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438화 (1,439/1,567)

1438화. 그래, 기억해 두지. (3)

먼저 입을 연 것은 당연히 당군악이었다.

“종남이 친히 와 주신 덕분에 가솔들이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종남의 장문인 종리곡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봉문한 지 세월이 꽤 흘렀음에도 종리곡의 외양은 그리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아니, 오히려 봉문 하기 전보다 더 젊어진 것처럼 보였다.

“과한 말씀이십니다. 당연히 와야 할 일이었지요.”

“봉문 중이라 여의치 않으셨을 텐데.”

“안 그래도 슬슬 봉문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사파의 무리가 당가를 공격한다고 하니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말에 당군악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가주님. 저희 역시 봉문을 풀고 처음 한 일이 당가를 돕는 일이라 기껍기 이를 데 없습니다. 협의를 아는 문파라면 당연히 해야 할⋯⋯.”

“하!”

누군가의 코웃음이 말허리를 끊어 버렸다. 종리곡이 살짝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음⋯⋯.”

화산검협 청명이었다.

엉망진창이 된 그를 본 종리곡이 침음성을 흘렸다. 청명의 상태가 끔찍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소도장께서 불편하신 모양이군.”

“아니요. 뭐, 종남 입에서 협의가 어쩌고 하는 말이 나오니 그냥 코가 간질간질해서요.”

“청명아!”

오검이 그런 청명을 급히 만류했다. 하지만 청명은 뭐 틀린 말을 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종리곡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도장은 변한 게 없군.”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장문인께서는 영 예전 같지 않으신데?”

“아악!”

“그 입 좀 다물어라!”

오검이 기겁하며 청명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종리곡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가 꾹 닫고는 앓는 소리를 흘렸다. 반사적으로 호통을 치려 했는데, 이제 저 어린 검수가 감히 혼을 낼 수 없는 위치까지 올랐단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종남이 봉문을 한 사이에 화산과 화산검협 청명의 입지는 천지개벽 수준으로 달라졌다. 저자는 더 이상 화산의 어린 제자가 아니다.

이내 종리곡의 시선은 조금 옆으로 향했다.

“장문인께서는 더 젊어지셨습니다?”

“저도 막 그 말을 드리려던 차였습니다. 좋아진 모습을 보니 보기가 좋습니다, 장문인.”

현종의 답에 종리곡이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여전히 그를 대하는 현종의 태도에서 껄끄러움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다. 종리곡과 현종은 벌써 수십 년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그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현종의 태도에 껄끄러움은 있을지언정 주눅이 든 기운은 없다는 걸 말이다.

‘이게 진정 내가 알던 화산의 장문인 현종인가?’

수십 년이 넘도록 이자를 봐 왔다.

그렇기에 종리곡은 강호의 누구보다 현종이라는 이를 잘 안다고 여겨 왔다. 그가 평가하는 현종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부족하여 무너져 가는 화산을 그저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하는 무능한 장문이었다.

게다가 천성적으로 소심한 면마저 있어, 사람 좋은 체를 하느라 정작 중요한 때에 제대로 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한심한 작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선 현종에게서는 그가 알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항상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허허 웃어 대던 실없는 이는 온데간데없고, 묘한 위압감을 뿜는 도인이 서 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종리곡이 화산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들이⋯⋯.’

그러다 순간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정도 봉문을 하고 문파를 가다듬었으니 섬서의 패권을 쥐는 건 일도 아니리라 여겼거늘.’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을 겪었기에 비무대회 이후로 지금까지 이토록 많은 게 바뀌었단 말인가.

종리곡이 입을 뗐다.

“⋯⋯장문인.”

그때 현종이 무언가 생각난 듯 멈칫하더니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장문인. 잠시 오해가 있었군요. 저는 지금 화산의 장문인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입니다.”

“⋯⋯예?”

순간 당황한 종리곡이 눈을 끔뻑였다.

봉문을 했지만 귀를 아주 닫은 건 아니라서 화산이 밖에서 벌이는 일들에 대해서야 대충 듣고 있었다. 하지만 현종이 장문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소리는 지금 처음 들었다.

현종은 차분히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운암이가 화산의 장문입니다.”

“⋯⋯벌써요?”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감이 있긴 하나, 역시 그게 옳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으음.”

종리곡의 눈빛이 한 번 더 변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의 화산은 과거의 화산과 다르다. 지금의 화산은 현판을 내릴 날만 기다리던 섬서의 삼류 문파가 아니라,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섬서의 패자다.

그러니 과거의 화산 장문 자리와 지금의 화산 장문 자리가 같을 리 없다. 이제는 화산의 장문이라는 위치만으로도 수많은 것들을 휘두르고, 경탄의 시선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런데 평생을 고통받은 끝에 겨우 손에 넣은 것들을 후대에 곧장 물려주고 자리에서 물러난다?

‘모르겠군.’

예전부터 느꼈지만, 그는 정말 현종과는 맞지 않는다. 아마 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화산과 종남이 영원히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없듯이 말이다.

장문인들이 서로 탐색하듯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화산의 제자들도 몇 해 만에 다시 본 종남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보고 있었다.

“⋯⋯저 새끼들 뭔가 좀 많이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까?”

조걸의 속삭임에 윤종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봉문을 오래 했잖느냐. 당연히 예전보다 강해졌겠지.”

“아뇨, 사형. 그런 말이 아니라⋯⋯.”

조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실력이야 당연히 늘었을 것이다. 애초에 봉문 전부터 소림, 무당과 함께 구파일방을 이끄는 문파로 평해지던 종남이 아닌가? 게다가 세월이 흐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무학이 상승하는 정공의 특성을 감안했을 때, 오히려 강해지지 않으면 더 이상하다.

하지만 지금 조걸이 느끼는 이질감은 무위 때문이 아니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들이 풍기는 느낌이 이전과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런데 저 새끼들 자꾸 야리는데요, 사형?”

“⋯⋯눈 마주치지 마라.”

“쫄았습니까?”

“아니, 이놈아. 그런 게 아니라⋯⋯.”

“어릴 때 맞았던 건 평생 간다더니.”

“⋯⋯.”

“응? 지, 진짭니까?”

조걸이 기겁하며 윤종을 획 돌아보았다.

“아니, 사형⋯⋯!”

콩!

그 순간 백천이 조걸의 머리를 때리며 일갈했다.

“조용히 해라. 장문인들께서 대화를 나누고 계시지 않느냐.”

“⋯⋯이건 좀 억울합니다, 사숙.”

“억울은.”

백천이 막 한마디를 더 하려던 차였다.

“몰골이 말이 아니군.”

너무도 익숙하지만, 평생 거슬렸던 딱딱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파고들었다. 백천은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너무도 닮았지만, 또 너무도 다르다.

그렇기에 편안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묘하게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마주하며 백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랜만입니다.”

백천의 말에 진금룡은 그저 탐색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칼날 같은 진금룡의 시선과 호수 같은 백천의 시선이 허공에서 서로 얽혔다.

이내, 진금룡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피어났다.

“살아 있는 게 용하군.”

“⋯⋯.”

“능력에 비해 과한 욕심을 내면 그리되는 것이다. 사람은 응당 제 분수를 알아야지.”

“아니⋯⋯!”

발끈한 조걸이 끼어들어 무어라 한마디를 하려는데 백천이 그런 그의 뒤통수를 꽉 잡아 눌렀다.

“사, 사숙!”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

조걸을 눌렀던 손을 뗀 백천은 제 뒷덜미를 주물렀다.

“분수에 안 맞는 짓 해 대다가 정말 객사할 수도 있겠다고요. 하지만 뭘 어쩌겠습니까? 모난 놈 옆에 있으면 정 맞는 건 세상의 이치인 것을.

”청명을 흘끗 돌아본 백천이 다시 진금룡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저 조금 덜 아프게 맞길 바랄 뿐입니다.

”진금룡은 말없이 백천을 빤히 바라보았다. 동생의 미소 띤 얼굴이 묘하게 불쾌한지 눈살을 찌푸린 그는 차갑게 말했다.“

어쭙잖은 명성만 믿고 날뛰지 마라. 그러다 죽는다.”

“⋯⋯노력은 하겠습니다.”

“네놈이⋯⋯.”

진금룡이 다시 한마디를 쏘아붙이려는 순간, 한 사람이 재빨리 다가와 슬쩍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동생분을 만나 사형께서 무척 반가우신 모양입니다.”

“이송백!”

“사형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걸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렇습니다. 하하하.”

이송백이 어색하게 웃자 진금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쯧.”

그러더니 이내 몸을 획 돌려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백천은 길게 숨을 내쉬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잠시 진금룡을 만난 것만으로 기가 빨린다는 듯이 말이다.

이송백이 고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눈치 없는 척 끼어들긴 했지만, 그냥 던진 말은 아닙니다. 정말 반가워서 저러시는 겁니다.”

“⋯⋯제가 그걸 아니까 문제겠죠.”

진금룡은 원래 그런 인간이다.

지금 한 말도 굳이 좋게 풀자면, 명성이 높아졌다고 무리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으니 자중하라는 의미다.

그 말을 저렇게까지 짜증 나게 할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진금룡 하나밖에 더 있겠는가?

“다시 뵈어 반갑습니다. 백천 도장. 저를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기억합니다, 이송백 소협.”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누군가에게 이송백은 종남의 그저 그런 검수일 테고, 누군가에게 이송백은 비무대회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준 이일 것이다.

하지만 백천이 기억하는 이송백의 의미는 그와 다르기에 잊을 수가 없었다.

‘저 망할 놈이 인정한 무인.’

눈이 머리끝도 아니고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린 놈이 인정했다. 심지어 다른 문파도 아닌 종남의 검수를. 이 사람을 설명하는 데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리고 설사 지금껏 이자를 알지 못했다고 해도, 이 순간부터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기도가⋯⋯.’

무어라고 콕 집어 형용할 수 없는 기도다.

위협적이지 않은데도 무게감이 상당하다. 그 묵직함을 보고 있으면 이송백과 딱히 친분이 없는 그조차도 안정감이 들 정도다.

문제는 그 안정감이 이상하게도 백천을 거슬리게 한다는 것.

‘⋯⋯이게 원래 종남의 검수를 보는 화산 검수의 감각인가?’

백천은 어째서 종남과 화산이 그토록 화합하지 못했는지를 이제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 음⋯⋯.”

이송백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백천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이자가 보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다. 무시로도 느껴질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백천은 딱히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

때로는 무위보다 중요한 것도 있기 마련이니까.

“청명아.”

“왜?”

종리곡과 현종의 대화에 끼어들 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청명이 공격적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이리 좀 와 봐라.”

“아니, 왜?”

“⋯⋯그냥 오라고.”

“에이.”

청명이 짜증 난다는 듯 그들이 있는 쪽으로 털레털레 걸어왔다.

“왜?”

“인사드려라.”

“응?”

백천의 앞에 선 이송백을 본 청명이 눈을 크게 떴다.

“어? 너⋯⋯?”

“청명 도장!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너⋯⋯.”

“예!”

청명의 고개가 옆으로 삐딱하게 꺾였다.

“누구⋯⋯더라?”

잠깐 정적이 흘렀다.

이송백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들의 만남을 은근히 주시하던 이들의 고개도 아래로 툭 떨어졌다.

백천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기대한 내가 등신이지.’

인정은 개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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