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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06화 (1,507/1,567)

1506화. 말로 해서 될 놈이 있지. (1)

풍영신개의 주먹이 잘게 떨렸다.

이 모든 게 정말 그의 탓인가? 검존의 말대로, 이게 그가 저지른 일의 결과인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가 의도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고.

하지만 차마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의기는 계산하지 않기 때문에 의기다.”

냉정한 청명의 목소리가 연이어 풍영신개의 귀를 파고들었다.

“너는……. 아니, 너희는 대가 없는 의기에 모든 것을 건 이들이 서글펐다고 했지.”

“…….”

“그래. 서글프지. 안타깝지. 하지만 그렇기에 개방인 거다. 그렇기에 지킬 가치가 있는 거다. 봐라. 이게 네가 지키려던 개방인가?”

풍영신개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쪽을 바라봐 오는 장로들의 눈에 어린 것들을, 그도 보았기에.

상황이 어찌 흘러가는지를 명명백백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순간의 이익을 위해, 안위를 위해 자신을 속이는 이들의 눈빛이었다.

이쯤 되니 풍영신개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스승인 현풍신개는 개방 그 자체를 지켜 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본디 지키려 했던 개방을 변하게 했다는 것을.

그들이 의도한 것 이상으로 말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더 이상 가슴에 끓는 의로운 피를 위해 제 모든 걸 바칠 수 있던 과거의 개방도가 아니다. 잇속을 따지고 제 몸을 빼내는 데 익숙해진, 한낱 장사꾼에 불과하다.

그런 이들이 모인 곳을 두고 과연 개방이라 할 수 있을까?

저들이 그와 현풍신개를 제대로 알지 못했듯이, 그 두 사람 역시 개방이 어찌 변해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토록 지척에서 서로를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개방도들을 마냥 탓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자신의 안위와 방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라고 지시했던 건 다름 아닌 풍영신개 자신이다.

십 년, 또 십 년, 그리하여 수십 년.

그 긴 시간 동안 해 온 일이 의혈로 넘쳐나던 개방을 좀먹어 들어가 현재에 이르게 한 것이다.

“……검협.”

차마 청명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풍영신개에게는 충분히 후회하고 뉘우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청구대는 무엇 하느냐. 놈을 당장 포박하라는 말 못 들었느냐!”

“예!”

일호신개의 외침과 함께, 대전 안으로 난입한 거지들이 풍영신개를 둘러싸듯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백천이 입을 열었다. 일호신개가 눈살을 찌푸렸다.

“장문대리께서는 물러나시오. 지금 물러나신다면 저 간악한 자를 개방의 행사에 대동한 죄는 묻지 않을 것이오.”

백천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죄라 하셨습니까?”

순간 일호신개가 아차 하며 미간을 구겼다. 흥분하는 바람에 말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지금 장로님께서 하신 말씀을 개방의 입장이라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장문대리.”

“개방의 장로가 화산의 장문대리에게 죄를 물을 수도 있다고 하신 말씀 말입니다.”

딱히 압도적인 기세 같은 걸 보인 건 아니다. 기운을 내뿜어 위압한 것도 아니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 것도 아니다. 백천은 그저 곧고 바르게 서서 일호신개를 똑바로 응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 대전에 있던 장로들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중압감에 눌려야 했다. 고작해야 그들의 반도 살지 않은 어린 검수를 앞에 두고 말이다.

“맞습니까?”

일호신개가 말없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섣불리 대답하기 힘들었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굽히고 들어가는 모양새가 될 것이고, 그렇다고 한다면 화산을 적으로 돌리는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고민에 잠긴 일호신개 대신, 그를 따르는 장로들이 입을 뗐다.

“장문대리! 이건 경우가 아니지 않소이까! 방주를 사칭하는 이를 대동한 거로도 모자라, 되레 개방의 장로를 압박하시다니요!”

“아무리 화산이라 해도 이건 용인될 만한 일이 아닙니다.”

백천이 그들을 향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장로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백천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제가 대동한 이가 정말로 방주를 참칭한 이라면, 제가 응당 사과드려야지요. 아니, 저뿐만이 아니라 화산과 천우맹에서도 정식으로 개방에 사죄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당연히…….”

“하지만.”

백천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제가 대동한 이가 개방의 방주가 맞는다면, 그때는 누가 사죄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그게 무슨……?”

“저는 화산의 장문대리로서, 화산을 대표하여 이곳에 계신 분이 개방의 방주인 풍영신개임을 보증합니다.”

충격받은 장로들이 순간 눈을 크게 부릅떴다. 거의 눈가가 찢어질 듯했다.

“그게 무, 무슨 말씀이란 말이오!”

“이분이 개방의 방주임을 부정하는 이는, 그 사실을 분명히 화산 앞에 증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장로들의 얼굴은 이제 하얗다 못해 퍼렇게 질렸다. 심지어 일호신개마저도 이 상황에 충격을 받은 듯 백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 당황한 건 그들만은 아니었다.

“……사형.”

“왜……?”

“원래 이러기로 했던 겁니까?”

“……적어도 나는 못 들었다. 그리고…….”

윤종이 슬쩍 다른 오검의 표정을 살피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다른 양반들도 못 들은 것 같은데.”

“……그런데 저 양반 왜 저럽니까?”

“난들 알겠냐.”

윤종의 눈이 당당히 선 백천의 등으로 향했다.

“그저…… 따질 것도 없지. 맞는 걸 두고 맞는다고 하는 데 이유 같은 게 필요하겠느냐?”

“……일이 잘못되면 우리도 살아선 못 나갈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그런데 뭐, 그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

“그건 맞죠.”

속닥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풍영신개가 멍하니 오검을 둘러보았다.

윤종과 조걸뿐만이 아니었다. 청명의 일행은 지금 백천의 돌발행동에도 그저 황당해하기만 할 뿐, 딱히 불만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았다.

백천이 이 호굴이나 다름없는 개방의 총단 한중간에서 호랑이의 의도에 완전히 맞서기로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말이다.

‘이들은 대체…….’

모두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마침내 일호신개의 입이 다시 열렸다.

“……장문대리께서는 지금 그 말에 책임을 지실 수 있겠소?”

일호신개와 백천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저자가 개방의 방주라면, 다름 아닌 나와 방의 장로들이 거짓을 고했다는 의미가 될 터. 장문대리께서도 그 말을 책임질 수 있냐는 말이오.”

“아니지요, 장로님.”

백천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명확히 하고 넘어가야 할 듯합니다. 만일 이분이 정말로 개방의 방주일 경우, 거짓을 고한 건 다름 아닌 장로님입니다. 장로님과 다른 장로님들이 아니라.”

일호신개의 동공이 희미하게 떨렸다.

백천은 그런 일호신개가 아닌 다른 장로들을 돌아보며 일갈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저는 제가 아는 것, 그리고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명백히 전할 것입니다.”

“수작질을!”

일호신개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화산은 개방을 천우맹으로 끌어들이려는 문파가 아니오! 그런 상황에 그대들이 계략을 꾸미는 게 아님을 누가 증명할 수 있겠소!”

“아미타불. 그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 순간, 백천의 뒤에서 조용히 걸어 나온 혜연이 반장을 했다.

“화산이 아니면 증명할 수 있는 것이외까?”

“……소림의 혜연. 그대는…….”

일호신개가 입술을 깨문다.

“그대는 이미 소림에서 파문당한 몸이잖소! 그리고 화산오검과 그 뜻을 같이함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거늘, 그대를 어찌 믿겠소!”

듣던 오검이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스님은 거의 뭐 화산파 사람 취급이네.”

“근데 뭐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머리 길러도 될 듯.”

“그건 좀 어색하지 않겠어요, 사고?”

사실 일호신개의 지적은 날카롭고도 타당했다.

타문 사람들이 보기에 이미 혜연은 반쯤 화산의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오는 화산에 대한 변호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 뭐.”

“응. 별수 없지.”

“미안하긴 하지만.”

오검과 혜연, 그리고 풍영신개의 시선이 천천히 한곳으로 향했다.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이가 순간적으로 당황했는지 움찔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뭔가를 결심한 것처럼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혜연의 옆에 선 그는 제 가슴을 퉁 두드렸다.

“저 역시 화산과 함께 이분이 개방의 방주인 풍영신개이심을 보증하겠습니다.”

“그대는…….”

“종남의 이송백.”

이송백이 일호신개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감히 종남을 대표할 입장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검수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강호인으로서 이분이 개방의 방주임을 보증하겠습니다.”

일호신개의 얼굴에서 순간 핏기가 가셨다.

다른 곳도 아니고 종남이다.

아무리 저 젊은 검수가 종남을 대표할 입장은 아니라지만, 무려 화산의 일에 종남 출신이 그 뜻을 같이했다는 건 예사로 여길 일이 아니다.

화산과 종남이 뜻을 함께한 일이라면 천하의 누구도 그 일이 옳음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 두 문파가 사소한 이견만 있어도 백 년은 족히 치고받을 견원지간임을 천하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호신개가 마른침을 삼키며 짐짓 차가운 목소리로 잘랐다.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저들을 보증한단 말이오? 애초에 화산에선 종남의 뜻조차 묻지 않았을 것을.”

그 말에 이송백이 살짝 고개를 갸웃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뭐……?”

“저는 그리 현명한 이는 아니지만, 옳고 그름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이도 아닙니다. 제 눈으로 보고, 제 귀로 들어 확인한 일을 보증하는 데 있어 문파의 입장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일호신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정론이다. 더하거나 뺄 것도 없는 정론. 하지만 세상에 어찌 저리 꽉 막힌 인간이 있는가? 정론도 들이밀 데에 들이밀어야지.

“어찌하시겠습니까?”

백천이 날카로운 눈으로 일호신개를 노려보았다.

“화산과 소림, 그리고 종남이 이분이 방주임을 보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실 셈이십니까?”

“…….”

“아니면 지금이라도 이분이 방주임을 인정하시고 어긋난 일을 되돌리시겠습니까?”

일호신개는 백천, 혜연, 이송백, 나아가 풍영신개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훤히 보였다.

그렇게 움직이던 시선은 청명에게 닿은 채 우뚝 멈췄다. 청명을 한동안 말없이 노려보던 일호신개가 무언가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옳은 정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어느새 말투가 일변해 있었다.

최대한 상황을 억제하려던 일호신개는 이미 온데간데없다. 이 자리에 있는 건 ‘군구일호’라는 별호가 왜 생겼는지를 증명하듯 가공할 기세를 뿜어내는 개방의 장로다.

“하나는 처음부터 옳았던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결국 옳게 된 것.”

“장로!”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별수 없지. 방주가 죽었다는 정보를…… 결국은 옳게 만드는 수밖에.”

우드드득!

일호신개의 고함이 범의 포효처럼 터져 나왔다.

“놈들을 빠져나가게 두지 마라! 그리고 방주를 사칭하는 자의 목을 베어 내게 가져와라!”

대전 안이 삽시간에 살기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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