 이내 손발 끝에 짜릿한 감각이 몰아쳤다.

저도 모르게 발끝을 오므린 올리비아는 모자란 숨을 쉬려 본능적으로 입을 더 크게 벌렸고, 당연하게도 크라이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욕심껏 안으로 파고들어 마음껏 들쑤신 그는 녹아내린 듯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는 올리비아를 지그시 바라보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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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그 한마디에 올리비아의 목덜미 뒤로 솜털이 바짝 곤두서고, 풀렸던 허리가 팽팽하게 긴장했다.

그런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크라이어는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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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그렇게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눈앞이 아득해 질만큼 나지막한 목소리가 몇 번이고 그녀를 부르고 또 불렀다.

마치 지울 수 없는 각인이라도 새기듯이.

그리고 홀린 듯이 올리비아도 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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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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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불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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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어.”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단내와 함께 흘러나오는 제 이름이 낙인이라면.

기꺼이 심장에 새길 텐데.

크라이어는 흐릿해지는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느릿하게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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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더 이곳에 머물면,”

크라이어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지만,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올리비아 역시 그와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이대로 조금만 더 함께 있다가는 전부 다 놔버릴지도 모른다.

올리비아는 간신히 숨을 정돈하며 어느새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어깨를 움켜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줘 밀어냈다.

들불같이 일어난 갈망으로 모든 것을 살라 먹을 듯한 눈동자로 크라이어는 그녀를 무엇 하나 놓칠 수 없다는 듯 들여다보았지만, 올리비아는 그를 더는 밀어내지도, 당기지도 않았다.

이윽고 그는 아주 느긋하게 그녀의 뺨을 한 번 쓰다듬은 후, 그대로 몸을 돌렸다.

-탁.

평소에는 들리지도 않던 문이 닫히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울리던지.

먹먹했던 귓가를 깨우는 그 소리에 어깨를 크게 움찔거린 올리비아는 이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홀로 남은 그녀의 목 아래부터 머리꼭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건 순식간이었다.

더운 숨을 연신 내쉰 그녀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한탄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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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어. 아주 미쳤구나.”

중얼거리는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한숨에는 그녀가 마셨던 술뿐만이 아니라 크라이어가 마셨던 것의 향취가 뒤섞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

슈가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답답한 속은 풀리지 않고 가슴이 조여드는 기분도 나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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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계속 시간만 보낼 수도 없잖아.”

스스로를 다그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면서도 슈가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졌다.

형, 아니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은 남자가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진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닐지 몰라도, 슈가에게는 하루하루가, 아니 매시간 매초가 지날 때마다 지나치게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의 편의를 봐주는 사용인들은 물론이거니와 그저 지나치는 이들 중 아무도 슈가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슈가는 눈치가 보였다.

자의로 머물게 된 곳은 아니지만, 무려 황녀 궁이 아닌가.

초조함에 방 안에서 뱅글뱅글 원을 그리며 돌던 슈가는 아이답지 않은 한숨을 연신 내쉬었다.

차라리 무얼 하라거나, 어디로 가라거나 황녀 전하께서 명령하셨다면 그대로 따랐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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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야 하는 거지.”

슈가는 습관적으로 갈비뼈에 새겨진 낙인을 매만졌다.

정말로 이제부터는 뭘 해야 하는 걸까.

이제야 이 낙인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신이 어떤 신세인지,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자신을 왜 이렇게 키웠는지도 전부 알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알고 싶지 않았던 혈육의 본심까지 알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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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아이답지 않게 무겁디 무거운 한숨을 내쉰 슈가는 미간을 구기며 며칠간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을 두고 끙끙거렸다.

아직 어리고 숨어 사느라, 정확히 말해 고대신의 눈을 피하느라 이런저런 제약에 묶여 있었던 슈가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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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해야만 해.”

자신의 짧은 생에서 이렇게나 큰 변곡점은 지금이 아니라면 미래에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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