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자꾸 자극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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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자꾸 자극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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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자꾸 자극하지 마라.
2022.05.05.
“바람으로 날리긴 했지.”
“그래? 바람이 부는 순간에 맞춰서 장치를 부순 거구나.”
크라이어가 고개를 젓자 올리비아는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면?”
“검으로 날렸다.”
“뭐?”
“검을 휘둘러 바람을 일으켜 날려버렸다고.”
크라이어는 입을 다물었지만, 올리비아는 입은 벌어졌다.
검으로 바람을 일으켜서 향을 날려버렸다고? 말이야 쉽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향을 단숨에 날리려면 적어도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릴 만큼의 바람은 불어야 할 텐데?
아니, 무슨 인간이 콧바람이나 손바람도 아니고 돌풍을 일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올리비아는 곧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크라이어라면 가능하지. 아암, 가능하고말고.
이 세상에서 검 하나로 무엇이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크라이어뿐이니까.
“그렇구나.”
생각이 정리된 올리비아가 진심으로 수긍하자, 크라이어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긴 했지만, 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몇 번이고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쉰 올리비아는 벌겋게 부어오른 눈가를 꾹꾹 눌렀다.
온갖 짓을 다 하면서도 눈물 콧물은 짜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울기까지 했으면 지금쯤 혼절했겠지.
울지는 않았지만, 함정에 호되게 당하고 직후에 발광을 떨어댄 터라 진이 다 빠져 온몸이 흐물거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툭툭 두드리던 올리비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지독한 함정 깔아 두었으니, 뭔가 있어도 확실히 있다는 것이겠지.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윽고 그녀는 크라이어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몇 분 전에 죽을힘을 다해 그를 밀쳐낸 주제에 이제 와 필요하니 안아 옮겨달라고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어, 입은 꾹 다문 채였다.
그런 올리비아의 심정을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주는 건지.
크라이어는 별다른 말 없이 그녀를 안아 올렸다.
괜스레 밀려오는 민망함에 올리비아는 일부러 그의 목에 제 팔을 감고 힘을 줬지만, 설령 그녀가 죽을힘을 다해 그의 목에 팔을 감아도 크라이어 입장에서는 따뜻한 솜방망이가 목을 감싸는 느낌 이상은 들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가장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둘 사이에 올리비아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나 당신 안 무서워.”
툭 던지듯 내뱉은 목소리에는 온갖 감정들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새삼스럽게 그를 두려워해 죽도록 발버둥을 쳤다는 사실에 대한 당혹.
그의 팔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는 미안함.
지금의 그는 하지도 않은 짓을 가지고 맹세까지 했는데도, 자신이 그를 믿지 않는다고 믿을까 봐 드는 초조함 등등.
실은 그게 아닌데.
자신은 크라이어를 믿고, 그의 맹세를 믿고 있는데.
하필 함정도 그런 함정이 걸려서! 이 함정 만든 놈 찾아서 갈아 마셔 버릴 테다. 아니, 이미 오래됐다고 했으니 이미 죽었으려나? 그러면 시체라도 찾아내서 반드시 응징을…….
살벌한 생각을 하던 올리비아를 현실로 단숨에 당긴 건 귓가에 흘러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나.”
이미 익숙한 목소리인데도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을 만큼 낮고 깊어서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그런 제 반응에 지레 놀란 그녀가 그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어내며 다급히 외쳤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움찔한 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에 올리비아는 조바심이 났다.
심지어 크라이어는 멈춰서기까지 한데다, 그녀를 땅에 살포시 내려두고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덮고 있었기에 표정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올리비아는 제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보다 크라이어가 혹시나 또! 또 제가 두려워하는 거라고 오해했을까 봐 그의 반응을 살피느라 바빴지만, 크라이어의 침묵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뭐?”
한참이나 지난 후에 나온 그의 되물음에 올리비아는 옳다구나! 하고 다다다 뱉어냈다.
“목소리 말이야, 목소리. 당신 목소리가 좀 많이 진하고 끈적한 초콜릿처럼 흐를 때가 있거든. 좋아! 아주 좋긴 한데, 가끔 흠칫 놀랄 정도로 좋…… 읍, 으읍?”
크라이어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짚어 바짝 다가서면서 종알대던 붉은 입술을 반대쪽 손으로 막아버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올리비아가 그의 손을 잡아 내리려 덥석 쥐자 크라이어의 목젖이 크게 울렁거리다 곧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올리비아가 토끼 눈을 뜬 채 멈칫했다.
진득하게 일렁거리는 검붉은 파도 위로 휩쓸리면 곧바로 찢어져 버릴 보드라운 푸른 꽃잎이 하늘하늘, 또 하늘하늘 쌓이는 순간.
“자꾸 자극하지 마라.”
긁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그가 토해내듯 내뱉었다.
그는 느릿하게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비껴 제 손바닥을 간지럽히고 있는 그녀의 입술 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일부러 도발하는 게 아니라면.”
그제야 저 멀리 빼두었던 눈치를 제대로 장착한 올리비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너무 잘 익어서 툭 건드리면 퍽 하고 터질 것 같은 토마토가 된 올리비아가 본능적으로 도리질 치며 읍읍거렸다.
“안다. 그런 의도로 ‘좋다’라고 한 게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
말은 그리하면서도 크라이어의 눈빛은 절대 아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 배를 그대로 드러낸 먹잇감을 어떻게 요리하면 좋을지 살피는 짐승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 있던 올리비아가 숨을 꼴깍 삼키는 순간.
크라이어는 제 손위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정확히 그녀의 입술이 있는 부분에…….
그에게서 흘러나온 특유의 묵직하고 어딘가 서늘한 향이 코끝으로 밀려들어 오자 올리비아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득해졌다.
직접 입술이 맞붙은 것이 아니다. 그저 그가 그의 손등 위로 입술을 내렸을 뿐.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나 심장이 당장이라도 가슴을 찢고 튀어나올 것처럼 뛰는 건지.
어째서 이렇게나 입안이 바짝 마르고 손끝이 저린 건지.
일 초가 마치 천년 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치 올리비아의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눅진하게 일렁거리던 검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멀어졌고, 그녀의 입을 가리던 그의 손도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그 자리에 굳어진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성은 무슨 말이라도 해서 이 어색해서 미칠 것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얼어붙은 몸은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크라이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역광을 받은 그의 얼굴이 그림자에 가려지자 올리비아는 간신히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방금 뭐지? 방금 왜? 아니, 진짜 왜?
온갖 의문이 머릿속을 쑤셔대고 있었지만, 진짜 입술에 한 것도 아니고 제 손등에 입술을 내린 걸 가지고 물어볼 수는 없지 않나.
왜 내게 입을 맞췄어? 라고…….
아니지! 이런 경우는 누가 봐도! 지나가던 원숭이가 봐도! 명백하게 입을 맞춘 거 아닌가?
“또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 작은 머리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냐.”
어느새 다시 가까워진, 자신을 향해 상체를 숙인 크라이어의 옅은 한숨이 이마 께를 간지럽히자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다, 당신이야말로 너무!”
가까워, 가깝다고! 올리비아는 속으로 아우성을 치며 똑바로 찔러 들어오는 그의 시선을 피하려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나? 내가 너무?”
툭 끊어진 말에 크라이어가 되묻자 올리비아는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처럼 작게 덧붙였다.
“자극적이잖아.”
귀가 아닌 가슴께를 간지럽히는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는 진심으로 눈을 꾹 감고 끓어오르는 욕망을 짓눌러야만 했다.
그렇게 또 서로를 짓누르는 적막이 내렸다.
이윽고 손가락 사이로 흘긋흘긋 크라이어를 올려다보던 올리비아는 엣헴, 하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어색하고 민망해서 죽을 것 같지만, 죽을 리는 없고 계속 세월아 네월아 여기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일단 한켠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지금 당장 그와 무엇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니, 지금이 아니더라도 그와 하긴 뭘 해? 그와는 동료야 동료. 그가 동료라고 아예 못을 박았잖아.
조금 전 일은 그냥…… 음. 그냥…….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기에 올리비아는 과감하게 묻어두기로 했다.
이런 건 머리가 부서지도록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지 않은가.
눈을 꾹 감았다 뜬 올리비아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뺨을 짝, 하고 내려쳤다.
지나치게 세게 내려치는 모양새라 크라이어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일단 우리.”
올리비아는 저를 향한 그의 손을 잠시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을 이었다.
“움직일까?”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크라이어에게 안겨 이동하던 올리비아는 주변을 부산하게 둘러보다 문득 멈칫했다.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 가고 있는 거야?”
참 빨리도 물어본다 싶었지만, 바로 직전까지 이런 것을 물어볼 여유도 없었다.
“함정이 발견된 시점에서 이 공원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는 게 확실해졌지 않나.”
“그렇지.”
“그렇다면 공원으로 쓰이면서 이제까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을 만한 곳이나, 혹은 그런 것을 찾고 있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렇지. 눈에 띄지 않거나, 아니면 눈에 띄어도 의식하지 않고 지나가거나.”
그녀가 입을 다물기 무섭게 크라이어가 멈춰 서며 한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저런 것처럼?”
“그렇지. 저렇게 낡고 다 부서진 조각…… 어라?”
크라이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올리비아가 그의 어깨를 탁탁 내려쳤다.
“저기, 저기로 가보자.”
그녀의 시야에도 걸린 조각상이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세월에 풍파되어 간신히 원형만 알아 볼 정도로 관리가 되지 않은 조각상 앞에 멈춰 섰다.
“일단 이것부터 살펴보…….”
-그르릉.
올리비아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크라이어가 조각상의 한 부분을 툭 두드리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땅이 울리는 진동과 함께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다음 순간 크라이어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