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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89화 (1,490/1,567)

1489화. 널 찾아온 게 아닌데? (4)



천상루주가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를 명쾌히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이송백의 눈빛이 묘하게 거슬렸기 때문이다.



“종남의 이송백.”



고저 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종남의 이대제자. 진금룡과 함께 차기 종남을 이끌어 갈 이로 거론됨. 현시점에 가장 큰 기대를 받는 후기지수. 성격은 진중하고 예의 바르며 절도 있음. 현재 무위는 확인 불가. 훗날 종남의 장문인이 될 가능성 존재.”



이송백이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지만, 천상루주는 무심하게 말했다.



“내 정보가 잘못된 모양이야. 내가 아는 종남의 이송백이라면 이런 대화에 허락 없이 끼어드는 게 예의에 어긋남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아니면, 종남 역시 화산의 파격을 따르기로 결정한 건가?”



실로 노골적인 면박이었다. 이송백은 정중히 포권 했다.


“그 점은 정식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사과는 받지. 다만 이 일은 자네가 끼어들 만한 일이 아니네. 그러니 물러나게.”



“물러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말씀은 올리고 싶습니다.”



“……뭔가?”



마뜩잖은 게 분명한 천상루주의 대답에, 이송백이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조금 전 하신 말씀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방주께서 개방도들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치사는 접어두고 결론만 말하게.”



“……예.”



이송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결심이 선 눈으로 말했다.



“방주께서 생각하시는 옳음이 개방도들이 생각하는 옳음과 다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천상루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 뻔한 소리나 늘어놓을 심산이라면 그냥 지금 그만두지.”



“그게…….”



이송백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천상루주를 설득하기엔 말주변이 부족하여 갑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고 다른 길을 택했다.



챙!



이송백이 별안간 검을 뽑아 들자, 화산의 제자들은 화들짝 놀라 그런 그의 어깨를 콱 잡았다.



“이 소협! 지금 뭐 하시는……!”



“잠시만요.”



이송백이 어깨 위에 얹힌 백천의 손을 조심스레 밀어 내고는 제 검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이게 저의 검입니다.”



“…….”



“개방의 방주시라니 알고 계시겠지요. 저는 천하삼십육검을 익힙니다. 종남의 가장 기본이 되는……. 아니, 과거에는 기본이었지만 이제는 주류에서 벗어난 검을요.”


“그게 이것과 무슨 상관인가?”



“들어 보십시오.”



이송백이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종남의 선대께서는 이 검을 부족하다고 여기셨고, 이 검으로는 천하제일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검으로 종남을 진일보 시키려 하셨지요. 그건 분명 종남에 대한 믿음과 문도들을 향한 애정으로 내린 결단이었을 겁니다.”



천상루주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과거의 검을 익히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자네와 그 검이 잘 맞는 모양이지.”



“아닙니다.”



이송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이 검을 익히는 게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잠시 천상루주를 떠난 이송백의 시선이 청명에게 닿았다.



“물론 그게 옳다고 깨닫게 해 준 건 종남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제가 이 검을 익히는 게 옳다고 판단했고, 그리 행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천상루주에게로 쏟아지는 눈빛은 실로 정진정명했다. 거슬리게만 느껴지던 바로 그 눈빛이다. 천상루주는 슬쩍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네가 제 얼굴에 금칠하는 걸 듣고 있을 만큼 나는 한가하지 않네.”



“전 단지 묻고자 함입니다. 방주께선 개방도들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행했다고 하셨습니다. 종남의 선대 역시 종남을 위해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 눈에는 달라 보입니다.”



“다르다?”



“모르시겠습니까? 저희 장문께서도 문도들이 새로운 검을 익히는 게 더 나은 길이라 확고히 믿으셨을 것입니다. 그게 문도들을 위하는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셨을 테고요.”



천상루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이송백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다는 듯.



“하지만 지금 저는 천하삼십육검을 익히고 있습니다. 미력하고 아둔했던 과거의 제가 그런 판단을 내렸음에도, 장문인께서는 제게 ‘옳은’ 길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이송백이 제 검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장문인께서도 저를 걱정하셨을 겁니다. 그럼에도 저를 만류하지 않으셨던 건, 그게 제가 스스로 고심하고 내린 결정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제가 무인으로서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를 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니까요. 한데!”



이송백의 목소리가 묵직한 검기처럼 천상루주에게로 뻗어 나갔다.



“개방의 방도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



“방주께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줄이고, 그저 평범한 거지로 살아가게 만들려 한다는 것을…… 그들 역시 알고 있습니까?”



천상루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예, 방주님. 그건…….”



이송백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끝을 흐렸다. 감정이 격해져서가 아니다. 그저, 막막해진 것이다.



이 답답함은 가만 듣고 있던 청명이 대신 풀어 주었다.



“올바르지 않지.”



이송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하려는 말이었다는 듯.


“예. 바르지 않습니다. 공정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제 삶이 결정 나기를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예! 그겁니다.”



이송백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청명은 그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송백은 묘하게 마음이 들떴다.



그때 청명이 한숨처럼 말했다.



“말은 좋은데 말이야.”



“……예?”



“그게 남의 검술 훔쳐다가 베낀 놈들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청명이 한없이 떨떠름하고 고까운 눈으로 이송백을 흘겼다. 청명의 입술이 못마땅한 듯 움찔움찔할 때마다, 이송백의 몸도 함께 움찔움찔 쪼그라들었다.



이송백이 어떻게든 어색하게나마 입을 뗐지만.



“아니……. 그건 지금 장문인께서 하신 일이 아니니까…….”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겠네? 저 양반이 답답한 짓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도 지적할 놈이 지적해야지. 어디 도둑놈 새끼가 입을 털어? 네 말만 들으면 종남 장문인이 뭐 어디 천하의 성인군자인 줄 알겠다? 어?”



역효과였다. 청명의 말에 오검도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는 듯 이송백을 노려보았다.



“와. 나 혹할 뻔했어. 조금만 더 들었으면 종남 장문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뻔.”



“생각해 보면, 그 양반 우리 검술 베낀 걸로 화종지회에서 거만 떨던 인간이잖아?”



“……껍데기를 벗겨야 합니다.”



“언젠가는 불태울 거야. 종남.”



“……사고. 그런 말은 종남 사람 앞에서는 하면 안 돼요.”



“왜?”



“대비하잖아요. 그럼 어려워지죠. 생각 안 할 때 확! 질러야지.”



“아.”



이송백의 양손이 절로 공손히 모였다.



과거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실전되었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에야 설화십이식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의 설화십이식은 진금룡과 종남의 필사적인 개량으로 이십사수매화검법에서 많이 벗어나긴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들이 저지른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은가?



“화산 분들께는 뭐라 드릴 말씀이…….”



“이 소협.”



“예?”



“눈 까십쇼.”



“……예.”



윤종의 말에 이송백이 다시 고개를 조용히 숙였다.



“쯧.”



혀를 찬 청명이 이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천상루주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아직 입을 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말을 한 놈이 문제라 그렇지, 말 자체가 틀린 건 아니지.”



“…….”



“당신이라면 알고 있겠지. 판단을 내릴 때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건 개방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지. 당신은 지금 개방도들의 손발을 자르고, 당신이 원하는 삶으로 강제로 끌고 가고 있을 뿐이야.”



천상루주의 눈빛에 한기가 어렸다. 지독하게 모욕적인 말을 들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시간이 흐르고도 결국 반박의 말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말하지 못한 거겠지. 개방도들이 이런 일에 동의할 리 없으니까. 그랬다면 애초에 의혈개방이라는 말은 생겨나지도 못했을 테니까. 세상을 위해, 협의를 위해 목숨 따위는 초개처럼 버릴 수 있다. 그게 의혈개방이니까.”



천상루주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증오와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젖히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복잡한 감정으로 휘몰아치던 눈이 서서히 감겼다.



“그렇겠지.”



눈을 감은 천상루주에게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도 내가 하려는 것에 동의하지 않겠지. 권력을 가진 이는 개방이 유능해지길 원할 것이고, 권력이 없는 이들은 제 목숨을 돌보지 않고 협을 행함이 옳다고 하겠지.”



“당신은 외부를 속인 게 아니었군.”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속인 것은 다름 아닌 개방이었어. 그렇지?”



“…….”



“개방은 정말 당신이 와병 중인 걸로 알 수도 있겠군. 아니, 어쩌면 대역이 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당신은 개방도들마저 속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숨겼고, 그러고도 개방에서 가까운 곳을 차마 떠나지 못해 이곳에 머물고 있는 거로군. 마치 유령처럼.”



천상루주의 몸이 잘게 떨렸다.



청명은 그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도 있다. 이를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고독한지는 그가 가장 잘 안다.



“당신이 틀렸다고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옳지도 않아. 정말 당신이 그걸 원했다면, 개방의 거지들을 설득해야 했어.”



천상루주는 들고 있던 고개를 내리고 느리게 눈을 떴다. 휘몰아치던 증오 같은 건 잠잠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청명에게 우호적인 눈빛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지적은 감사하지.”



“…….”



“하지만 지금 와 내 방식을 바꿀 생각은 없네. 나는 끝까지 개방도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릴 걸세. 그게 틀린 길이라 해도.”



그는 오히려 더 결연해져 있었다.



“대화는 여기까지네. 그만 돌아가게.”



“자, 잠깐만요.”



돌연 떨어진 축객령에 조걸이 놀라 끼어들었다.



“그냥 돌아가라고요? 아, 아니. 이렇게까지 말하고 그냥 돌아가는 게 어딨습니까? 여기에서 나간 우리가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린다면 어쩌실 겁니까?”



“알릴 텐가?”



“아니, 그게 아니죠. 협박하자는 게 아니라……. 뭘 어떻게 정리라도 좀…….”



당황하여 중언부언하는 조걸을 보며 천상루주가 덤덤하게 말했다.



“알릴 테면 알리게.”



“그렇죠. 그……. 예?”



“알리라고 했네.”



조걸이 눈을 끔뻑였다.



이 모든 걸 알려도 된다고? 와병 중이라던 개방의 방주가 고급 주루의 꼭대기에서 멀쩡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되면 개방 내부도 자네들의 말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뉠 테고, 이를 계기로 다시 서로 반목하고 싸우겠지. 결과적으로는 내가 축출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끈질기게 버텨 낼 걸세. 


그럼 개방이 이 더러운 전쟁에 끼어들 일도 줄겠지. 자네들 덕분에 일이 쉬워질지도 모르겠어.”



“아, 아니…….”



조걸은 무어라 입을 벙긋거리다 말았다. 듣고 보니 정말 일이 그렇게 흘러갈 수도 있을 듯했다.



“내 마음을 돌릴 생각 따윈 하지 말게. 그렇게 쉽게 바뀔 거였으면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걸세.”



천상루주가 청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특히나 화산검협. 나는 지금껏 자네가 상대했던 이들과는 다르네. 내가 자네와의 대화로 마음을 바꿀 일은 결코 없을 걸세. 그러니 헛수고 말고 돌아가게. 개방은 구파의 편도, 천우맹의 편도 들지 않을 테니.”



흡사 칼로 자르는 듯한 말에,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되는 건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니 더는 해 볼 수 있는 게 없을 듯했다. 여기서 더 강요하려 들면 괜한 반발심만 부를 뿐이다.



어쨌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무의미한 개봉행은 아니었다. 그리 생각하며 백천이 말했다.



“청명아. 일단은 돌아가…….”



그때였다.



“당연히 바뀔 리가 없겠지. 어차피 판단은 당신이 내리는 게 아니니까.”



“……응?”



“안 그래?”



묘한 미소를 머금은 청명이 천상루주를 지그시 보자 그는 탄식했다.



“이젠 억지 부리기인가? 하긴 더는 수가 없겠지. 남은 건 내가 개방의 방주가 아닐 가능성뿐일 테니까. 하지만, 화산검협. 자네가 아무리 억지를 부려 봐야 나는 개방의 방주가 맞네.”



“어, 맞겠지. 그런데 어떡하지? 난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닌데?”



“……아니라고?”



청명이 냉소적으로 피식 웃었다.



“좀 아리송했었는데, 이제 확실히 알겠어.”



조금 당황한 백천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뭔 말을 하는 거냐, 청명아?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



“간단한 논리야, 사숙. 개방의 방주라고 해서 꼭 개방의 머리는 아닐 수도 있거든.”



“그게 뭔…….”



“뭘 어려워해? 당장 화산이 그렇잖아.”



“아……!”



즉각 이해한 백천이 천상루주를 획 다시 보았다.



방주.



그 두 글자만으로도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눈앞의 이자가 개방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해 봐.”



청명이 서늘하게 웃으며 천상루주를 쏘아보았다.



“네 뒤에 누가 있지? 개방을 그리 만들어야 한다고 네게 말해 준 이가 누구야?”



순간 백천은 보았다.



천상루주의 안색이 처음으로 크게 변하는 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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