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8화. 널 찾아온 게 아닌데? (3)
당황한 오검이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뭐라 그런거야?’
‘죽인다는데?’
‘누굴? 개방 방주를?’
‘저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냐?’
놀라서 입만 벙긋거리던 이들이 일제히 청명의 등을 획 보았다.
‘이 새끼 진심이다.’
윤종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결코 단순한 위협이 아니다. 지금 개방 방주의 입에서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청명은 정말 손을 쓸 작정이다. 수없이 저 등을 바라봐 온 그간의 경험이 말해 주고 있었다.
“사숙!”
당황한 윤종은 결국 백천을 찾고 말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놈을 어떻게 말려라도 볼 수 있는 사람은 백천뿐이니까.
‘말려야 한다!’
상대는 개방의 방주다. 아직 정식으로 확인된 건 아니나, 어쨌건 저자는 그리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이를 벤다? 청명의 검으로?수습이 될 만한 사고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사패련의 북상 이상으로 강호를 뒤엎어 버리는 사건이 될지 모른다.
“사숙. 일단 청명이를…….”
“기다려라.”
윤종의 두 눈이 짧게 흔들렸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 기다려라.”
윤종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단호한 백천에게는 그도 쉽사리 강하게 이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대체 어쩌려고…….’
체념 섞인 불안한 시선이 다시 앞쪽으로 향했다. 청명의 등은 여전히 무심했고, 천상루주의 눈은 컴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래 침묵하던 천상루주가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은…….”
얼핏 담담하게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오검은 그 안에 미세한 동요가 섞여 있음을 눈치챘다.
“내가 개방을 일부러 무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거로군?”
“…….”
“개방의 방주인 내가 말일세.”
이송백은 조금 얼떨떨한 시선으로 청명을 보았다.
사실 종남의 제자가 이런 생각을 품은 건 이상할지 모르나, 이송백은 청명을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신뢰했다. 청명이 행하는 모든 일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런 이송백이 듣기에도 이건 너무도 이상한 추궁이었다.
만일 저 사람이 정말 개방의 방주라면, 그는 누구보다 개방이 유능해지길 바랄 것이다. 대체 어느 문파의 장문인이 제 문파를 일부러 무능하게 만든단 말인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단 생각에, 이송백이 어렵게 입을 뗐다.
“저기…… 도장. 이건 아무래도…….”
“정확하네.”
하지만 그 순간, 담담한 천상루주의 목소리가 이송백의 입을 틀어막았다.
‘뭐?’
잘못 들은 건가? 이송백은 물론이고, 모두가 당황하여 천상루주를 주목했다.
“확실히 그대는 섣불리 재단할 수가 없군. 듣던 대로야.”
청명의 시선과 천상루주의 시선이 허공에서 서로 얽혔다.
“개방의 쇠락을 알아챈 이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들은 그저 나의 무능을 비웃을 뿐이었지. 내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한 건 자네가 처음이네. 놀라워.”
윤종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게 뭔 소리지?’
개방의 방주가 왜 개방을 무능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뻔한 말은 됐어. 쓸데없는 공치사도 됐고.”
청명이 서늘하게 딱 잘랐다.
“내가 듣고 싶은 건 이유야. 그런 일을 벌인 이유.”
“이유라…….”
천상루주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집무를 보는 의자에 앉아 등을 느슨하게 뒤로 기댔다.
“그건 오히려 내가 거꾸로 물어봐야 할 일이라네, 화산검협.”
“……뭐?”
“개방이 유능해야 할 이유가 뭔가?”
청명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대답해 보게. 왜 개방은 유능해야 하는가? 그리고 방주인 나는 어째서 개방이 항상 유능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가? 뭘 위해서?”
“무슨 개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자네들이 필요할 때 적절하게 이용하기 좋아야 하니까?”
청명이 대답하지 않자 천상루주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 개방은 정보력 하나만으로 구파일방에 오른 문파지만…… 하오문과는 달리 딱히 은밀한 움직임을 위한 무공 따위는 익히지 않네. 그저 발 빠르게 이곳저곳 뛰어가 그 귀로 듣는 게 전부인 문파지.”
청명이 대답 없이 천상루주를 쏘아보았다.
“수많은 거지의 존재 의의는 오직 그 귀에 있네. 그게 아니면 그 많은 수로 상대를 적당히 막아 세우는 데 있지.”
“뭔…….”
“사실은 알고 있잖은가, 화산검협.”
천상루주가 조용히 말했다. 어쩐지 조금 허탈하고 허무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자네가 말하는 유능함이란, 목숨을 돌보지 않는 의기에서 나오네. 설령 내 목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적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적의 말을 내 귀로 듣겠다는 의기. 그 의기가 없다면 개방이야 쓸모없는 거지 집단에 지나지 않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이번에도 청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천상루주의 얼굴이 돌연 일그러졌다. 그가 씹어뱉듯 말했다.
“자네가 말하는 개방의 유능함은 오로지 거지들의 핏값이란 걸세.”
윤종의 몸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천상루주는 그들의 반응 따위는 관심도 없는 듯 말을 이었다.
“유능한 개방이 되기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사실 간단하지. 방도들이 죽든 말든 강남으로 밀어 넣고, 사패련의 주위에 배치하고, 거지들이 흘린 피를 훑어 가며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면 되네. 그게 과거부터 개방이 취해 온 방식이었지.”
천상루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뭐가 남는가?”
“…….”
“의혈개방. 개방은 의기를 위해서는 피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망할 네 글자 말고 대체 뭐가 남았단 말인가?”
천상루주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었다. 미처 억누르지 못한 노기가 새어 나오듯.
“참으로 쉽게들 지껄여 대지. 이건 개방이 해야 할 일이라고, 아무렇지 않게들 말해 댄다네. 희생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고.”
“…….”
“그 희생이 제 문파원의 목숨이어도 그따위로 말할 수 있을까?”
천상루주가 쿡쿡 웃었다.
“아니. 그러지는 못하겠지. 제 목숨은 다들 아까울 테니까. 하지만 거지 한둘의 목숨 따위야 별것 아닌 게 이 강호라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윤종이 참지 못하고 말하자 천상루주가 서늘한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정말 그런가?”
“당연합니다.”
“그럼 자네는 우리가 장일소의 종적을 놓쳤을 때도 우릴 원망하지 않았는가?”
윤종은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천상루주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 그래. 거지들의 목숨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하지만 막상 위기가 닥쳐 오면 결국에는 다들 한목소리로 외쳐 댄다네. 정보가 중요하다고, 적의 종적을 알아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이들이 죽는다고.”
“…….”
“그러니 저 적이 득실대는 강남으로 가서 적에게 따라붙으라고 말일세.”
윤종은 순간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서 그 자신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만일 윤종이 거지들의 희생으로 정보를 얻어 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 어떨까? 아마 세상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당연하게 요구할 것이다. 개방이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해 주기를 말이다.
그때 청명의 나직한 목소리가 둘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래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와병 중이라는 건 참 좋은 핑계였군. 병상에 누워 있으면 타문의 장문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니, 부탁도 압박도 들을 필요가 없었겠군.”
“부정하진 않겠네.”
“과거라면 적진에 뛰어드는 걸 마다하지 않았을 개방도들을 만류한 것도 당신일 테고.”
“그렇네.”
“적이 이동하는 곳에서 개방도들을 물린 것 역시 당신이고, 개방이 분열하여 서로에게 이를 드러내도 좌시한 것도 마찬가지로 당신이고.”
천상루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의 이유가 고작…… 남 좋은 일을 시켜 주기 싫어서였다고?”
“틀렸네, 화산검협.”
천상루주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그저 개방도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었을 뿐이네.”
“…….”
“우리는 그저 거지일 뿐이야.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을 살아가는 이들이 더 핍박받지 않기 위해 모인 곳이 개방일세. 하지만 세상은 그런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것마저 내어놓으라고 하지. 바로 목숨 말일세.”
청명의 입술이 실룩였다.
“자네가 원하는 정보를 만들어 내는 이는 개방 내에서 대단한 신분을 가진 고수들이 아니네. 저 마을 어딘가에서 구걸하고 살아가는, 내일 하루 입에 풀칠할 걱정을 하는 이들이지. 그런 이들의 목숨마저 내어놓으라 하는 게 과연 온당한가?”
이를 갈아붙인 천상루주가 말했다.
“정말 필요한 것이라면 가질 만큼 가진 그대들이 하면 될 일일세. 왜 그걸 우리에게 바라는 건가?”
“그 대가로 개방이 가져간 것도 있지. 이제 와 입을 닦겠다고?”
“그래서 그걸 내어놓겠다고 하지 않는가!”
천상루주가 순간 벼락같이 고함을 쳤다.
갑작스럽게 주변의 공기가 긴장되며 청명과 천상루주의 눈빛이 격하게 맞부딪쳤다.
잠시 어깨를 들썩이던 천상루주는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군. 화를 낼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는 희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주물렀다. 그 떨림에는 그가 느껴 온 중압감과 심적 고통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어쩌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이런 말을 털어놓고 싶었던 것뿐일지 모르겠군. 그래서 자네들이 이곳까지 올라오는 걸 막지 않았을지도 몰라.”
천상루주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게.”
“방주.”
“자네는 나를 찾아내어 개방을 정상으로 되돌릴 생각이었겠지.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서 개방이 제 역할을 해 줘야 한다고 여겼을 테니.”
“…….”
“그리고 당연히 그럴 자신이 있었겠지. 자네는 지금까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이뤄 왔으니까. 자네의 능력은 나도 인정하네.”
천상루주가 차가운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나는 결코 자네의 말과 논리에 놀아나지 않을 걸세. 거지들의 목숨을 바쳐 자네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줄 생각 따위는 없단 말일세. 자네가 정말 원하는 게 그거라면 그냥 이 자리에서 내 목을 자르게. 그럼 그 뜻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지금 총단에는 개방을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어 하는 이가 넘쳐날 테니.”
고개를 똑바로 든 천상루주가 천천히 물었다.
“대답이 되었는가?”
“…….”
청명은 가만히 주먹을 폈다 다시 쥐었다. 무언가를 뱉어 낼 듯 열렸던 입은 다시 꾹 닫히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비난을 감수해야 하더라도 거지들의 목숨을 하나라도 더 살려내겠다고 하는데, 이를 어떻게 반박해야 하는가.
체념에 가까운 감정으로 청명이 지그시 눈을 감은 그때였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가는 대화를 진중하게 듣고 있던 이송백의 입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맑고 선명한 두 눈이 회한에 잠긴 천상루주를 똑바로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