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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당신, 누구야? (70/146)


#70. 당신, 누구야?
2022.05.02.


눈을 부릅뜨고 목을 길게 빼서 주변을 살피다 보니 슬슬 뒤통수에서 이어지는 목덜미와 어깨가 뻐근하고 욱신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땅을 밟은 올리비아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로브가 풀물이 들어 얼룩덜룩해졌지만, 그녀는 대충 툭툭 털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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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짚었나? 아니, 여기 맞잖아. 그리고 괴기 현상이라는 거, 사실 맞아? 유령은커녕 그 비스름한 것도 못 봤잖아. 어때, 당신은 뭐 본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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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그리고 지도상에 표시된 장소는 이곳이 분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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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흐음.”

턱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던 올리비아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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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와.”

앞뒤가 다 빠진 그녀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지만, 크라이어는 답하지 않았다.

그의 미간에 실금이 가자 올리비아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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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돌아갔다가 다시 온다고 오늘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아. 그리고 뭐라도 건져야 돌아가는 길에 아이를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있잖아. 당신 아들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순 없어.”

피식 웃으며 농을 친 올리비아가 슈가의 집에서 꺼내 온 기분 나쁜 일기장을 흔들었지만, 크라이어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완전히 다른 것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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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겨서 돌아다니는 것도 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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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계속 앉아서 서류만 보고 있었더니 몸이 완전히 굳어 버렸나 봐. 지금도 머리가 너무 아파서 눈을 좀 뽑아서 씻고 싶은 기분이야.”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두드린 그녀는 영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를 향해 턱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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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가만히 있을게.”

올리비아가 저만 믿으라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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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대로 이 다리로 내가 가면 어딜 가겠어. 공원에 오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얌전히 있을 테니까 얼른 다녀와.”

살랑살랑 손을 흔들던 올리비아는 제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크라이어의 어깨를 꾹 밀었다.

이건 뭐, 벽도 아니고……. 사람 몸이 왜 이렇게 단단한 건데.

그러고 보니 가슴도 너무 딱딱…… 이게 아니라.

실없는 감상을 뒤로한 채 올리비아는 연신 그를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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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가라니까? 한번 훑어봐서 알겠지만, 가만히 있는 나에게 위협이 될 만한 건 없었잖아.”

결국 등이 떠밀려 떠나는 크라이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던 올리비아는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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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잠시 눈만 떼면 죽는 개복치도 아니고,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취급하기는.”

불퉁하게 혼잣말하던 문득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하늘이 놀라고 땅이 놀랄 일이 아닌가.

자신이 지나온 모든 생에서 제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남자가 지금은 무슨 사고를 칠까, 혹은 당할까 찡그리는 꼴이라니.

정말이지 지난 생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생에서는 이맘때쯤 뭘 하고 있었더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지난 네 번의 생을 더듬던 올리비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크라이어조차 맡지 못한 희미한 향이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

올리비아는 문득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얼룩덜룩한 피와 먼지로 엉망진창이 된 손이 미약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왜 여기에 있지? 그보다 여기는 어디야?

그런 의문이 들기 무섭게 올리비아의 귓가로 황실 기사의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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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셔야 합니다!”

그 목소리가 귀에 꽂히는 순간 올리비아는 번개를 맞은 듯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부 인식했다.

대륙 전쟁, 패배, 패배, 그리고 또 패배.

제국 황성의 코앞까지 다가온 괴물!

올리비아가 입을 열려는 순간.

-쾅! 콰콰콰쾅!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구름이 먼 곳에서 피어올랐다.

-쿠쿠쿵.

-쿠웅, 콰쾅!

태풍이나 해일같이 인간의 손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 재해처럼 밀려오는 상황에서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미친 듯이 목을 매만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그? 그가 누구지?

누군가 속삭이듯 한 질문에 올리비아는 입을 뻐끔거려 답을 내놓았다.

누구긴 그잖아. 전장의 괴물. 대륙 전쟁의 원흉. 나를 죽였고, 또 죽일 남자.

노르덴 국의 괴물.

와들와들 떨리는 양손을 꼭 쥔 올리비아는 핏발 선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불이라도 난 건지, 잿가루가 회오리바람처럼 하늘로 치솟는 곳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의 허리가 확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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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커헉, 커억.”

숨을 잘 쉴 수가 없어 컥컥 거리던 그녀는 불현듯 고개를 확 들었다.

눈물이 고여 뺨을 타고 흐르다 바닥으로 툭 떨어진 순간.

마법처럼 그 남자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한 것 같기도 했지만, 눈앞이 아득해지고 귀가 윙윙거리는 탓에 전혀 듣지 못했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박하자 늘 그랬던 것처럼, 그래. 늘 그랬던 것처럼 그의 검날 아래 목을 길게 빼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머릿속 한구석에 안개라도 낀 것처럼 멍하고,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제게 검을 겨눈 괴물을 바라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한 올리비아는 다 갈라지고 터진 입술을 혀로 축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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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누구야?”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칠 듯 검을 높게 들어 올린 남자는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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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누구야?”

올리비아는 이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었지만, 남자의 얼굴은 기괴한 입 외에는 마치 무언가로 뭉개놓은 것처럼 이상한 모양새였다.

홀린 듯 그 뭉개진 얼굴을 올려다보던 올리비아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녀는 다 찢어진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힘이 다 빠진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바들바들 떨면서 몸을 일으킨 올리비아는 검을 길게 늘어뜨린 채 웃고 있는 남자를 똑바로 가리키며 마디마디에 힘을 실어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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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크라이어가 아니야.”

다음 순간, 올리비아는 찬물을 맞은 듯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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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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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올리비아!”

연신 제 이름을 부르며 저를 끌어안은 크라이어의 얼굴이 흐릿하게 일렁거렸다.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은 올리비아의 눈에 그답지 않게 초조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들어왔다.

크라이어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올리비아의 핏기 하나 없는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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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들었나.”

여전히 시체 같은 안색이긴 했지만, 숨마저 잠시 멈추고 서서히 식어가던 조금 전과는 달리 희미하게나마 온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흐려져 탁해진 푸른 눈동자가 검붉은 눈동자와 뒤섞이자 올리비아는 입을 뻐끔거렸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오는 건 쉿쉿 거리는 밭은 숨소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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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크라이어는 점점 빨라지는 그녀의 심장 박동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올리비아를 고쳐 안으려고 느슨하게 풀었던 팔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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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흐으.”

하지만 올리비아의 상태는 더 나빠졌다.

심장이 미친 망아지처럼 쿵쿵거렸고,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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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

귓가를 두드리는 심장 고동을 뚫고 들어오는 크라이어의 부름에 올리비아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스스로도 지금 제 상태가 아주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편없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 몸이 왜 이런 건지도 알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입안의 살이 너덜거릴 만큼 잘근잘근 물었다.

지금 제 곁에 있는 크라이어는 지난 생과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지금의 그가 자신을 해할 리 없다는 사실도 안다.

그가 두렵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저를 죽일까 봐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는 제게 맹세를 했으니까.

그런데도 과거, 아니 이제는 오지 않을 미래에서 새겨진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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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악! 아악! 아아악!”

그녀를 아작아작 집어삼켰다.

올리비아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죽을힘을 다해 자신을 잡고 있는 그의 팔을 손톱으로 할퀴고 물어뜯은 탓에 크라이어의 팔 부근의 옷이 너덜너덜해졌고, 그 사이로 비치는 그의 몸에도 상흔이 새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크라이어는 그녀를 놓지 않았다.

그저 올리비아가 다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힘을 조절하며, 버둥거리는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을 뿐.

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텅 빈 공원에 올리비아의 비명 소리만이 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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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아, 하. 하아하아.”

밭은 숨을 내쉰 올리비아가 크라이어의 팔에 매달려 축 늘어졌고, 크라이어는 묵묵히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이윽고 목을 푹 꺾고 있던 올리비아의 입술 사이로 다 쉬어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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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마법, 마법이었……어?”

공원에서 일어났다는 괴기 현상, 대체 뭐냐고 투덜거렸던 그건 다름 아닌 환상이었다.

그것도 개개인이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각기 다른 환상.

이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마법이 아니라면 무엇이 있을까.

이 무슨 소설에나 나올 법한 무시무시한 마법이란 말인가.

희게 질린 올리비아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크라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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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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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는 올리비아를 안은 채 눈짓으로 바닥을 가리켰고, 올리비아는 그의 발치에서 아주 처참하게 망가진,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어떤 장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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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 아니라 함정이다. 특정한 향이 거의 맡을 수 없을 만큼 미량으로 풍기더군. 그 정도의 환각을 일으켰다면 아주 지독한 것이겠지. 시기를 가늠하기 힘들지만, 분명히 최근 것은 아니다.”

점점 목이 뒤로 꺾이는 올리비아를 고쳐 안은 그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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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특정한 장소에 들어가면 발동하는 함정이었을 텐데,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장치가 금이 가면서 그 안에 있던 향이 밖으로 흘러나와 괴기 현상을 일으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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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거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겠네. 겪은 사람이 전부 다른 말을 지껄였을 테니까.”

허탈하게 마른 웃음을 흘린 올리비아는 갑갑한 느낌에 그의 팔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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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놔줘.”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크라이어는 느릿하게 팔을 풀었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올리비아는 몇 번이고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뻑뻑한 눈가를 문지른 그녀가 완전히 박살 난 장치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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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까 기계를 부쉈으면 향이 진동을 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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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맡기 전에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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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려? 향을 어떻게 날린 거야? 마침 바람이라도 딱 맞춰 불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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