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3화.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네. (2)
“오, 옵니다!”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맞서 싸워야지!”
“사, 살수는? 살수는 써도 되는 겁니까?”
그 말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소림 승려들을 상대로 살수를 쓴다? 그건 정말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개방의 장로들과 맞서 싸우며 화산의 제자들이 짊어졌던 짐을, 이 순간 그들이 똑같이 지게 된 것이다.하지만 이곳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본 이들이라면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과연 그 ‘짐’
에 대한 고민에 의미가 있긴 한 거냐고 말이다.
“아―미―타―불!”
우우우웅!
커다란 불호와 함께 고아하게 뻗어 나온 금빛 서광이 쾌속하게 장로들의 면전에 도달했다. 기겁한 장로들이 허둥지둥 단봉을 들어 날아드는 권력을 막아 냈다.
하나.
쿠우우우웅!
“아아아아아아악!”
단봉을 휩싼 푸른빛 경기와 황금빛 서광이 맞부딪히는 순간, 장로들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광 어린 권의 무게가 장로들의 기운을 단번에 부숴 버린 것이다.
기운에 밀린 장로들은 태풍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이리저리 튕기며 대전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무, 무슨 힘이……!”
하지만 마음껏 경탄할 틈도 없었다. 삽시간에 거리를 좁힌 소림승들이 얼기설기 짜여 있던 장로들의 진영 사이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정중동(靜中動).
산보하는 듯 느릿해 보이는 걸음이지만, 실제로는 무엇보다 빠르다. 몸으로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체감하기 어려운 소림 무학의 진수였다.
“이, 이익!”
장로 중 하나가 코앞으로 들이닥친 소림승의 머리를 향해 단봉을 내리쳤다. 강맹한 기력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봉을 다 휘두르지 못하고 멈칫했다.
이대로 내리쳤다가, 혹여 이자가 제때 대응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머리가 깨지기라도 한다면? 그 뒷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찰나의 망설임이 다급한 전장에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탁.
틈을 놓치지 않은 소림승의 손바닥이 장로의 가슴에 툭 닿았다.
“합!”
쿠우우우웅!
이어진 발경(發勁)이 장로의 내부를 엉망진창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커헉!”
입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토해 낸 장로의 몸이 그 자리에 허물어진다. 목숨에 지장이 있을 만큼의 부상을 입은 건 아니지만, 기운이 모조리 흔들렸으니 한동안은 마음대로 운신할 수 없을 것이다.
“아미타불!”
그 급박한 와중에서도 쓰러진 이에게 짧게 반장을 한 소림승은 몸을 날리며 다음 상대를 찾아 나섰다.
대전 안에 몰아친 황색의 바람은 고여 있던 개방을 그야말로 휩쓸어 대고 있었다.
“저, 저거, 와…….”
“개쩌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기세 좋게 달려들려던 조걸이 슬쩍 옆을 보았다. 조걸이 할 말을 대신 뱉어 버린 백천은 어느 순간 멍하니 소림승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제 역할인데.”
“……진짜 대단하지 않으냐?”
“그…… 그건 그렇기는 한데…….”
소림승들은 말 그대로 장로들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조걸이 뭔가 퍼뜩 생각이 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지금까지 저런 양반들이랑 욕하고 싸운 겁니까?”
“…….”
“…….”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 일순 어색함이 어렸다.
“지금이라도 좀 생각을 달리…….”
“아, 아잇! 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잠깐 흔들리려던 윤종이 단호하게 외쳤다.
“우리랑은 입장이 다르지 않습니까! 저 양반들은 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주먹으로 치는 양반들인데. 치고 싶은 대로 치는 사람과 혹시 죽을까 싶어 검면으로 쳐야 하는 우리가 어떻게 같습니까?”
“……그걸 감안해도 대단하지 않냐?”
“어……. 그건.”
그 말도 맞지. 어, 맞아.
“……소림 진짜 무식하게 세네.”
물론 보이는 게 전부인 것은 아니다. 소림승들이 강한 것도 맞지만, 지금 개방의 장로들 역시 제 실력을 조금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싸움이란 기세가 절반이므로.예상도 못 한 소림이 나타나 공격해 온다는 데서 오는 충격과, 그런 소림과 진심으로 맞서 싸울 수 없는 상황이 개방 장로들의 손발을 묶었다. 그러니 화산과 싸우던 장로들과는 영 다른 사람들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개방의 장로쯤 되는 이들이 저리 허무하게 휩쓸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미―타―불!”
콰아아아아앙!
뭐, 제 실력을 발휘한다고 승산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혜연 스님이 백 명이네.”
“솔직히 그건 좀 과장이죠.”
“혜연 스님 같은 사람이 백 명이네.”
“……그건 부정이 안 되네요.”
화산의 제자들이 막 고개를 내젓는데, 불쑥 한 사람이 허공으로 솟구치듯 뛰어올랐다.
“……사매?”
카각!
모두가 소림의 위세에 감탄하기 바빴는데, 유이설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의 등은 ‘이 상황이 나는 더럽게 마음에 안 든다’
라고 말하는 듯했다. 단번에 도약한 유이설이 개방 장로들 사이로 화라락 뛰어내렸다.
이윽고.
“아아아아아악!”
“뭐, 뭐냐! 갑자기!”
화산의 제자들에게는 퍽 익숙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고! 저도 도울게요!”
“뭐 합니까! 우리도 싸워야죠, 사숙!”
“그렇지! 그래!”
정신을 차린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고쳐 잡았다.
지금이야 기세 덕에 파죽지세로 몰아붙이고 있지만, 머릿수에서 열세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만일 개방이 정신을 차리고 수의 이점을 활용한다면 피해가 커질 것이다. 상대가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그들도 합류해 이 전투를 끝내야 했다.
“몰아붙여라!”
“예!”
그렇게 백천을 선두로 화산의 제자들이 맹렬한 검기를 내뿜으려는 순간.
“오오오!”
콰아아아아!
한발 빠르게 앞쪽에서 치솟은 황금빛 장력이 아직 우왕좌왕하는 장로 몇을 단번에 쳐 날렸다.
“스님!”
“저 양반 아주 신나셨네!”
조걸의 말대로 혜연의 얼굴은 드물게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사문의 사람들과 함께 싸우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가 내심 짊어지고 있던 응어리를 덜어 간 모양이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은 채로 혜연이 입을 뗐다.
“제 뒤를 따르시…….”
“침착하거라.”
그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혜연이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언제 그 많던 장로들을 뚫고 온 것인지, 근처에 나타난 혜방이 빙그레 웃으며 혜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 사형…….”
“잘 지냈더냐?”
“저는…….”
혜연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크!”
날아드는 단봉 하나를 부드럽게 쳐 낸 혜방이 웅혼한 장력으로 장로를 뒤로 밀어 내더니 혜연의 옆에 섰다.
“애썼다.”
“…….”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때가 좋지 않구나. 우선 해야 할 일부터 하자꾸나.”
“……예, 사형!”
“장문대리!”
“예!”
“인사는 상황을 끝내고 합시다.”
“알겠습니다!”
백천이 검을 휘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방의 말대로 지금은 우선 장로들을 정리하고, 개방의 난을 진압하는 게 먼저다.
“몰아쳐라!”
“예!”
화산이 쏟아내는 붉은 매화검기와, 소림의 두 사형제가 뿜어내는 황금빛 기운이 한데 어우러졌다.
“……휘유.”
그 모습을 본 청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래서 민머리 새끼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니까.”
소림을 적으로 상대하게 된 개방이 불쌍할 지경이다. 달려오는 소림승을 맞닥뜨린 것만으로 안절부절못하다 얻어맞고 쓰러지는 장로들의 모습에 헛웃음이 다 나왔다.
설사 이긴다 해도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저항할 의지도 상실한 모습.
그 정도 각오도 없는 이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단 말인가?
“어떻게…….”
“엥?”
앞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청명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일호신개는 이 이상 일그러질 수 없겠다 싶은 험악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저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지?”
“아앙?”
“소, 소림은 화산의 적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소림이 대관절 왜 너희를 돕는 것이냐!”
그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쯧.”
청명이 혀를 찼다.
“이래서 개방이 그 많은 정보를 쥐고도 단 한 번도 강호를 이끌지 못한 거지.”
“뭐?”
톡.
청명이 검 끝으로 제 머리를 가볍게 건드렸다.
“날 때부터 달고 태어났잖아. 이걸 쓰라고, 이걸. 이 멍청한 새끼야.”
“이익……!”
“하긴, 네 그 한심한 대가리 속에는 명분이나 세력 같은 것만 잔뜩 들어가 있겠지. 그러니 놓치는 거야.”
“내가 뭘 놓쳤다는 말이냐?”
“사람.”
그 두 글자에 일호신개의 눈이 흔들렸다.
“명분에 흔들리는 것도 사람이고, 세력을 쌓는 것도 사람이야. 세상을 수로만 파악하는 너는 절대 상상할 수 없겠지.”
청명이 한심하다는 듯이 일호신개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런 거까지야 모르더라도, 최소한 내가 움직였으면 당연히 대비가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게 정상 아니냐? 그것도 생각 못 하는 대가리로 개방의 방주가 되겠다고? 개방 말아먹을 놈 같으니.”
세상에는 그런 이가 있다.
우수하기에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두머리가 되면 우수하다고 믿는 이가. 제가 쓴 감투가 제 능력을 증명할 거라 믿는 이가.
“네, 네놈…….”
일호신개는 모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한마디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를 갈던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럼! 나는 그저 침묵해야 했단 말이냐? 저 작자가 개방을…….”
“아아.”
청명은 듣기 싫다는 듯 일호신개의 말을 잘라 버렸다.
“서로 뻔히 알면서 헛소리하지 말자고. 애초에 너도 그럴 마음으로 시작한 거 아니잖아.”
“뭐?”
“네가 정말 그게 걱정이고 불만이었다면, 방주 하나가 개방을 뒤흔들 수 있는 이 체계를 바꾸려고 했겠지. 새로운 어린 방주를 지원하면서 말이야.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으면서.”
“…….”
“그건 싫었지? 네가 직접 권력을 쥐고 흔들 수 없으니까. 너는 개방이 잘못되어 가는 데 분노한 게 아니라, 개방이 네 뜻대로 굴러가지 않아서 화난 거야.”
청명이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너 같은 놈들은 내가 잘 알지.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만 그득그득 들어차서, 어떻게든 없는 능력을 부풀리려고 안간힘 쓰는 놈들. 한 가닥 권력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는 놈들.”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 같았다.
“뭐 사실 너 같은 놈들이야 흔하니까 평소라면 그냥 적당히 때려 주고 갔을 테지만…… 요 며칠 사이 내가 조금 짜증 나는 옛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야. 잊으려고 하는데, 널 보고 있으니 그 이야기가 자꾸 생각이 나거든?”
“지금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뭔 소리긴.”
청명이 피식 웃었다.
“넌 뒈졌다는 소리지.”
그러더니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일호신개가 이를 악물며 황급히 소리쳤다.
“놈을 포위해라!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일반 방도들만 도착하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
일호신개의 두 눈이 독기로 넘실거렸다.
하지만 그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의 수족처럼 움직이던 장로들이…… 일호신개의 시선을 피해 버린 것이다.
“네, 네놈들……!”
움직이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는 그들을 보며 일호신개의 얼굴에 황망함이 스쳤다.
일호신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평거지들이 합류하면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된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은 소림을 힘으로 때려잡은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이곳의 누구도 그런 책임을 지면서까지 일호신개를 지킬 의리 따윈 없는 것이다. 이미 그들에게 주어질 승리의 과실은 사라진 지 오래니까.
“가엾게도.”
청명이 안쓰럽다는 듯 과장되게 혀를 찼다.
그와 일호신개 사이를 벽처럼 가로막고 있던 장로들이 좌우로 물러났다. 일호신개와 청명이 정면으로 대치했다.
“이래서야 네가 방주가 된다고 해서 딱히 뭐 달라질 것도 없겠는데?”
“닥쳐라, 이놈!”
분개한 일호신개가 발작처럼 외쳤다.
“다 네놈 때문이다! 네놈이 모든 걸 망쳤다! 가만두지 않겠다!”
어마어마한 기세를 폭발시키듯 뿜어낸 그가 청명을 향해 쇄도했다.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은 작게 웃었다.
“그래도 지금은 개새끼 사이의 범처럼 보이긴 하네.”
저 장로들에 비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타악!
청명이 발을 단단히 내디디며 자세를 낮추었다.
“힘 좀 센 거지새끼지.”
파아아앗!
청명의 검기가 세차게 허공을 격하며, 날아들던 일호신개의 장력을 단번에 갈랐다.
이는 일호신개가 품었던 야망의 몰락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