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2화.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네. (1)
이 모든 사태에 당황한 건 비단 개방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편이라는 겁니까?”
“그,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소림이?”
“그러니까.”
“소림 새끼들이요? 아니, 소림 놈……. 소림 분들이?”
“그렇다지 않으냐.”
“이게 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소림승들을 보던 조걸이 백천을 향해 시선을 획 돌렸다.
“사숙! 사숙은 알고 계셨습니까?”
“……저 새끼가 뭘 한다고는 했는데.”
……백천도 확실히는 몰랐다는 말이다.
“그…… 여하튼 우리 편이라는 거죠?”
“그런가 보네.”
“그럼 이제 같이 싸운다는 겁니까?”
“그……리되지 않을까?”
“허…….”
조걸이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더니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을 중얼거렸다.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네…….”
설마 저 소림과 손을 맞춰 싸우는 일이 벌어질 줄이야. 누가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때 혼란에 빠져 있던 장로들 중 하나가 악을 쓰며 외쳤다.
“소림이 어째서 천우맹을 돕는단 말이오! 우리는 같은 구파거늘!”
소림이 천우맹을 도우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다소 완곡하게 돌려 묻는 게 맞다. 하지만 지금 개방 장로들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아미타불.”
혜방은 그 이치에 맞지 않는 질문을 듣고도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저희는 천우맹을 돕는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조금 전 그 말은 무엇이오!”
“저희는 그저 개방 방주의 요청을 받아 온 것뿐입니다. 같은 정파이며 구파일방에 속해 있는 개방이 구원을 청했다면, 응당 돕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할 말을 잃은 장로가 혜방을 바라보았다.
“이, 이건 개방 내의 일이오! 지금 소림이 개방의 일에 관여하겠다는 것이오?”
“그러합니다. 타문의 일에 관여하는 건 금지되어 있지요. 방주의 요청을 듣지 않은 상황이라면 말입니다.”
그러자 장로들의 안색이 짧은 순간 여러 번 변했다.아무리 내몰릴 위기에 처했다 해도, 어쨌든 이 취임식이 끝나지 않은 이상 풍영신개는 여전히 개방의 방주다. 개방의 입장을 대표할 수 있는 유일한 자라는 의미다.그 허울뿐인 ‘방주’
라는 직책이 지금 ‘명분’
이라는 이름의 올가미가 되어 장로들의 목에 걸린 것이다.혜방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게 꼭 개방만의 일은 아닌 듯합니다만.”
그가 장로들에게 포위된 이들을 가만히 보았다.
“타문은 이미 관여를 했고, 그중에는…… 음, 소림의 제자 역시 있는 듯합니다.”
“그, 그건…….”
“소림의 제자가 상처를 입었습니다. 소림의 제자가 공격당하고 있는 일일진대, 이게 어찌 단순히 타문의 일이란 말입니까!”
혜방이 크게 호통쳤다.
장로들의 시선은 이제 소처럼 순박한 얼굴로 멀뚱멀뚱 눈을 끔뻑이는 혜연에게로 꽂혔다.
화산의 제자들이 수군거렸다.
“상처?”
“어…… 저기 뭐가 좀 까지긴 했네.”
“……저게 상처면 모기는 독수리지.”
“아무튼, 뭐 소림 제자라는데요?”
“맞긴 맞잖아?”
“파문당하지 않았나?”
“파문장을 받은 적도 없고, 파문식을 거행한 것도 아니니 파문 예정 정도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아직 소림 소속인 건 맞는 거 같은데.”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일이 이렇게 된다고요?”
거의 눈 가리고 아웅 수준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딱히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어떤 상황이든 소림의 제자가 공격받은 이상, 소림은 이 일에 개입할 명분을 얻은 것이다.물론 방주의 요청을 받았다는 것 역시 차고 넘치는 명분이고.
“이, 이게 진짜 소림의 뜻이오?”
“그러합니다.”
“방장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셨다는 말이오? 정녕?”
한 장로의 물음에 혜방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음, 확실히 방장께서 내리신 명은 아닙니다.”
“그것 보시오!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지금 방장께서는 이 상황을 알기에는 너무 먼 곳에 계시고, 소림에 대한 지원 요청은 숭산으로 왔습니다.”
“…….”
“소림의 율법에 따르면, 방장의 명을 기다릴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라 판단될 시 그곳에 있는 가장 높은 배분을 가진 이가 불법과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대리하여 명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일호신개의 얼굴에 창백하게 질렸다.
지금 소림의 높은 이들은 모조리 숭산을 비웠다.
그리고 혹시 모른다는 심정으로 장강에 있는 법정에게도 배첩이 늦게 도달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일호신개 그 자신이다.
조금 전까지는 절묘하게 이를 데 없던 그 수가, 이 순간 치명적인 악수로 돌변하여 그의 목을 조르게 된 것이다.
“지금 숭산에서 가장 높은 배분을 가진 이는 바로 저입니다. 그대들이 거짓을 퍼뜨린다는 게 확실한 이상, 소림의 이 모든 행사는 불법과 도리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한 문파의 일은 힘이 아니라 정당한 과정과 절차에 따라 이뤄짐이 온당합니다. 그러니 장로들께서는 이만 물러서시고, 원하시는 바를 정식으로 정당히 이루십시오.”
“이…….”
“그렇지 않다면!”
혜방이 단호히 외쳤다.
“그대들은 소림을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아미타불!”
혜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림승들이 일제히 불호를 외었다.무형의 압력이 쏟아지는 듯했다. 장로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소림을 상대한다. 강호에서 그 의미를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소, 소림을…….”
“우리가? 소림을?”
물론 지금 이곳에 온 이들이 소림의 진짜 전력은 아니다. 고작해야 일백도 되지 않는 무승에 지나지 않는다.하지만 개방의 장로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고작 몇십에 불과한 소림의 무승이 얼마나 강대한 전력인지.그리고 이들이 이곳에 있는 화산의 검수들과 힘을 합친다면, 얼마나 두려운 적이 될지도 말이다.
“그…….”
주변 눈치를 보던 당소소가 속닥속닥 말했다.
“저…… 사실 이런 말이 좀 이상할 수 있는데요.”
“응?”
“소림이 든든해 보인다면, 제가 잘못된 걸까요?”
“설마.”
“그럴 리가.”
“나는 예전부터 소림을 가장 존경했어.”
“저도 소림에 입문하고 싶었습니다!”
“사숙. 걸이가 소림 가고 싶답니다.”
“가. 가, 새끼야! 가!”
“……왜 나만…….”
화산 일행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적으로 만난다면 더없이 껄끄럽고 두렵지만, 한편이 된다면 그보다 더 든든할 수 없는 곳이 소림이다.
게다가 화산의 제자들은 누구 덕분에 소림의 무학과 보조를 맞추는 데 더없이 익숙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전세가 바뀐 것 같죠, 사숙?”
“흠.”
백천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그러더니 어깨를 쫙 펴고 우렁차게 일갈했다.
“천우맹의 입장도 같습니다. 개방의 장로들은 정식으로 절차를 밟으십시오. 그러지 않는 이들은 개방을 어지럽히는 역도로 간주할 것입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뒤에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진짜 기가 막히네.”
“분명 조금 전까지 곧 뒈질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는데.”
“이쯤 되면 적성을 잘못 찾은 거 아닐까요?”
“아미타불……. 화산의 미래는 밝을 것 같소.”
“그거 욕이죠?”
소림의 등장 이유와 목적을 깨달은 화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이들을 압박하던 개방의 장로들은 반대로 궁지에 몰렸다. 이제는 되레 소림과 화산이 그들을 포위하고 압박하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단순히 진영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아무리 개방의 장로들이라지만 이 두 세력을 상대로 싸울 수 있겠는가?
“어, 어떻게…….”
“신개!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저희는 이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대장로!”
세가 불리해지니 장로들은 다급히 성토할 이를 찾았다.
“신개께서 계획이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 이러면 계획이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호신개에게 쏟아지는 아우성을 들으며, 풍영신개와 백천은 동시에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일호신개를 철석같이 따르던 이들이 이제는 되레 그를 향해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그를 따르는 게 불리하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말이다.
풍영신개의 얼굴이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붉어졌다.
“장로! 어서 대책을…….”
“닥쳐라!”
그 순간 일호신개의 입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이 멍청한 놈들! 이제 와 발을 뺀다고 너희가 저지른 일이 사라질 것 같으냐?”
“그런…….”
당황한 장로들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개방의 율법에서, 방주를 시해하려 한 자에게 내려지는 처분은 오직 하나뿐이다.
죽음.
물론 이 많은 이들을 다 죽이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 있는 장로들이 모든 권한을 잃고 자리에서 내쫓기는 것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백 명도 안 되는 이들이다! 그리고 저들은 소림 방장의 명을 따르지 않는 반도와도 같다! 방장께서 이 사실을 알면 저들을 그냥 두겠느냐? 당연히 우리의 편을 들 것이다.”
일호신개의 말에 혜방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될 확률이 높다는 걸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다! 저들만 제압할 수 있으면 된다! 소림의 반도들이 개방을 공격한다고 알리고 방도들을 불러들여라!”
장로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게 하면 이건 더는 개방 내부의 일만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뭣들 하느냐!”
“……예!”
이제는 돌아갈 길이 없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이는 그저 호랑이가 지쳐 쓰러지길 바라며 죽는 순간까지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결국 먼저 마음을 다잡은 장로 몇몇이 밖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이내 소림승들을 향해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혜방이 얼굴을 굳혔다.
“들어라.”
“예!”
“최대한 피를 보는 일 없이 장로들을 제압하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예!”
화산 역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방주님.”
“말씀하시게, 장문대리.”
“방주님께서는 방주님이 해야 할 일을 해 주십시오.”
“……무슨 말인지 알겠네.”
이곳에서 결과를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풍영신개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곳으로 몰려올 개방의 평거지들을 막는 일.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풍영신개뿐이었다.
“반드시 막아 내겠네.”
“부탁드립니다.”
풍영신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 소협! 방주님을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송백도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풍영신개의 뒤를 따랐다. 익숙한 얼굴만 남은 걸 확인한 백천이 나직이 헛기침했다.
“크흠.”
“또 시작한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안 해! 안 해, 이 새끼들아!”
백천이 얼굴을 붉히며 역정을 내고는 제 사질들을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우리가 사실 좀 많이 맞았잖냐.”
“사숙이 많이 맞았죠.”
“저희는 뭐 딱히.”
“사숙! 눈에 멍들었어요.”
“끄응…….”
이를 악문 백천이 검 끝으로 장로들을 가리켰다.
“복수할 시간이다! 다 때려 눕혀!”
“그래, 이래야 사숙이지.”
“동룡이를 지켜라!”
“가자!”
“아미타불!”
신이 난 화산의 제자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이들보다 앞선 이가 있었으니 혜연이었다. 어쩐지 가장 신난 그는 들뜬 얼굴로 한 줄기 바람처럼 쇄도했다.
“적도를 제압하라!”
이윽고 소림의 무승들도 금빛 바람이 되어 장로들에게 돌진했다.
“아―미―타―불―!”
개방의 심장과도 같은 총단 한중간에서 가슴속까지 파고들 만큼 우렁찬 불호가 터져 나왔다.
실로 웅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