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
“큐브릭 스탠리 감독님은 정말 만나기 힘든 거 알고 있지?”
“탐도 처음 만났을 때 헬리콥터를 타고 집으로 찾아갔다면서요?”
“그때는 내가 시간이 없어서 그랬던 거야. 처음 만났을 때는 나도 긴장을 많이 했는데 정작 만나고 나니 생각보다 평범하고 친절한 분이더라고. 영화를 찍기 전까지는 좋았는데, 언제 영화가 끝이 날지 도대체가 알려주지를 않네. 앞으로의 일정이 잡혀 있는데 촬영이 길어지는 바람에 스트레스가 커.”
탐 크루스는 어느덧 3년이라는 세월을 큐브릭 스탠리와 함께 보내고 있었고, 이제는 그와 애증의 관계로 발전해 있었다.
큐브릭 스탠리는 미국 출신의 20세기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하나로 영화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완벽주의적인 제작 과정으로 유명했다.
매번 다른 규모의 예산과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작품마다 엄청난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영화 산업이 클래식 시대를 넘어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를 거쳐 현대로 넘어가는 시대를 상징하는 감독으로 존 포드나 알프레도 히치콕과 함께 영화사상 최고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체스 광이었는데 1950년대 초반 사진기사로 일하다 뉴욕 워싱턴 스퀘어 공원의 체스 시합에 출전해 상금을 타고, 삼촌과 아버지의 원조를 받아 자신의 첫 번째 장편인 욕망과 공포를 만들었다.
흥행에는 실패 했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을 시작하고 1968년에 영화 역사상 가장 환상적인 화면의 걸작으로 꼽히는 2001 오디세이 스페이스를 4년 만에 완성하게 된다.
이때는 컴퓨터 그래픽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라 아날로그 기술만으로 환상적인 시각효과를 연출했다.
아직 인류가 달에 가기 전에 영화를 만들었지만, NASA에 우주 관련 자료를 지원받아 만들어 우주 공간과 관련된 장면들은 뛰어난 사실성을 지녔다.
이상하게 상복이 없는 큐브릭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각효과상을 수상하게 되고, 이는 그의 유일한 상이 된다.
“그나저나 큐브릭 감독님이 미국을 싫어하는 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데, 비행기는 왜 안 타신데요? 본인만 비행기를 타면 촬영이 훨씬 더 편해질 건데, 여러 사람이 고생을 해야 하잖아요.”
“난 오히려 미국을 싫어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던데? 거기다 유태인인데 반 유태인 이라고 하더라. 비행기는 알아보니 친한 카메라맨이 비행 사고로 죽었는데 그의 타버린 카메라를 보고 트라우마가 생겨 비행 공포증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재미있는 건 큐브릭 감독님은 무려 1940년대에 비행 면허를 취득했데. 본인도 비행사고가 있었고, 지인도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자 비행기를 안 타게 된 거지. 그거 말고도 좀 특이한 점이 많기는 해. 그나저나 너 탁구는 할 줄 아니?”
비행기를 타지 않는 큐브릭 스탠리 때문에 동남아가 배경인 풀 메달 자켓을 촬영할 당시 영국 런던 외각에 있는 폐공장에다 수입한 야자수 나무를 심어 베트남처럼 만들었다.
“탁구요? 군대 있을 때 조금 하기는 했는데 갑자기 탁구는 왜 물어보는 거예요?”
“큐브릭 감독님 집에 가면 최고급 탁구 시설이 있거든. 배우들이랑 탁구를 해서 이기는 게 취미인 사람이라 너한테도 탁구를 치자고 할 것 같아서.”
큐브릭은 체스를 잘 두고 좋아할 뿐만 아니라 탁구 역시 좋아했다.
그의 영화를 보면 탁구 장면이 많이 등장하기도 하고, 영국의 집 지하에 세계 최고 수준의 탁구대를 설치해 두기도 했다.
방문객들은 종종 그와 탁구 시합을 해야 했는데, 그는 특히 배우와 탁구를 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탁구에서 배우를 이기면 현장에서 그들을 좀 더 수월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 외에도 큐브릭 스탠리는 여러 기행을 보이기도 했고, 유난히 집착하는 대상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활판술이었다.
그는 서체(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책을 엄청나게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모든 영화 포스터에는 푸투라체를 사용하는 것을 고집했다.
‘서체를 좋아한다니 잡서 생각이 나네. 기회가 되면 두 사람을 소개해 주면 재미있겠다.’
두 사람 다 괴팍한데다 은근 공통점이 있어 소개해 주고 싶었지만, 잡서도 새로 부임한 애풀에서 워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집에 가면 문구류들이 엄청나게 다양하게 있어. 문구류를 고르는 기준도 까다로운데 종이는 모두 6인치 4인치 비율만 사용해. 직원들에게도 모두 같은 종이를 사용하게 하더라고. 한 번은 그가 사용하는 잉크가 절판된다고 하니까, 시중에 남아있는 잉크를 100 통이나 사제기 하더라.”
그 외에도 상자뚜껑이 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상자 회사에 연락해 자신이 원하는 데로 상자 400개를 주문 제작하기도 했다.
“그 정도는 할리우드에서 워낙 특이한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 했는데, 정말 대단한건 몸을 엄청나게 사린다는 거야. 병균을 무서워해서 결백증이 있는데다 촬영장에 감기가 걸린 사람은 접근하지 못 하게 하더라. 한 번은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모르는 의사에게 진료 받는 걸 싫어해서 미국 브롱크스에 있는 옛날 치과 주치의를 영국까지 불러서 치료를 받았는데, 미국 면허로 영국에서 치료를 할 수 없다고 하니 미국 대사관에 자리를 만들어 치료를 받더라고.”
동민 역시도 그 동안 할리우드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별의 별 인간군상을 보아왔지만, 큐브릭 스텐리는 그 중에서도 특이한 사람이었다.
탐 크루스와 큐브릭의 기행에 관해 이야기 하다 보니 금방 그의 저택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자 하얗게 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쓴 유태계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다니엘 킴 이라고 합니다.”
“어서오게. 자네 이야기는 영국에서도 많이 들었다네.”
꼬장꼬장한 노인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생각 외로 상당히 다정다감했고, 사람을 가린다던 큐브릭 스탠리는 동민을 따뜻하게 반겨 주었다.
“큐브릭 감독님께서 저를 알고 계셨다니 놀랐습니다.”
“내가 영국에 있긴 하지만, 미국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가만히 있어도 여기저기서 소식들이 들려오지. 자네 이야기는 5년 전부터 들려오더군. 그리고 자네가 얼마 전에 만들었다는 ‘김치남’도 재미있게 보았네.”
학교에 제출한 단편 영화를 큐브릭이 보았다는 말에 깜짝 놀라워하자 탐 크루스도 같이 보았다며 동민의 김치 사랑을 인정해 주었다.
“후배 감독들이 자네 영화 이야기를 하기에 궁금증이 생겨서 학교측에 보여 달라고 했더니 필름을 보내주더군. 원본이라고 하기에 관람 후에 바로 돌려보냈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스탠리 큐브릭은 동민의 영화에서 소품을 사용하는 방법과 구도를 잡을 때 자신의 테크닉을 볼 수 있었다며 기술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동물이 아닌 식물을 모티브로 한 히어로의 등장을 반가워했다.
웨스 앤더슨의 색감이 어떤 면에서는 큐브릭의 스타일을 닮아 있었고, 크리스토퍼 눌란 역시 다른 의미로 큐브릭의 현실성을 담고 있었기에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더 샤이닝을 아주 좋아해서 영감을 많이 받았네요. 여기 오기 전에도 잭 니콜스를 만나 감독님 이야기를 듣고 왔거든요.”
“하하. 좋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겠군. 그 영화를 찍을 때 내면의 광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같은 장면을 수십 번씩 촬영 했었거든.”
영화에서 아주 유명한 장면인 잭 니콜스가 도끼로 문을 박살내는 촬영은 3일에 걸쳐 문 40개를 써 가면서 촬영 했다.
처음에는 잭 니콜스가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하다 10번이 넘어가면 힘이 빠져 연기를 하고, 20번이 넘어가면 좌절감으로 연기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30번이 넘어가면 진짜 광기가 내면서 솟구치게 되고, 영화에서 그가 보이는 미친 연기는 대부분 40번 이상 촬영해서 나온 진짜 분노였다.
더 샤이닝을 촬영할 당시 카메룬 제임스를 영국으로 불러 자문을 구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미국에서 촬영할 것을 권하자 예외적으로 할리우드로 넘어갈 준비를 했다가 런던 근교에 미국 호텔 같은 호텔을 짓는 것으로 합의하고 영화를 만들었었다.
영화의 원작자인 스티븐 킴에게도 큐브릭 스텐리를 만나러 간다며 어떤 사람인지 물어 보니, 그가 천재인 것은 확실하지만 자신의 영화를 전혀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 버렸다며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동민은 좋아하는 영화인 2001 오디세이 스페이스와 시계수리공 오렌지, 더 샤이닝에 관해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아직 인사를 나눈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의 서재에 앉아 할리우드의 근황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자네 혹시 탁구는 칠 줄 아는가?”
“몇 번 쳐 본적은 있습니다. 못 치지는 않지요.”
“그거 잘 되었군. 우리 집에 아주 좋은 탁구 시설이 있는데 한 번 보러 가지.”
큐브릭 스텐리는 동민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고, 자신의 탁구 실력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바로 탁구실로 향했다.
동민은 그냥 탁구 칠 줄 안다고 말 했지만, 전생에 비해 육체적으로 월등하게 성장해 있었고, 군대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후임들과 탁구를 쳤기에 상당히 자신 있었다.
“상당히 안정적이군. 동작도 빠르고 서브도 잘 받아내는 걸 보니 실력을 숨기고 있군.”
“오랜만에 치는 거라 몸을 조금 풀어야 할 것 같아서요. 감독님도 연세가 있으신데 현역 못지않으시네요.”
70대 중반의 큐브릭은 20대인 동민과 대등한 실력을 선보였고, 오랜만에 호적수를 만난 그는 아주 즐겁게 탁구를 쳤다.
“최근에 겨뤘던 상대 중 탁구를 가장 잘 치는군. 영국에서는 탁구를 잘 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단 말이야.”
“저보다 그 나이에 탁구를 잘 치시는 감독님이 더 신기하네요.”
“자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더울 마음에 드는군. 자네가 판권을 사고, 이번에 영화로 만들기로 한 가락지의 제왕을 내가 제작할 수도 있었다는 걸 알고 있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비틀즈가 제안을 했다고 하던데요?”
“존 레논이 소설책을 가지고 직접 찾아왔었지.”
큐브릭은 1969년에 비틀즈 멤버들을 주연으로 한 가락지의 제왕 영화화 제안을 받았었다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전까지는 가락지의 제왕이라는 소설이 있는 줄도 몰랐다며 영화를 읽어보니 작품성은 있지만, 당시 기술로는 영화로 만들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다행히 원작가인 돌킨이 자기 작품의 영화화를 반대해서 비틀즈에게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아도 되었다며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돌킨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상하게 지금 가락지의 제왕을 만들고 있는 피러 잭슨 감독과 큐브릭의 모습이 닮아 보였다.
“내가 미국과 할리우드 영화계를 싫어한다는 건 들어 봤겠지?”
“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왜 싫어하시나요?”
“고집 센 기득권 몇 명이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고 해서 마음에 안 들더군. 나는 그런 할리우드에서 활약 중인 자네를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어. 이미 기득권을 흔들 정도로 성장 한 것 같던데,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군.”
딱히 고생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위치에 올라서기 위해 여러모로 조심하긴 했다.
< 207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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