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 미친 놈들 생각은 알 수가 없다니까. (72/146)


#72. 미친 놈들 생각은 알 수가 없다니까.
202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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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으으.”

올리비아는 오만상을 쓰면서 코와 입을 막았지만, 오랜 기간 거의 밀폐된 곳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쿰쿰한 냄새를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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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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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신전이었던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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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치고는 너무 작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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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하에 지은 걸 보면 떳떳하지는 못했던 모양이지.”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는 곧바로 머릿속을 스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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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고대신을 모신 신전이라면 떳떳하지 못했겠네. 지금은 잊혀진 신이라고 해서 고대신이지만, 이따위 신전이 지어졌던 과거에는 분명히 빌어먹을 상종도 못 할 악신이었을 테니까.”

애초부터 ‘신’의 영향력이 아주 미미한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올리비아는 신에게 구태여 인간을 굽어살피어 주고 사랑을 퍼달라고 바라지 않았다.

아니, 아예 바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첫 번째 생에서 제국의 황성이 무너질 때 딱 한 번, 신을 향해 자비를 베풀어달라 기도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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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무자비하다는 사실을.’

 
비가 쏟아지던 날 크라이어가 했던 말처럼, 신은 무자비했다.

하지만 신이 무자비하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고대신처럼 온 대륙의 사람을 전부 다 죽여서 정화 시키겠다는 헛소리를 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지 않나.

물론 신을 상대로 뭘 어찌할 수 없으니, 그 신을 받들고 실제로 신의 뜻을 실현하려는 마법사를, 아니, 마법사의 딸을 쥐잡듯이 잡아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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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 후우.”

어느 정도 코가 적응하고 나서야 구겨진 미간을 편 올리비아는 군데군데 무너져 내려 빛이 비쳐드는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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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확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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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질 곳은 이미 다 무너졌고, 나머지는 나무뿌리가 얽혀 있어서 괜찮을 거다.”

그의 말에 즉시 안심하고 걱정 없이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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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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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끝이로군.”

담쟁이덩굴과 이끼가 뒤덮은 신전의 끝에 다다른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의 팔을 두드리려다 머뭇거렸다.

그녀가 발광하면서 쥐어뜯은 팔 부분이 여전히 너덜너덜했으니까.

불행 중 다행히도 그녀가 아무리 손톱을 세우고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할퀴고 잡아 뜯었지만, 그나마 크게 파인 곳은 없고 대부분 잔 상처 정도만 있었다.

올리비아의 시선이 머무르는 것을 느낀 크라이어는 일단 그녀를 땅에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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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쓰지 마라. 이 정도는 금방 나을 테니까.”

그리 말하며 아예 올리비아의 시선에서 너덜거리는 팔을 치워버리는 그의 움직임에 그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상의를 살짝 잡아당긴 그녀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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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치료 내가 해줄…… 아냐, 내가 하는 것보다는 황궁의가 하는 편이 훨씬 나을 거야.”

미안한 마음에 손수 그의 상처를 처리해 주겠다고 했던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와 달리 자신은 딱히 치료하는 기술이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말을 바꿨다.

전쟁을 겪었지만, 그녀가 손수 누군가를 치료해야 하는 상황은 없었기 때문이다.

전시에 황실의 피를 이은 이들이 기사나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려고 치료하는 시늉을 하기도 하지만, 올리비아가 겪었던 전쟁은 그런 시늉을 할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약과 붕대야 궁의에게 가지고 오라 시킬 수 있지만, 괜히 제가 나서서 어설프게 처리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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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의에게 몸을 맡기고 싶지 않다.”

곧이어 들린 크라이어의 단호한 답에 올리비아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고 그저 수긍했다.

과거의 기억을 잃고 난데없이 부활해 몸에 노예의 낙인까지 찍힌 남자다.

타인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싫어하는 게 당연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올리비아 자신은 당연하게도 ‘예외’라고 빼두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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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면, 음…… 내가 해줄게. 엄청나게 어설플 테지만.”

자신 없는 올리비아의 답에 크라이어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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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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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그러면 좀 살펴볼까?”

그렇게 시작된 신전 탐색은 몇 분 걸리지 않아 끝이 났다.

담쟁이덩굴을 걷어낸 석벽에 빼곡하게 무언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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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봐. 르위르 가문의 문장이야.”

올리비아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석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글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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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신께서 이루어 주신 바, 감사하고 또 감사 하나, 후대에게는 미안함을 금할 길이 없다.”

크라이어가 글귀의 한 부분을 읽자 올리비아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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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미안할 짓을 왜 하는 거야? 그리고 맞네. 르위르 가문이 고대신과 계약이건 거래건, 아무튼 뭔가 한 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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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이어 내려오는 열매를 따다 바치겠사오니.”

석벽 말미에 새겨진 글귀를 가리킨 올리비아가 크라이어를 돌아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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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결국 후대에 대대로 자식 한 명씩을 노예로 바치겠다고 한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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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적으로 말하면 그런 의미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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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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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딴다고 했으니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것일 수도 있다.”

제 욕망을 ‘가문을 위하여’라고 포장한 뒤 신에게 자신의 후손을 바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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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미친 놈들 생각은 알 수가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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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는 신랄하게 평하며 르위르의 누군가가 작성한 석벽을 발로 꾹 눌렀다.

그 상태로 가만히 석벽을 노려보던 올리비아는 크라이어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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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걸로 그 아이가 노르덴국의 미친, 아니 마법사의 딸이 안배한 무엇인가는 아니라는 건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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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근래 이곳에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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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마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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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마법이 그렇게 만능이라면 나같은 노예를 만들게 아니라 그것들이 손수 마법으로 대륙을 피바다로 만들었겠지.”

무슨 일만 있으면 ‘혹시 마법으로 가능? 불가능?’이라는 논제가 반복되자 크라이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에 올리비아는 수긍하면서도 최악의 상황을 늘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지도자의 덕목을 훌륭히 발휘하여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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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대규모 파괴 공작만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 그 빌어먹을 마법 중에 이쪽이 알 수 있는 건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것 정도잖아.”

올리비아는 물론이고 크라이어조차 보니타 하인데르와 그레타가 거울을 매개로 먼 거리에서도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그레타가 크라이어에게 그런 거울을 건네준 건 지난 생에서였지, 이번 생에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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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마법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힘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긴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무서워해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올리비아의 산뜻한 결론에 크라이어는 무언으로 동의했고, 그녀는 곧 석벽을 다시 꼼꼼히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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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거래를 한 건지는 안 적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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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의 대가만 아주 길게도 적어놓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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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놈들은 대체 왜 육하원칙에 맞춰서 말을 하질 않는 거야. 이런 일을 벌인 ‘왜’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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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의 내용을 발설하면 안 된다는 제약이 있을 수도 있다만.”

크라이어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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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을 사냥감으로 다루며 손수 잡아다 바치는 것만큼의 가치가 있진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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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르위르 가문의 현재를 떠올리면 확실히 가치가 없었긴 하네.”

올리비아는 석벽을 밟은 그대로 겨울의 호수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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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위르 가문에서 고대신에게 무엇을 빌었고, 무엇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올리비아는 새파란 불꽃이 피어오르는 착각이 일만큼 푸른 눈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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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신에게 바친 게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았으니, 일단 그 ‘대가’부터 챙겨볼까.”

검붉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 슈가 르위르의 거취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기분 더러운 동굴을 빠져나온 두 사람이 곧바로 공원을 나서서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슈가의 집이었다.

이번에도 크라이어 혼자 슈가의 집을 찾았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는 전과 달리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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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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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손을 댄 건 아니다.”

크라이어가 굳이 덧붙인 말에도 올리비아는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만 끄덕거리며 그의 어깨에 포대처럼 걸쳐진 아이의 뺨을 콕 찔러보았다.

하지만 아이는 죽은 듯이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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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서 기절한 거니까 곧 깨어날 거다.”

올리비아는 아직 정황 뿐이지만 선조의 욕심으로 고대신의 ‘제물’로 바쳐질 운명을 타고 난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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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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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돌아가자.”

 

***

노르덴 국의 왕궁의 중앙부에 지어진 누구도 알지 못하는, 아니 아는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신전의 지하.

거대한 제단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레타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와 관자놀이에는 흉측한 푸른 핏줄이 울룩불룩 돋아 있었으며, 눈의 실핏줄도 터져 시뻘겋게 물들었다.

코에서는 검붉은 피가 간헐적으로 흘렀고, 입술은 말라비틀어져 허연 껍질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집중했다.

아니, 남자가 아니라 ‘도구’이자 ‘노예’라고 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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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낙인을 새길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면 안돼.”

쉬어빠져 귀를 긁는 그레타의 목소리에도 그녀 앞에 상의를 벗고 무릎 꿇은 남자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무슨 일이 생길지 묻지도 않았다.

그레타는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제 손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낙인을 간신히 통제하며 금발이 흔들리는 남자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 번에 성공해야만 한다. 두 번의 기회란 없으니까.

고대신의 첫 전사인 크라이어의 낙인을 찍을 때는 그녀의 아버지인 마법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롯이 그녀 혼자뿐이었기에 이 장대하고 고통스러운 낙인 작업을 다시 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

물론 아버지를 ‘정화’시킨 일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는다.

애초부터 후회할 일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윽고 그레타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남자의 날개뼈 사이에 고대신의 낙인을 찍었다.

-치이이익.

살을 지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지만, 타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낙인이 그녀의 손바닥에서 남자의 등으로 옮겨간 후 일 초, 다시 일 초가 흐른 후.

반쯤 내리깔고 있던 남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고 그레타의 입술 끝이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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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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