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4화.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네. (3)
“서둘러라!”
“예? 아……. 예!”
“더 서두르라고, 더! 총단이다! 총단으로 가자!”
“예, 장로님!”
총단 밖에 있던 평거지들을 순식간에 규합한 개방의 장로들이 그들을 이끌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평거지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얼떨결에 따라 달렸다. 장로들의 다급한 모습만 보아도 내부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알 수 있으니 굳이 지금 이유를 따져 물을 만큼 멍청한 이는 없었다.
“총단으로 들어가면 장로들을 공격하는 이들을 모조리 때려눕혀야 한다! 알겠느냐?”
“예!”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조건이다! 이유를 막론하고!”
평거지들의 얼굴에 의문이 스쳤다. 이런 당연한 일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진입해라!”
“예!”
어느새 총단에 도달한 그들이 활짝 열린 총단 문을 보았다. 우선은 명에 따라…….
“멈춰라!”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으며 뛰어들었다.
“엇!”
“뭐야?”
거지들이 순간 멈칫했다. 장로들이 즉각 언성을 높였다.
“문답무용! 공격해라!”
거지들의 몸이 반사적으로 그 명을 이행했다. 손에 든 단봉에 공력을 불어넣었다.
“하아아아압!”
콰아아아아앙!
평거지들이 단봉을 휘두르기도 전에 앞을 막아선 이가 봉으로 강하게 땅을 내리쳤다. 총단 앞 탄탄하게 다져진 대지가 터져 나가며 움푹 파였다.
“저, 저거!”
대경실색한 거지들이 우뚝 멈춰 섰다.
그 위력에 놀라서가 아니다. 조금 전 본 일 수가 분명 개방의 독문무학인 타구봉법이기 때문이었다. 저 봉을 휘감은 옥빛 기류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 이상은 갈 수 없다.”
평거지들을 막아선 풍영신개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개방의 거지들은 방주의 명을 따르라! 모두 자리에서 대기하라!”
“바, 방주? 지금 방주라고 한 건가? 자기가?”
“방주님이라고?”
거지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이 알던 개방의 방주 풍영신개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인데, 또 보여 준 무학은 분명 개방의 것이다. 지금 이게 어찌 돌아가는 상황이란 말인가?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장로 중 하나가 악다구니를 썼다.
“이익! 거짓말이다! 모두……!”
“기심(記心)!”
그러자 풍영신개의 커다란 호통이 그에게 떨어졌다.
“네 별호에 부끄럽지도 않으냐!”
풍영신개의 일갈에 기심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실 그의 별호는 가슴속에 있는 따뜻함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그의 스승이 직접 지어 준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저 풍영신개의 말이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
“뭣들 하느냐! 방주를 사칭하는 저 악도를 당장 때려죽이지 않고!”
두 눈에 독기를 가득 품은 기심개가 악을 썼다.
“와 보거라.”
쾅!
풍영신개가 그 자리에서 다시 진각을 밟았다.
“내가 저지른 잘못은 내가 수습할 수밖에 없다. 설사 이 자리에서 쓰러져 죽는다 해도 나는 내 발로 길을 열지 않을 것이다.”
타구봉을 있는 힘껏 잡은 그는 타는 듯한 마음을 억눌렀다.
그라고 왜 두렵지 않겠는가.
저들이 일제히 공격해 온다면, 부상까지 입은 그는 도저히 당해 낼 재간이 없다. 어쩌면 개방의 평거지들에게 맞아 죽는 최초의 개방주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더없이 어울리는 죽음이지.’
개방을 망친 그에게 개방이 벌을 내린다면, 달게 받을 수밖에.
“가려면 내 시체를 밟고 가라!”
풍영신개가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리겠다는 듯 양발을 단단히 박아 넣었다. 장로들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뭐 하느냐! 당장 저놈을 죽여 없애라!”
하지만 그 명령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거지들은 없었다. 당황한 기심개가 외쳤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아니…… 방주님일지도 모르잖습니까?”
“이런 멍청한 녀석 같으니! 저놈이 무슨 방주란 말이냐! 놈은 방주가 아니다! 척 보면 모르겠느냐?”
“그, 그건…….”
“당장 저 악도 놈을 패 죽이라고! 어서!”
평거지들은 여전히 고민하는 낯으로 기심개와 풍영신개를 번갈아 보았다. 기심개는 속이 바짝 탔다.
“이런 멍청한! 시간 끌 것 없…….”
“그럼 장로님들이 직접 하십시오.”
“……뭐?”
그때, 뒤에서 툭 날아든 목소리에 웅성거리던 소리도 뚝 끊겼다. 당황한 기심개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니 몇몇 거지들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고작 한 명입니다. 심지어 방주님도 아니라면서요. 그럼 장로님들이 직접 처리하면 될 일 아닙니까?”
“아까 보니 정정하게 잘도 달리시던데, 왜 이런 건 저희한테 맡기십니까?”
“그랬다가 진짜 방주님이기라도 하면 죄는 다 우리한테 뒤집어씌울 거면서. 에이, 난 안 할란다.”
“이, 이놈들이!”
격노한 기심개는 당장이라도 불만을 제기한 이들을 색출하여 본보기로 처단하고자 했다. 그러나 우글우글 모인 거지들 속에서 가장 처음 목소리를 냈던 이를 잡아내기란 쉽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불만은 평거지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졌다.
“솔직히 아까 소림 사람들이 총단에 가는 걸 뻔히 봤는데, 이제 와 무슨 습격자라고. 그럼 소림이 적도라도 된단 말이야?”
“그럼 우리는 저기 가서 소림 놈들이랑 싸워야 하나?”
“장로들도 못 당하는데 우리가 가서 뭘 한다고.”
“평소에는 장로랍시고 거들먹대더니 이럴 땐…….”
“이, 이익! 그 입들 못 닥쳐? 다들 미쳐 버렸나!”
기심개는 분노하다 못해 당황하여 모두를 황급히 돌아보았다. 이제 평거지들은 모두 이 상황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얻어 둔 밥, 조금 있으면 쉴 텐데.”
“그럼 가서 먹어야지.”
“총단이 습격받는다는데 그래도 될까?”
“저 위에 장로님들도 있고, 소림 사람들도 있는데 그게 뭐가 걱정이야. 거, 아까 보니 종남 사람도 올라가는 거 같던데.”
“그럼 걱정 없지. 그렇게 쟁쟁한 양반들 다 모여 있는데, 우리가 가서 뭘 하겠나.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지.”
거지들은 묘한 시선으로 기심개를 힐끗거리다 슬슬 돌아서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이놈들! 당장 돌아오지 못하겠느냐?!”
정말 별일 아니라고 여겨서 쉬러 가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 보아도 방주와 장로가 권력을 두고 다투는 상황. 그런 일에 굳이 끼어들어 좋을 게 없다.
게다가 다른 이유도 있었으니.
“네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는 것이냐! 이건 항명이다!”
기심개의 악에 받친 고함에 몸을 돌린 거지 몇몇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장로라고 거들먹대시더니, 이제는 거지도 아니신 모양입니다? 쪽박 깨기 딱 좋으시네.”
“뭐라고?”
“생각해 보십쇼. 우린 평생을 눈칫밥 먹고 산 놈들입니다.”
그 말에 기심개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우리가, 지금 어느 쪽이 찔리는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겠습니까?”
“이, 이놈들……. 이건 개방! 그래, 다 개방을 위한 일이다!.”
“확실히 장로님은 이제 거지가 아닙니다.”
“뭐, 뭐라?”
거지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뭐가 이득인지 모르니 거지가 되는 거고, 그래도 뭐가 옳은 줄은 아니까 거지가 되어도 빌어먹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기심개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이 발길질해도 죄송하다며 굽실대지 못할 놈이면, 애초에 개방에 붙어 있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뭐 그놈 때려눕히고 돈 빼앗으면 편한 걸 몰라서 안 한답니까?”
“그렇지!”
“요새 장로님들 영 마음에 안 들기는 했어. 뭔 거지새끼들이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지.”
거지들의 차가운 눈빛이 기심개와 그를 따르는 장로들에게로 쏟아졌다.
“여하튼 우린 모르겠으니까, 알아서 하십쇼.”
“이, 이놈들! 장로가! 지금 개방의 총단이 무너지는 걸 모르겠단 말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도…….”
그 말에 한 거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망하면 뭐가 어때서요?”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망해 봐야 거지 아니오? 우리가 더 망할 게 뭐가 있는데?”
순간 할 말을 잃은 기심개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거지들은 저들끼리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밥이나 먹게.”
“어어. 같이 가자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거지들을 보며 장로들이 휘청였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보던 풍영신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망해 봐야 거지라…….’
그래. 그게 개방이었다.
가진 것이 없기에 호협할 수 있다. 지킬 것이 없기에 제 몸마저 내던질 수 있다.
그런 개방에 가질 것을 쥐여 주고, 지킬 것을 안겨 주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불의를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 건 다름 아닌 풍영신개다.
그럼에도.
‘변치 않은 곳도 있구나.’
손에 틀어쥘 게 생긴 이들이야 변했지만, 여전히 손에 쥔 게 없는 이들은 과거의 개방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은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이, 이게…… 이러면…….”
기심개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풍영신개를 돌아보더니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아시오, 방주?”
“모르지. 몰랐지. 진즉에 알아야 했던 일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너희도, 나도 이제는 개방의 운명을 정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개방의 방도이되, 개방의 정신을 잃은 이들이니까.”
기심개가 의문 어린 눈으로 풍영신개를 뚫어지게 보았다.
“이제 운명을 정할 수 있는 이는 단둘이겠지. 여전히 개방의 정신을 따르고 있는 이들과…….”
잠시 말끝을 흐린 풍영신개가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총단 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 개방이 좇으려 했던 걸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이.”
눈을 감고 속으로 불러 보았다.
‘검존이시여.’
잃은 건 마찬가지다. 아니, 화산은 오히려 개방보다 훨씬 많은 걸 잃었고 많은 곳에 배반당했다.
그럼에도 화산은 다시 일어선다. 과거와 다름없이.
콰아아아앙!
그 순간 굉음이 울렸다. 총단의 한쪽 벽이 터져 나가며 붉은 매화 잎이 개봉의 하늘에 흩뿌려졌다.
“다시 피는구나.”
지고 또 져도 기어코 다시.
그럴 것이다. 꽃은 그저 결과이므로. 저 꽃을 피워 내는 건 결국 화산의 뿌리이며 화산의 정신이니까. 그 정신이 아주 사라지지 않는 한, 꽃은 언제고 다시 필 것이다.
풍영신개의 시선이 매화 잎을 좇았다.
“우리 역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겠지.”
콰아아앙!
대전 벽에서 터져 나온 푸른 장력에 몸을 실은 청명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아!”
“저, 저거!”
자신이 피운 매화 잎들의 중앙에서 환상처럼 몸을 뒤집은 청명은 단숨에 대전을 향해 다시 쏘아졌다. 흡사 강하하는 매 같았다.
검 끝에서 피어난, 노을을 닮은 검기가 세차게 덮쳐 오는 푸른빛 장력을 여지없이 갈랐다.
“추의(追義)…….”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더는 의(義)를 따르지 않는 추의십팔장은 화산의 혼을 실은 매화 검을 막을 수 없다.
청명이 쏟아 낸 붉은 검기는 저항하는 푸른빛을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베어 내며 낡아빠진 개방의 총단을 격했다.
저건 일호신개를 향한 검이 아니다.
개방을 향한 검이었다.
그들이 결코 잊지 않아야 했던.
“하아아아아압!”
청명의 포효가 하늘까지 뻗었다. 이내 붉은 검이 개방의 총단에 박혀 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저, 저거!”
“히이이이이익! 무너진다아아아! 피해!”
개방의 상징과도 같던, 수백 년을 이어 온 총단.
그 일각이 굉음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