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할리우드 김치 재벌-43화 (28/265)

< 043 >

닐과 함께 89년에 투자할 영화를 정하고, 새로운 투자처를 알아보다 보니 짧은 겨울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투자를 하다 보니 숫자에 약한 동민은 본인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고, 평소와 다름없이 세탁소에서 할리우드 스튜디오로 배달을 다니며 지냈다.

“여보세요? 다니엘이니? 스필버그 감독이란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 다름이 아니라 영혼은 그대 곁에 촬영 하기 전에 사전 미팅이 있는데 올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전화 했단다.”

“당연히 가야죠. 날짜와 시간 알려 주시면 맞춰서 갈게요.”

할리우드의 정석인 스필버그의 사전 미팅이라면 꼭 참석해서 어떻게 준비하는지 보고 싶었다.

주연 배우로는 죠스와 미지와의 조우에 나와 대박을 터트린 리처드 드라이퍼스가 출연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1943년 작 조라는 이름의 사나이를 리메이크 해 만드는 로맨틱 판타지 드라마 였다.

“일찍 왔구나.”

“감독님이 초대해 주셨는데 늦으면 안 되죠.”

동민은 약속 시간 보다 일찍 도착해 사전 미팅이 어떻게 준비되고, 진행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감독님. 천사 역으로 캐스팅 했던 숀 코네리가 다른 영화에 출연하느라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면서요?”

“대신 인디아나 존슨에는 더 많은 시간을 들이기로 했으니 이해해야지.”

“그럼 천사 역에는 누구를 쓰죠? 중요한 역할인 만큼 이미지가 좋은 배우를 써야합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완벽한 배우를 섭외했지. 오늘 오기로 했는데 조금 있으면 도착 할 거야.”

동민은 구석 자리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누군가 회의실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으악! 눈부셔!”

흰색 바지에 하얀 니트를 입은 날씬한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잠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관계자들이 모두 깜짝 놀라 침묵이 맴돌았고, 스필버그 감독이 웃으며 환영했다.

“하하. 출연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으셨는지요?”

“오랜만에 촬영장에 찾아오니 설레어 즐겁게 왔답니다. 제가 67년에 마지막으로 영화에 출연하고 22년 만에 다시 연기를 하는 건데 괜찮을까요?”

“어려운 역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선생님의 연기력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나오는 거라 편하게 연기 하시면 됩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예상보타 큰 170의 키를 가진 노년의 여성은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가지고 있었고, 주름이 있는 얼굴은 묘하게 기품이 흐르면서 청순한 매력이 있었다.

‘세상에 어드리 헵번이라니. 그녀가 이 영화에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네.’

영혼은 그대 곁에가 큰 흥행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드리 햅번의 마지막 출연작이었다.

주인공 리처드 드라이퍼스가 화재진압 비행기로 산불을 끄다 사망하게 되고 그를 영혼 상태로 지상으로 보내는 천사 역을 어드리 햅번이 맡게 되었다.

그녀가 등장하자 배우와 스태프들이 들떴고, 동민도 93년에 암으로 사망하는 그녀를 생전에 직접 만났다는 것에 기분이 묘했다.

최근에 우연히 읽은 잡지에서 그녀의 인터뷰를 본 이후 더욱 그녀의 팬이 되었는데 88 서울 올림픽으로 유명해진 한국을 개고기를 먹는 나라라며 비난하는 브리지트 바르도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어드리 햅번은 프랑스에서도 너무 심한 동물애호가라며 욕을 먹는 브리지트 바르도에게 전쟁이 터지면 그보다 더한 것도 먹게 된다며 개고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비판했다.

실제로 1929년 생인 어드리 햅번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었고, 당시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피난을 가 있었는데 전쟁터 한 가운데로 몰리는 바람에 튤립의 구근을 캐먹고, 피난민의 집에 버려진 상한 음식도 먹으며 목숨을 연명했다.

안 그래도 이미지가 좋은 어드리 햅번이 한국을 대변해 주자 그녀를 향한 동민의 호감도가 최고치를 찍고 있었다.

어드리 햅번이 사전 미팅 자리에 어린 아이 한명이 있자 관심을 가졌고, 아이를 좋아하는 그녀가 동민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동양인 소년이 출연하는 장면은 없었는데 여긴 어떻게 오게 되었니?”

“스필버그 감독님께 영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보고 싶다고 부탁드려서 견학하러 왔어요.”

“너는 커서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겠구나.”

어드리 햅번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동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동민은 그녀의 따스한 손길에 가슴 깊이 묘한 울림을 받았다.

그녀와의 짧은 인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사전미팅이 진행 되었고, 동민은 한쪽에서 조용히 스필버그가 진행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예상보다 훨씬 시스템이 잘 잡혀 있었고, 메뉴얼을 따르면서도 상황에 따라 유연한 모습을 보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혼은 그대 곁에 사전미팅이 끝나고 동민은 오랫동안 아이들을 키우며 검소하게 살아온 어드리 햅번과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기자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왔기에 서둘러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도 동민은 그녀에게 사인을 받을 수 있었고, 그녀가 출연하는 장면은 보러 가기로 약속 했다.

“삼촌, 오늘 누구 사인을 받아 왔는지 아세요?”

“글쎄다 웬만한 할리우드 스타 사인은 여기 다 있으니 할리우드 출신 배우는 아니겠구나.”

동민이 어드리 햅번의 사인은 내밀자 삼촌이 깜짝 놀라며 부러워했다.

“세상에 정말 어드리 햅번을 만나고 온 거니? 어떻게 만나게 된 거니?”

어드리 햅번 세대를 살아온 삼촌은 평소와 다르게 들떠 있었고, 의상에 관심이 많아서 인지 지방시와 그녀의 긴 우정 이야기를 해 주었다.

스필버그의 미팅을 다녀온 며칠 뒤 한국으로 돌아간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민아 네가 소개해 준 비디오 점원이 골라준 영화를 확인해 봤는데 괜찮을 것 같더구나. 방송국에서도 알아 봤는데 아직 수입이 되지 않은 영화라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더라.”

아빠는 한국으로 돌아가 방송국 인맥을 통해 수입사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동민의 말대로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방송국에서 인수인계까지 마치려면 시간이 걸리니 두세 달 뒤에는 미국으로 갈 수 있을 거야. 그 전에 그 친구에게 다른 영화도 추천해 달라고 하렴.”

“잘 되었네요. 돈은 제가 많이 벌었으니까 너무 무리하거나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진행하세요.”

“우리 동민이가 미국에 가더니 많이 듬직해져서 아빠가 참 고맙구나. 그건 그렇고 한국에서 너로 인해 난리가 났단다.”

서울 올림픽때 미국 선수들과 메스컴에 많이 나오는 바람에 얼굴이 알려지긴 했는데 아빠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케빈은 12살이라는 드라마가 시작했는데 네가 나온다고 홍보하는 바람에 드라마 반응이 뜨겁단다. 한국에서 네가 너무 유명해 졌어.”

“당장은 불편하겠지만, 시간이 지나 제가 자라면 못 알아보겠죠. 지금은 미국에 있으니 별로 상관은 없을 거예요.”

아동배우 출신들은 성인이 되면 못 알아보는 경우가 여럿 있기에 동민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고등학생 이후로는 영상 매체에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 네 말을 들으니 그렇긴 하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 주마.”

아빠는 영어공부를 시작했는데 엄마가 너무 아는 척을 해서 힘들다며 불평을 하고 전화를 끊으셨다.

동민은 한국에서 케빈은 12살이 유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올해 시작하는 다른 드라마가 생각났고, 닐에게 텔레비전 드라마 리스트를 뽑아 오라고 했다.

“요청하신 드라마 중 이건 해외 투자를 해야 해서 힘들 것 같습니다. 불가능 한 건 아닌데 세금 문제가 있어서 일이 많이 복잡해 질 겁니다.”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캐나다 드라마 일거라고는 생각 못했네요. 그래도 미국에서 캐나다 투자면 쉽지 않은가요?”

“유럽이나 아시아 보다는 수월하겠지만, 그래도 일이 늘어나는 건 사실이지요.”

동민은 전생에 즐겁게 보았던 초능력을 얻어 빠르게 달리기도 하고, 공중부양하면서 헤어스프레이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14살 앤드류라는 남자아이가 주인공인 드라마에 투자 하고 싶었지만 예상 외로 미국 드라마가 아닌 캐나다 드라마였다.

닐이 해외 투자가며 복잡한 서류가 많이 늘어난다며 투자를 권유 하지 않았고, 촬영지가 캐나다면 직접 보러 가기도 어렵기에 투자를 포기했다.

“그리고 멕시코에서 이런 드라마가 만들어 진다는 정보는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저희 회사에서도 관련 자료를 찾기 힘들던데요?”

“하하. 할리우드 관련자 중에는 남미 사람도 꽤 있다고요. 한인 타운쪽에는 히스페닉분들이 많아서 전해들었어요.”

동민이 닐에게 알아봐 달라고 한 드라마는 1966년 대본이 만들어져서 74년과 82년 아르헨티나에서 드라마화 되었던 작품이었다.

올해부터 멕시코에서 아가씨 선생님이라는 제목으로 드라마화 되는데 89년 10월부터 한국에도 방영 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멕시코 드라마도 투자하기 어렵겠죠?”

“사실 멕시코라면 오히려 투자하기가 수월합니다. 로스앤젤레스와 멕시코가 붙어있다 보니 할리우드에 투자를 받기위한 회사가 있거든요. 그쪽을 통하면 쉽게 투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히메나 선생님은 만나 볼 수 있겠네요.”

동민이 요청한 멕시코 드라마는 천사들의 합창 이었는데, 개구쟁이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과 천사 같은 히메나 선생님의 이야기로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빈부격차나, 인종차별, 종교문제등 꽤나 심각한 주제가 나오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시선으로 잘 해결하는 교육적인 드라마였다.

시릴로, 라우라, 다비드, 발레이라, 하이메, 카르멘, 마리아호아키나까지 동민은 아직도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문방구에서 천사들의 합창 반지를 사던 기억도 나네.’

동민이 추억을 떠올리며 흐뭇해하고 있는데 옆에서 닐이 초를 쳤다.

“이 드라마는 투자 조건으로 현장답사와 상시 견학이 들어 있는데 왜 그런 거죠?”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존엄함이 있는 현장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싶어서죠. 촬영지도 할리우드에서 가까워 금방 갈 수 있잖아요.”

“정말 그 이유 때문인가요?”

“흠흠.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아세요. 계속 따지면 닐은 두고 혼자 갈 거예요.”

“이 투자 건은 제가 목숨을 걸고 성공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닐이 장엄한 표정으로 동민에게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겠다고 약속 했고, 동민도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닐이 손에 들려있는 드라마는 특이하게 생긴 빨간색 구조용 튜브를 들고 달리기 힘든 모래사장을 슬로우 모션으로 해쳐나가 위기에 빠진 사람의 목숨을 구해내는 숭고한 내용의 드라마였다.

전생에 한국에서는 이 드라마가 토요일 점심에 방영했기에 동민은 부모님이 자리를 비운 친구 집에 모여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빨간색 수영복을 입고 달리는 파멜라 앤더슨을 코피를 흘리며 브라운관이 뚫어져라 보았었다.

그렇게 수많은 남자아이들을 어른으로 만들어준 SOS 해상구조대가 올해부터 로스앤젤레스에서 촬영에 들어갔고, 동민은 절대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 043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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