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5화. 내가 누구죠? (5)
“저…….”
개방 장로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낯선 사내가 전신에서 뿜어내는 저 기운은 분명 개방의 신공절학 옥현신공(玉玄神功)이었다.
개방의 장로부터만 익힐 수 있는 개방의 독문 무공. 개방의 방도임을 드러내는 데 있어 이 이상의 증좌가 존재할 리 없다.
심지어 저 신공을 쓰는 낯선 사내가 입에서 꺼낸 말은 더 충격적이지 않은가.
“바, 방주?”
“방주라고?”
개방의 용두방주.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이.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저자의 모습은 그들이 알던 방주 풍영신개의 모습과 다르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하, 하지만…… 옥현신공 아닌가?”
“개방의 장로 중에 옥현신공을 익힌 이가 어디 한둘도 아니고!”
“이런 멍청한! 방 내에 저런 이가 있던가?”
“그건…….”
이 괴이한 사태에 장로들조차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무리 개방에 방도가 많고, 장로의 수 역시 다른 문파에 비할 바 아니라고는 하나, 평생을 같이해 온 장로가 생면부지일 리 있겠는가?
그들이 아는 한, 저런 모습의 개방 장로는 없다.
그렇다면 저자가 정말 풍영신개란 말인가?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뭣들 하고 있느냐?”
사내, 풍영신개가 서늘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장로 중 하나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정말 방주십니까?”
풍영신개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항취.”
“허, 헉!”
긴장으로 가득했던 항취(恒醉)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름을 아는 건 물론이고, 이자의 말투나 목소리가 항상 들어 왔던 방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감각은 눈앞에 선 이가 정말로 방주라고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었다.
이리되니 일호신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 장로. 이게 어찌 된 일이외까? 분명 방주께서 승하하셨다고 들었거늘!”
목소리에 진노가 섞여 있었다. 일호신개는 말없이 풍영신개만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본 적 없는 얼굴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일호신개는 저자가 진짜 풍영신개. 즉, 방주임을 직감했다.
개방의 방도 중 저런 무학을 지니고 그의 눈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는 이는 오직 풍영신개뿐이니까.
확신을 가진 일호신개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장로들은 뭐 하느냐? 저 죄인을 당장 포박하라!”
“예?”
“자, 장로님? 그게 무슨…….”
장로들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감히 개방의 무학을 훔쳐 익히고 방주를 사칭하는 저자를 당장 잡아들이라고 했다!”
일호신개에게서 가공할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폭풍처럼 뿜어져 나온 기세는 풍영신개의 옥현신공이 흘렸던 기운을 단숨에 밀어 내 버렸다.
풍영신개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직이 말했다.
“사형. 정말 이렇게까지 하실 셈입니까?”
일호신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형이라니, 간악한 놈이 감히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나는 너 같은 사제는 둔 적 없다. 네가 사칭한 내 사제는 이미 적들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대체 어디까지…….”
“개방의 총단에서 방주를 사칭하는 건 죽음으로 다스려야 할 중죄. 너는 그 대가를 혹독히 치르게 될 것이다.”
풍영신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리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을 정말로 겪으니 마음이 참담하였다.
길이 다르다고는 하나, 그는 정당한 개방의 방주다. 개방의 방도가 방주를 부정하는 걸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놈을 잡아라, 당장!”
“자, 잠깐 기다리십시오!”
사태를 주시하던 추면개가 벌컥 고함을 내질렀다.
“저자가 방주라면 지금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일호신개 당신 아니외까?”
그러자 몇몇 장로들의 얼굴에 동요가 스쳤다.
맞는 말이다. 만일 저자가 정말로 개방의 방주, 풍영신개라면 일호신개가 거짓으로 그의 죽음을 꾸며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일호신개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외려 담담하게 물었다.
“그대는 대체 뭘 보고 저자를 방주라 하는 것이오?”
“……예?”
“증좌라도 있소?”
추면개가 입을 닫았다. 당연히 명확한 증거 따위는 없다. 하지만 저자의 목소리와 무학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가 개방의 무학을 익히고 나타났다는 것만으로 그를 방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오? 개방의 방주 자리가 그리 쉬운 것이오?”
“그건…….”
“네놈이!”
일호신개가 순간 살기를 뿜으며 풍영신개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정말 방주 풍영신개라면 당연히 방의 신물을 지니고 있을 터! 어디 내놓아 보아라. 그렇다면 내가 목을 빼 죗값을 치르겠다. 어떠냐? 네가 신물을 지니고 있느냐?”
잠시 침묵하던 풍영신개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신물은 지금 내게 없소.”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풍영신개가 고개를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신물을 가져올 방법이 있소. 허락한다면…….”
“청구대(靑狗臺)! 당장 저놈을 잡아 꿇려라!”
“예!”
일호신개의 뒤쪽 문이 열리며 눈빛이 형형한 거지들이 우르르 대전 안으로 밀려들었다.
“머, 멈추십시오!”
추면개가 악을 쓰며 황급히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이리 해결할 일이 아니잖습니까?”
“이성을 찾으시오, 추면개 장로.”
하지만 일호신개가 서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신물조차 지니지 않고, 총단에 불쑥 쳐들어와 방주를 사칭하는 자요. 그런 이에게 휘둘린다면 세상이 개방을 두고 뭐라 하겠소?”
“…….”
“진실은 놈을 잡아 취조해 보면 드러날 일. 이 이상 앞을 가로막는다면 추면개 그대 역시 다른 뜻을 품은 걸로 알겠소.”
“이, 이런…….”
추면개가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장로들의 동조를 구해 이 사태를 일단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건 장로들의 서늘한 눈빛뿐이었다.
그 순간 추면개는 깨달았다.
‘중요하지 않은 거구나.’
장로 대부분은 저자가 진짜 풍영신개인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아니, 설령 저자가 풍영신개라도 개의치 않을 기세다.
“어찌……. 어찌 이러실 수 있소, 다들!”
노한 추면개가 언성을 높였다. 일호신개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해를 못 하는군, 장로. 모르겠소? 저자는 절대 풍영신개일 수 없소.”
“어째서…….”
“저자가 진짜 풍영신개라면, 지금까지 개방의 방주가 우리 모두를 속여 왔다는 말이 되니까. 와병 중이던 방주가 사실 멀쩡했고, 병을 핑계 삼아 미룬 모든 일이 사실은 개방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일이었다는 의미가 되오. 모르겠소?”
추면개가 숨을 헉 들이켜며 입을 다물었다. 일호신개가 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아는 방주는 그런 이가 아니오. 아니, 개방의 방주라면 그럴 수 없소! 그러니 저자는 절대 개방의 방주일 수 없단 말이오. 아시겠소이까?”
일호신개가 노기 띤 얼굴로 풍영신개를 노려보았다.
“방주는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개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이였소. 그런 방주를, 내 사제를! 개방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려 했던 악적으로 몰아가다니! 이 후안무치한 놈!”
“자, 장로님! 그게 무슨…….”
“모르겠느냐? 이 천하에 개방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이가 누가 있겠느냐?”
“…….”
“내 사제이자 방주였던 풍영이 놈들의 간자라도 되었다는 말이냐? 어디 감히 이곳에서 그딴 망발을 지껄인다는 말이냐?”
일호신개의 두 눈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이 모습만 본다면 사제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이들을 향해 극도로 분노한 사형처럼 느껴진다. 의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개방의 장로들은 일호신개의 진짜 말뜻을 알아차렸다.
저자가 방주라면?
그렇다면 개방은 방주가 지금껏 있지도 않은 병을 핑계로 방을 방치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사방의 타문에 보낸 전갈이 사실은 그저 착각이었음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이보다 더 심한 망신이 존재할까?
방주가 내팽개치고, 그 방주의 죽음조차 착각하여 천하에 첩지를 보내는 문파. 그 이상 우스운 문파가 세상에 또 있겠는가?
아니, 고작 비웃음을 사는 정도에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개방이라는 문파가 사파나 마교의 계략에 빠져 수십 년 동안 강호에 해를 끼쳐 왔다고 인정해야 할 판이다. 설령 인정하지 않아도 세상은 분명 개방을 손가락질할 것이다.
이 사태를 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풍영신개가 다시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그걸 다잡을 생각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
“그러니 지금은 진실을 밝히게 해 다오. 그게 방주인 내가 개방을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니까.”
풍영신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호신개가 벼락같이 호통쳤다.
“끝까지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외인 따위가 개방을 위해 할 일은 없다!”
“사형! 아니, 일호신개!”
“그 입 닥쳐라, 이 간악한 놈!”
풍영신개가 입술을 짓깨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쯤 되면 아마 모두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가 정말 방주인 풍영신개임을. 모습만 바뀌었을 뿐, 지금껏 개방을 이끌어 오던 이임을.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친 장로들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버리거나, 원독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문이 막혔다.
“그대가 방주라는 증거가 있소?”
“어딜 감히 방주를 사칭하느냐! 이 뼈째 씹어 먹을 놈이!”
“개방이 우습게 보이더냐!”
일호신개를 따르는 이들이 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를 따르지 않던 이들도 차마 풍영신개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풍영신개는 애초에 여기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 진실 여부를 떠나서.
“장로…….”
“걱정하지 마시오, 추면개.”
추면개의 힘없는 목소리에 일호신개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진상을 알아내야 할 테니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내 저자를 생포해 무슨 일을 꾸민 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알아내겠소.”
추면개는 기력 없이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이건 진실이 아니다. 옳음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면, 적어도 더 적은 사람이 다치는 선에서 개방의 안위를 지켜 낼 수 있을 것이다.
추면개가 풍영신개를 향해 곁눈질했다. 그 복잡하고도 묘한 눈빛에 풍영신개는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주먹을 너무 꽉 쥐고 있느라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 고통도 몰랐다.
이 자리에서 그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눈빛이 명명백백히 알려 주고 있었다.
귓가에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기만으로 죽어 간 이들이 안타깝고 서글퍼서, 제 안위를 지키게 만들고 싶었다고?”
“……검협.”
“똑바로 봐라. 이게 너희가 만든 개방이다.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고 제 안위만을 지키는 자들의 결말이지.”
그 말은 명검보다 더 날카롭게 풍영신개의 영혼을 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