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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39화 (1,440/1,567)

1439화. 그래, 기억해 두지. (4)

“어⋯⋯. 음.”

이송백의 얼굴에 짙은 당황이 어렸다. 그런 그를 본 청명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뭘 그렇게 정색하고 그래? 당연히 농담이지, 농담!”

순간 모두가 다시 한번 두 눈에 기대를 품었다. 저놈이 기대를 배신한 게 어디 한두 번이겠냐마는⋯⋯ 그래도 혹시?

“그래서 그⋯⋯ 이름이⋯⋯. 이금⋯⋯백이던가?”

“⋯⋯이송백입니다.”

“하하하핫! 농담이지. 농담! 당연히 기억하지! 이종백!”

“이송백이요.”

청명이 그런 사소한 건 개의치 말라는 듯 이송백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본 모두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윤종이 안쓰러운 눈으로 이송백을 바라보았다. 물론 말이야 저렇게 하지만 청명이 정말 이송백을 잊었을 리는 없다. 저놈은 세상 모든 걸 잊어버려도 싹수가 있다 싶은 기재는 귀신같이 기억하는 놈이니까.

‘그냥 뭐 이름을 정확히 기억 못 하는 거겠지.’

근처에 진금룡과 진은룡, 진동룡이 굴러다니는데, 이송백 같은 이름이 머리에 박힐 리가 있나.

이건 청명보단 진씨 집안⋯⋯. 아니, 진초백의 잘못이다.

“⋯⋯괜찮아 보이시는군요. 다행입니다.”

“응?”

“상처가 너무 깊어서.”

이송백이 제 등을 두드리는 청명의 몸을 슬쩍 보았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을 지경이다. 이런 이와 태연하게 인사를 나누겠다고 생각한 자신이 철없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청명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뭐⋯⋯ 신경 쓰지 마. 흔한 일이니까.”

“⋯⋯흔합니까?”

“어, 흔해.”

이송백이 청명을 가만히 보았다. 묘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을 살피다 이송백은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응?”

“예전이었다면 사파 무리가 이곳을 침탈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세상입니다. 곧 무인이 부상을 입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겠지요.”

“어?”

“⋯⋯그런 세상을 버텨 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청명이 슬슬 이송백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이송백은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장. 그 정도 각오가 없었다면 봉문을 풀고 나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걱정한 적 없는데? 종남 새끼가 뭐가 이쁘다고 걱정을 해? 전쟁 중에 다 뒈졌으면 좋겠구만.”

악담을 넘어, 저주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이송백은 화를 내긴커녕 쿡쿡대며 웃었다. 그 반응을 본 청명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백천을 급히 돌아보았다.

“사숙. 저 새끼 왜 저래?”

“⋯⋯.”

“사숙네 형 좀 데리고 와 봐. 걔랑 말이 더 잘 통해.”

“⋯⋯그건 내가 싫다.”

청명도 골치 아프고, 진금룡도 골치 아픈데, 그 둘이 같이 있는다? 상상만 해도 위장이 아프다.

“그냥 각오를 다지시는 건데 그렇게 이상하게 볼 건 없잖으냐.”

“그게 마음먹는다고 되는 거면 누가 고생을 해?”

“그렇긴 하지만⋯⋯.”

백천이 슬쩍 이송백을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책 없는 자신감은 아닌 것 같은데.”

청명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본디 종남에 대한 욕이라면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청명도 이 말에는 딴죽을 걸지 못했다.

“⋯⋯봉문 효과가 좋은 모양이네.”

“봉문이나 폐관이나 뭐 다를 게 있다고. 사숙은 화종지회 앞두고 폐관했었는데 뭐 나아진 것도 없었잖아.”

“그 이야기를 지금 왜 꺼내! 그리고 효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전에는 화산에 없었던 놈이.”

“효과가 있어서 그 실력이었으면 그게 더 큰일 아냐?”

“⋯⋯망할 새끼.”

백천이 벌게진 얼굴로 좌절하자 청명이 낄낄 웃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이송백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확실히⋯⋯.’

이송백에게서 단단한 기도가 느껴졌다.

봉문 좀 했다고 강해질 거라면 천하의 수많은 문파 중 봉문을 마다할 문파가 어디 있겠는가? 문을 걸어 잠근다고 해도 그 안에서 얼마나 더 강해지느냐는 순전히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

그리고 지금 이송백은 결코 지난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았음을 제 기도로 증명하고 있다.

“그⋯⋯. 으음.”

그때 이송백이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뭔가 민망합니다.”

“응?”

“사실 조금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전 정말 열심히 수련했거든요.”

그건 굳이 말로 할 필요도 없다. 저 기도를 느낄 수 없다 해도, 온통 상처로 뒤덮인 손만 보더라도 그간의 노력을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화산 분들을 보니, 이건 딱히 자랑할 거리도 아닌 것 같습니다. 차이를 조금은 좁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송백이 쓰게 웃었다. 비단 청명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부상 때문에 제대로 설 수나 있을까 싶은 백천에게서조차 범접하기 어려운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이 사람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과연 이리 마주 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게다가 이 사람만이 아니겠지.’

뭔가 묘하게 불만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조걸도, 그 뒤에서 그런 그를 말리고 있는 윤종도 만만치 않다.

‘분명 종화지회나 비무대회까지만 해도 내가 저들보다 앞서 있었는데.’

종남이 봉문 한 기간 동안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혹할 만큼 몰아붙였다고 여겼는데, 따라잡기는커녕 따라잡힌 느낌이라니.

적호의 일도(一刀)를 막아 내며 부풀었던 자신감이 순식간에 본래 자리를 찾는 기분이었다.

그때 청명이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쯧. 하여간 종남 새끼들은 재수가 없다니까.”

“예?”

“어때?”

청명이 퉁명스레 물었다.

“네 검은 찾았어?”

그 질문에 이송백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잠시 뜸을 들인 그는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검이라고 말하기에는 민망하지만, 제가 어떤 검을 만들어 가야 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호오.”

“그리고⋯⋯ 너무 그리 안심하지 마십시오, 청명 도장. 종남에서 자신의 길을 찾은 이가 저뿐만은 아니니까요.”

그 말에 청명이 이송백의 뒤에 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아직은 어설프지만, 그래도 이송백과 엇비슷한 기도를 보이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송백의 기도가 아니라, 그가 알던 예전의 종남의 기도와 비슷하다. 청명의 입꼬리가 살짝 뒤틀렸다.

“축하할 일인가?”

“다 도장 덕분⋯⋯.”

“뭐, 그래 봐야 원점으로 돌아간 것뿐이지. 예전에도 종남은 화산을 못 이겼는데 지금이라고 뭐 다를 거 있겠어?”

“뭐야?”

“저놈이?”

뒤에서 듣고 있던 종남의 검수들이 발끈해서 청명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그 눈빛을 받고도 되레 히죽거릴 뿐이었다.

“왜? 한판 붙으시게?”

“으⋯⋯.”

종남의 검수들은 이를 갈면서도 차마 나서지 못했다.

이제는 보이기 때문이다. 모자랐던 시절에는 바로 앞에 두고도 알지 못했던 청명의 깊이가. 그들의 실력으로는 아직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힘이.

“그래 봐야 화산⋯⋯.”

“됐다.”

그 순간 진금룡이 가볍게 손을 들어 악담을 늘어놓으려는 사제들을 침묵시켰다.

“말로 지껄인다고 달라질 건 없다. 화산이 위인지, 종남이 위인지는 이제부터 서로 증명해 가면 될 일이다.”

“예, 사형.”

백천은 조금 놀란 눈으로 진금룡을 보았다.

저 사람이 저런 식으로 중재를 할 수 있는 이였던가? 봉문 동안 달라진 건 그들이나 이송백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화산 입장에서는 영광이겠지. 우리가 감히 적으로 인정해 준 것이니까.”

⋯⋯이왕이면 저 조동아리도 좀 달라지면 좋을 텐데⋯⋯.

“저 새끼는 형제 아니랄까 봐 사숙이랑 말하는 게 똑같네.”

“아니라고!”

“피는 못 속이나 봐.”

“아니라니까!”

기겁하여 발끈하는 백천을 보며 청명이 낄낄 웃어 대는 그때였다.

“조용히 하지 못하겠느냐?”

“이 녀석들!”

종리곡과 현종이 거의 동시에 고함을 쳤다. 화산과 종남 두 문파의 제자들이 움찔하며 시선을 땅으로 처박았다.

남은 당가인들을 구하기는 했지만, 어쨌건 당가는 큰 희생을 치렀다. 그런 상황에서 철없이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이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종리곡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살짝 혀를 찼다. 그리고 당군악을 향해 살짝 고개 숙여 보였다.

“아이들이 간만에 봉문을 풀고 나오니 영 자제가 안 되는 모양입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니 저를 탓해 주십시오, 가주님.”

“괘념치 마십시오. 그보다 여기 상황은 어찌 알고 오셨는지요?”

“개방에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아⋯⋯. 그럼 이제 종남은 봉문을 완전히 푸신 것입니까?”

“그러합니다.”

종리곡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종남의 길을 제대로 되찾았다고 자부하기는 어려운 단계라 몇 해쯤은 더 봉문을 이어 가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러한데 저희만 문을 걸어 닫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건 혼란한 강호를 평정하는 데 거들 생각입니다.”

“으음.”

현종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화산과는 껄끄러운 사이지만, 종남의 강함을 부정할 이들은 없다. 심지어 이들은 부족해서 봉문 한 것이 아니라, 더 강해지기 위해 봉문 하지 않았는가. 그런 종남이 전선에 합류해 준다면 지금 상황에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하면 이제 섬서로 돌아가십니까?”

“그럴 것입니다. 당가는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저희는⋯⋯.”

당군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당가의 가솔들이 아직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사천으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으니, 이제 머물 곳을 찾아봐야겠지요.”

“저희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종리곡이 가볍게 포권을 하려는 찰나였다.

“장문인.”

현종의 부름이 들려왔다. 종리곡은 대답 없이 현종을 돌아보았다.

“하고픈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태상장문인?”

“갑작스러운 말인 것은 알고 있으나⋯⋯ 결례를 무릅쓰고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탁이라⋯⋯.”

종리곡이 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힘을⋯⋯ 부디 종남의 힘을 빌려주십시오.”

종리곡의 얼굴이 묘한 빛이 번졌다.

“비록 만인방은 잠시 물러났지만, 사천을 침탈한 이들은 저들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다른 사파가 점창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종남이 힘을 보태 주신다면 그들을 도울 수⋯⋯.”

“그만하시지요. 태상장문인.”

종리곡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현종의 말허리를 끊어 버렸다. 현종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장문인. 현재 점창이⋯⋯.”

“종남이 점창으로 갈 일은 없습니다.”

실로 차갑기 그지없는 어투였다. 현종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많이 바뀌셨다고 여겼건만, 태상장문인께서는 예전 그대로이신 모양입니다.”

“⋯⋯예?”

종리곡이 날카로운 눈빛이 현종을 꿰뚫었다.

“사람 좋은 체하는 건 적당히 하십시오, 태상장문인. 그리고 남의 피를 대가로 제 잇속을 챙기는 것도 적당히 하십시오.”

“⋯⋯.”

“대인배인 척도 적당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대체 언제부터 종남과 화산이 서로 부탁을 주고받는 관계였습니까?”

현종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종리곡은 그런 그를 되레 비웃듯 바라보았다.

“그렇게 점창을 구하고 싶으셨으면 애초에 점창으로 가지 그러셨습니까? 선택해야 할 때는 친한 쪽을 택하고, 이미 지난 뒤에 안타까운 척해 봐야 위선일 뿐이지요.”

현종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하지만 종리곡은 그런 그를 안쓰러워하긴커녕 되레 냉소만 흘렸다.

“아, 모르지요. 태상장문인의 그 인덕에 마음을 준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당가를 일별한 종리곡의 시선이 이내 청명에게로 꽂혔다.

“종남이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결코.”

순간, 청명과 종리곡의 시선이 허공에서 거칠게 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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