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4 >
푸른 하늘, 상쾌한 바다 냄새와 출렁이는 육체 아니 파도, 동민은 로스앤젤레스 해변 SOS 해상구조대 촬영 현장에 나와 있었다.
“다니엘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네요.”
“나보다는 닐이 더 잘 어울려요. 역시 해변은 햇살이 강하니 선글라스가 필수네요.”
두 사람은 해변에 있는 난간에 서서 진지한 표정으로 선글라스를 쓰고 드라마 촬영현장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동민이 가방을 열더니 혹시 해변에 위험에 빠진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야겠다며 망원경을 꺼내 바다 말고 배우들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흠흠. 다니엘. 혹시 망원경 잠깐 빌릴 수 있을까요?”
“조금만 더 보고요. 기다려 봐요.”
동민이 닐과 토닥거리며 한손에 잡히는 소형 망원경으로 보고 있는데 그들 옆에 나타난 아이는 커다란 망원경으로 촬영장을 보고 있었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지금 뭘 보고 있기에 표정이 그래?”
동민이 닐에게 망원경을 빼앗기자 옆에 나타난 아이에게 시비를 걸었다.
“어? 다니엘은 여기 무슨 일로 온 거야? 나 나는 별거 안 봤어. 바다에 있는 갈매기 보고 있었어.”
“무슨 갈매기를 그런 표정으로 보냐? 너 변태지.”
동민은 당황해 하는 신지를 놀리다 여긴 무슨 일로 왔는지 물어 보았다.
“우리 아빠가 데이비드 핫셀호프랑 친한데 이번에 드라마 주인공이 되었다고 해서 보러 왔어.”
동민은 신지와 아는 연예인 부르기 시합에서 탐 크루스를 불렀을 때 데이비드 핫셀호프가 키트를 타고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데이비드쪽이 아니라 여배우들을 망원경으로 보고 있던 거야? 학교 가서 아스카한테 친오빠가 변태라고 말해줘야겠네.”
“그 그런거 아니야. 난 그냥 주변을 살펴 보다 잠시 그쪽을 봤을 뿐이라고. 너야 말로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선글라스까지 쓰고.”
“나야 드라마 촬영이 있다기에 구경하러 왔지. 눈부신 해변에 갈 때 선글라스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야?”
동민은 신지와 이야기를 하다 고성능 망원경으로 현장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신지의 손에서 망원경을 낚아채었다.
“이리 줘. 내가 보고 있었단 말이야.”
“잠깐만 보고 줄게.”
동민이 망원경을 뺏어가자 신지가 달려 있는 목줄을 잡아 당겼고, 두 사람이 서로 보겠다며 힘겨루기를 했다.
뚝!
그러다 갑자기 망원경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동민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고, 신지는 뒷걸음질 치다가 바다에 빠져 버렸다.
“어푸어푸. 사람 살려! 나 수영 못 해.”
신지가 바다에 빠지자 동민도 당황했고, 튜브를 찾아보았지만 너무 멀리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동민이 바다로 뛰어들었고, 신지를 끌고 해변으로 가려 했지만, 신지의 발버둥이 너무 심했다.
“가만히 좀 있어. 나도 수영 잘 못한단 말이야.”
“어푸어푸 살려줘. 꿀꺽 꿀꺽 콜록!”
발버둥치는 신지 때문에 동민도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신지가 물을 몇 번 마시더니 발작을 일으켰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야! 정신 차려. 신지!”
계속 가라앉으려고 하는 신지 때문에 동민도 바닷속으로 빠지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두 사람을 덥석 붙잡고 해변으로 해엄 쳐 갔다.
“헉!헉! 감사합니다. 그런대 신지가 숨을 안 쉬어요.”
두 사람을 구해준 이는 놀랍게도 데이비드 핫셀호프였고, 그는 신지의 얼굴을 알아보더니 바로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신지가 걱정되어 동민이 우울한 표정을 하자 빨간 수영복을 입고 달려온 파멜라 앤더슨이 걱정하지 말라며 동민을 꼭 안아 주었다.
“흑흑. 내 친구를 살려 주세요.”
동민은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고, 다른 여배우들도 다가와 동민을 다독거렸다.
“쿨럭! 우왝!”
다행히 딱 두 번 물을 마신 신지가 금방 정신을 차렸고, 동민은 다행이라며 신지에게 다가가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다른 여배우의 품에 안겼다.
“어떻게 된 거에요?”
“네가 물에 빠졌는데 저기 있는 네 친구가 바다에 뛰어들어 너를 구했단다.”
핫셀호프가 동민을 가리키며 말했고, 신지는 여배우의 품에 안겨있는 동민을 보더니 눈에서 불이 일어났다.
슬슬 눈치가 보인 동민은 수영복을 입고 있는 여배우에게 이제 괜찮다며 일어나 신지에게 다가가 걱정했다는 표정으로 귓속말을 속삭였다.
“야. 너 데이비드 핫셀호프랑 뽀뽀했는데 설마 첫키스는 아니지?”
“으악!”
신지가 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데이비드는 다시 인공호흡을 해야 했다.
사실 두 사람이 빠진 바다는 키와 비슷한 깊이로 침착했다면 걸어서 나올 수 있는 정도였는데 신지가 너무 당황하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서니픽처스 대표의 아들이기에 신지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고, 옷이 젖어 버린 동민은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여배우들의 보살핌을 받아야만 했다.
소소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만족스러운 현장 견학을 마친 동민은 다음날 학교에 갔고 신지가 찾아와 조용한 곳으로 가 말했다.
“어제 있었던 일은 학교 아이들에게는 말하지 말아줘.”
“어떤 걸 말하는 거야? 물에 빠진 거 아니면 망원경으로 여배우 훔쳐 본거?”
신지는 당황해 하며 둘 다 말하지 말라고 했고, 동민은 김치를 열심히 먹고 이전에 먹었던 초밥을 다시 만들어 주면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다.
이후로 일주일 정도 동민은 고급 초밥 셔틀로 신지를 부려 먹다 아스카가 소문을 내는 바람에 일주일로 만족 해야 했다.
“다니엘. 투자한 드라마 촬영이 시작 했는데 제작진측에서 다니엘의 출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당분간 드라마에 나갈 생각은 없다고 했잖아요.”
“저도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다니엘이 주인공의 나이와 비슷한 것과 케빈은 12살에서 천재 소년으로 이미지가 형성되어 완벽한 캐릭터라며 꼭 필요하다고 말하더군요.”
이번에 추가로 투자한 드라마는 천재 소년에 관한 이야기인데 동양에서 온 라이벌로 잠시 동민을 출연시키고 싶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작가가 다니엘이 출연하지 않으면 다른 배우가 일본에서 온 천재 소년으로 출연해 초밥과 라면을 먹는 장면을 넣을 거라고 했습니다.”
드라마 작가의 얄팍한 도발에 굳은 심지를 가진 동민은 홀라당 넘어가 버렸고, 한국에서 온 천재 소년으로 김치와 비빔밥을 먹는 장면을 넣어주면 출연하겠다고 대답했다.
“결국 또 드라마에 나오네. 한국에 얼굴 그만 팔려고 했는데 국위선양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동민은 드라마 스튜디오에서 흰 가운을 입고, 대사를 열심히 외우고 있었다.
“흠. 네가 내 라이벌로 나온다는 녀석이로군. 똑똑하게 생겼다만 이 천재 의사 선생님에게는 부족하지.”
“안녕. 뉠 페트릭이지? 난 다니엘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주인공이 14살에 의사가 되어 병원에서 레지던스 생활과 청소년의 일상을 보내는 내용의 드라마였다.
병원 이야기다 보니 동민의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는데 드라마 마지막에 주인공이 블로그에 자신의 일기를 남기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는 기억은 떠올랐다.
금발의 곱슬머리를 하고 장난꾸러기 같지만 살짝 고집이 있어 보이는 뉠 페트릭을 만나자 반가웠다.
“난 라이벌을 반기지 않아. 촬영이 끝나면 너도 나를 숭배하게 될 거다. 하하.”
요상한 정신세계를 가진 뉠 페트릭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달아났고, 동민은 귀엽다고 생각하며 촬영을 시작했다.
“다니엘 선생님은 한국에서 오신 심장질환 전문의로 국제 의료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저희 병원 레지던스 생활을 하러 오셨습니다. 마침 두기 선생님과 같은 나이라 특별히 여기로 발령 받으셨지요.”
동민이 병원 의사와 간호사에게 소개되는 장면 촬영을 하던 도중 응급 환자가 들어오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심장압전이군요. ACC로 대동맥을 잡고 어레스트가 올 수 있으니 에크모를 연결해 주세요. 드레인은 제가 직접 삽입하겠습니다.”
동민이 어려운 의학용어를 능숙하게 말하면서 수술 장면은 NG 없이 한 번에 성공시키자 배우와 스태프 모두 놀라워했다.
“의학 드라마 처음 하는 거 맞아? 성인도 어려워하는 걸 어떻게 한 번에 성공시키는 거지?”
“뉠은 항상 두세 번 촬영 하자나요.”
동민의 능숙한 모습에 뉠의 얼굴이 붉어 졌고, 더 잘하는 모습을 보이려다 평소 보다 자주 실수를 했다.
“야. 넌 어떻게 대사를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야?”
잠시 쉬는 시간에 뉠이 다가와 동민에게 조심스레 물어 보았다.
수많은 의학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리뷰 영상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숙해졌지만, 동민은 뉠에게 김치의 영험함이라고 알려 주었다.
“정말 김치를 먹으면 기억력이 좋아져서 더 잘 외어진다고?”
“바로 효과가 나오지는 않는데 먹다 보면 확실히 좋아져.”
일 년 정도 드라마를 찍다보면 익숙해져 알아서 대사가 늘겠지만, 김치 전도사 동민은 뉠 페트릭에게 김치를 장기 복용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까 먹던 베지터블 샐러드 믹스는 뭐야? 특이하게 생겼던데?”
“그건 비빔밥이라는 건데 영양이 아주 풍부한 건강한 음식이지. 고기가 들어 있지는 않지만, 고기를 좋아하면 추가로 더할 수도 있어.”
“아니야. 난 야채 좋아해.”
처음에는 동민을 경계하던 뉠은 금방 호감을 표했고, 자꾸만 동민에게 달라붙었다.
나이도 비슷해서 별생각 없이 받아 주다가 그가 필요 이상으로 달라붙자 갑자기 동민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뉠 페트릭은 영화보다 연극판에서 주로 활동하고, 나중에 대리모를 통해서 쌍둥이를 출산하지.’
잠시 잊고 있었던 뉠 페트릭의 성정체성이 기억나자 순간 동민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며 온몸의 근육이 긴장 되었다.
“나중에 너희 집에 한국 음식 먹으러 놀러가도 괜찮아? 비빔밥이 맛있어서 다른 음식도 먹어 보고 싶어. 나중에 친해지면 우리집에도 놀러 와서 자고가.”
입이 풀린 뉠이 쉴세 없이 수다를 떨었고, 동민의 귀에는 집에서 같이 잠을 자자는 말이 들리자 깜짝 놀라며 핑계를 대었다.
“내가 매번 출연 하는게 아니라 시간이 날지 모르겠네. 올해는 다른 드라마랑 영화 현장에 가야해서 바쁠 거야.”
“그래? 그래도 시간 맞춰보면 괜찮지 않을까? 난 너 마음에 들어.”
다시 소름이 돋은 동민은 화장실에 가야겠다면 도망쳤고, 계속 달라붙는 뉠 때문에 고생하며 촬영을 마쳤다.
“닐. 천재 소년 두기는 이번 에피소드에만 출연한다고 꼭 전달해요. 의학 드라마는 나랑 안 맞는 것 같아요.”
“대사랑 연기 잘만 하던데 문제라도 있나요?”
“의사 가운 입고 연기 하는게 너무 불편하네요. 그렇게 전달해 주세요.”
이후로도 두 번 더 촬영을 했고, 뉠은 동민에게 계속 들러붙었다.
다행히 아직 어리기에 성정체성 확립이 되지 않았지만, 불편한 건 사실이었고, 동민이 나오는 장면 촬영이 모두 끝나자 드디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래. 여긴 할리우드야.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으니 다시 긴장을 해야겠네.”
천재 소년 두기 촬영이 끝나자 봄방학이 시작 되었고,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영혼은 그대 곁에를 찍고 있는 스필버그와 어드리 햅번을 만나러 떠났다.
< 044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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