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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04화 (1,505/1,567)

1504화. 내가 누구죠? (4)

대전 안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초청받아 온 입장에서 타문의 행사에 딴죽을 걸고 나서는 건 옳지 못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례함을 꾸짖고 월권을 지적할 수 없는 건, 화산의 장문대리가 걸고넘어지는 부분이 도의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장문대리…….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만, 일단 그건 진행 중인 일이 끝난 후 말씀하시는 것이 옳을 줄로 보입니다.”

“하나 여쭙겠습니다.”

“예?”

“장로님들께서는, 그리고 이곳에 계신 다른 분들께서는 이미 선대 방주에게 예를 올리셨습니까?”

그 말에 장로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 있던 누구도 그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장로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백천이 선수를 쳤다.

백천의 말이 깔끔하게 끝났다. 화산의 제자들은 저들끼리 몰래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들리지 않게 입 모양으로 속닥거렸다.

‘이야……. 진짜 청산유수네.’

‘원래 사숙이 판 깔아 주면 미쳐 날뛰잖아요. 판이 깔릴 때만 정신이 돌아와서 문제지.’

‘역시. 동룡이랑 백천은 구분해야.’

개방의 장로들 중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그만큼 백천의 말이 먹혀들었다는 의미다.

이곳의 유일한 외인으로서 강호를 대표하여 선대에게 예를 표하겠다는데 그걸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이건 백천이 나서서 주장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개방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든 끌고 가 선대에게 예를 표하도록 해야 정상인 일이다.

화산의 장문대리쯤 되는 이가 승하한 선대에게 예를 표하는 건 개방의 위상을 더없이 높여 줄 터. 그렇기에 한 장문의 퇴임이 있을 때마다 기를 쓰고 외부의 명사들을 초청하는 것 아니던가?

이리저리 방황하던 장로들의 시선이 결국은 일제히 일호신개에게로 향했다. 지금 이곳에서 백천의 요청에 화답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일호신개뿐이니까.

일호신개는 그들의 시선 한가운데서 쓴웃음을 흘렸다. 장로들의 눈빛에 의문이 어려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이래서 외인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외인이 참석하면 그가 제어하지 못하는 변수가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나 화산 같은 골칫덩어리들이 상대라면 더 골치 아파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주도권을 내준 건 아니라는 점이다. 호흡을 가다듬은 일호신개가 백천을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장문대리의 깊은 배려에 개방을 대표하여 감사드리오.”

“별말씀을.”

백천이 깔끔하게 겸양을 떨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청명의 얼굴에 토 쏠린다는 표정이 채 다 스치기도 전에 윤종이 얼른 청명의 머리를 꽉 잡아 아래로 내리눌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꼴을 보지 못한 일호신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장문대리의 요청을 들어드리기가 어렵소이다. 지금 이곳에는 선대 방주의 육신이 없기 때문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백천이 의아하다는 듯 되묻자 일호신개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안타깝게도 선대 방주께서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승하하셨소이다. 그래서 아직 그 시신을 총단으로 모시지 못했소이다.”

“……다른 곳에서?”

“그렇소.”

“그럼 방주의 사인이 무엇입니까?”

“장문대리께서도 방주께서 지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셨을 것이오.”

백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에 워낙 널리 퍼져 있던 이야기라 굳이 사실을 따질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방주께서는 사패련의 발호와 마교의 준동을 좌시할 수 없다고 여기시어, 병든 몸을 이끌고 그들을 친히 살피러 가셨소이다. 그러다 결국 일이 잘못되어…….”

“암습이라도 당하셨다는 말입니까?”

“그건 정확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면밀히 조사해 봐야 알 일. 내가 아는 것은 그저 방주께서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과 방주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다는 현실뿐이외다.”

백천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실룩였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하다. 사정을 모르는 이라면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위험을 무릅쓰며 적을 정탐하러 갔던 선대 방주의 의기에 감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백천에게는 온 얼굴에 어색한 안타까움을 덮어쓴 일호신개의 거짓이 훤히 보였다.

“그 소식을 장로님께서 전해 들으신 겁니까?”

“그렇소이다.”

“오직 장로님만이 말입니까?”

백천의 물음에 일호신개가 잠깐 멈칫했다.

“……그게 무슨 의미요?”

“방주의 사망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확인한 이가 오직 장로님 하나뿐이라는 겁니까?”

일호신개가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을 굳혔다.

‘이놈들이……. 혹 뭔가를 알고 온 것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방주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개방 사람이 아닌 이가 방주의 행적 따위를 알 방도가 있을 리 없다.

“나는 개방의 장로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요. 그러니 내가 듣는 게 이상할 건 없지 않소.”

“그럼 그 소식을 전해 온 이는 누구입니까?”

“방주를 수행하던 이요. 믿을 만한 사람이지. 그가 사실을 확인하고 내게 전달해 왔소.”

일호신개가 느릿하게 말하며 곁눈질로 장로들의 반응을 살폈다.

‘이런…….’

확고하게 포섭했던 이들에게서는 딱히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동조하지 않던 이들 사이에서는 분명 묘한 동요가 일고 있었다.

그들도 이 모든 상황의 근거가 그저 일호신개의 말뿐이었음을 알고 의심의 싹을 틔운 것이다.

특히나 대놓고 반발했던 추면개는 두 눈을 빛내며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더는 안 된다.’

말이 길어진다면 방주가 된다고 해도 뒷말이 나올 수 있다. 그건 일호신개의 장악력에 큰 장해물이 될 게 분명하다.

“궁금한 점이 많으실 건 충분히 이해하나, 지금은 그 모든 걸 일일이 밝힐 때가 아니오. 잊지 마시오. 이 일에는 사패련과 마교가 얽혀 있소.”

“…….”

“정보란 때로는 더없이 은밀히 다뤄야 하는 것임을 장문대리께서도 이해하시리라 믿소.”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이곳이 개방이면 더욱 그렇겠지요.”

“내 말이 바로 그것이오.”

“하지만, 장로님.”

그 순간 백천이 어깨를 쫙 펴고 일호신개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중요한 정보가 잘못되어 있다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뭐요?”

“선대 방주께서 승하하셨다는 정보가 잘못되었다면, 이 모든 일은 누가 책임지는 것입니까?”

“저, 저런! 무도하다!”

경악한 장로들이 여기저기서 외쳤다.

장로들도 눈치가 없지 않다. 이쯤 되면 백천이 질문을 던지는 게 단순히 의문을 풀기 위함이 아니란 것쯤은 당연히 안다.

“장문대리! 객 된 입장에서 어찌 이토록 함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무리 화산을 대표한다 해도 이건 경우에 어긋납니다!”

“지금 개방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하지만 직접적으로 비난하거나 행동에 나서지는 못하고 변죽만 울리는 수준이었다.

이유야 간단하다. 화산의 장문대리 백천이라는 이름. 그리고 그 뒤를 받치고 있는 화산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화산은 과거의 몰락한 문파가 아니다. 천하에서 가장 주목받는 문파이자, 천하에 몇 번이고 그 힘을 증명한 대문파다.

섬서의 패자이자, 천우맹의 수좌이기도 한 화산을 대표하는 이를 힘으로 찍어 누를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백천이 서늘한 눈으로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그저 모든 걸 명확하게 알고 확실하게 하고 싶을 뿐입니다. 자칫하면 저희가 이곳에 있는 것 역시 망신이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저, 저…….”

“그만!”

일호신개가 손을 들어 장로들의 입을 막았다. 그러더니 그린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내걸었다.

“정보에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내가 책임질 것이오.”

“장로님께서 말입니까?”

“당연하오. 모두 내가 시작한 일이니, 당연히 내가 책임을 져야겠지. 이제 되었소?”

백천이 일호신개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이면 되었습니다.”

“장문대리의 배려에 감사하오. 그럼 이제 개방이 새로운 방주를 맞이하는 것은 축하해 주길 바라겠소.”

잠시 말을 멈춘 일호신개가 모든 장로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장로들께서도 너무 화내지 마시오. 이 모든 건 그저 시급한 상황에 일을 빠르게 처리하려다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못한 본개의 잘못이니 말이오.”

“으음…….”

“그리 말씀하신다면.”

일호신개의 얼굴엔 여유가 그득했다. 그는 백천과 그 뒤에 선 일행들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뭔가 눈치를 채고 온 모양인데, 그래 봐야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화산 입장에서야 어떻게든 그가 방주가 되는 걸 막고 싶을 것이다. 그가 방주가 되는 순간, 개방은 완벽한 구파일방의 일원으로 되돌아갈 테니까. 화산과 천우맹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달갑지 않을 터.

그러나 이제 와 아무리 떼를 써도 정해진 결과는 되돌릴 수 없다.

‘이 모든 일을 벌인 건 다름 아닌 네놈이겠지?’

일호신개의 시선은 백천이 아닌 그 뒤에 선 청명에게로 넘어갔다.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나, 현재 강호를 살아가는 이라면 화산검협 청명을 못 알아볼 순 없다. 무표정한 청명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일호신개는 옅은 미소를 흘렸다.

‘떼쓰는 건 통하지 않는다.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모든 걸 마무리하기 위해 일호신개가 입을 여는데, 순간 그를 마주 보던 청명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졌다.

일호신개의 가슴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걸렸네.”

“……뭐?”

청명이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이 비수처럼 일호신개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히죽 웃은 청명이 누군가에게 턱짓하며 물었다.

“이쯤이면 됐죠?”

“감사합니다, 검협.”

이윽고, 청명의 뒤쪽에 있던 사내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너무도 흔하게 생겨서 화산 일행의 존재감에 가려져 있던 이였다.

‘누구지?’

일호신개는 굳은 얼굴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본 적 없는 이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저 낯선 자에 대한 정보가 없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왜 갑자기 저런 자가 나선다는 말인가? 대체 뭘 하려고?

앞으로 나선 이는 주변을 쭉 돌아보더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평범한 나무 몽둥이. 곤(棍)과 봉(棒)의 경계에 있는, 개방의 방도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형태의 몽둥이를.

모두의 주목 속에 그가 입을 뗐다.

“뭘 하는 것이냐?”

그러자 장로들의 얼굴에는 동시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엇?”

“으음?”

저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우우웅.

그 순간 사내가 든 몽둥이에 옥빛 기운이 휘돌았다. 몽둥이는 이내 취색으로 물들었다. 모든 개방도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저 무공은…….

“너희가 진정 개방의 방도라면, 정당한 개방의 방주 앞에 예를 표해라.”

전신을 옥빛 기운으로 휘감은 이의 입에서 추상과도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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