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437화 (1,438/1,567)

1437화. 그래, 기억해 두지. (2)

“살⋯⋯았다⋯⋯?”

어떻게든 식솔들을 이끌던 당가의 총관 당상수는 물러나는 만인방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댔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종남의 선발대가 도착하고, 뒤이어 화산검협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곳에 들이닥쳤던 만인방도의 수는 압도적일 정도로 많았다. 만일 장일소가 마음만 먹었다면 이곳에 있는 모두를 몰살시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일소는 의외로 너무 쉽사리 물러나 버렸다. 이럴 거면 굳이 사천당가를 뒤쫓아 달려올 필요가 있었을지 궁금할 만큼 깔끔하게 말이다.

살았다. 그래, 그들은 이제 살았다.

‘어째서?’

예상과 너무 다른 전개였다. 다행이라 해야 할 상황임에도 안도보다 의문이 먼저 밀려왔다. 하지만 연이어 벌어진 상황에 당상수의 의문은 절로 풀릴 수밖에 없었다.

“초, 총관님! 저기! 저깁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그가 고개를 획 들었다.

“아⋯⋯.”

이내 그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메마른 대지에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무리가 보였다. 선두에 있는 낯익은 이의 모습을 본 순간, 당상수의 입에서 울음 섞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가, 가주니이이이임!”

독왕 당군악. 그가 당가를 잠시 비웠던 정예들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심지어 저 화산의 검수들과 함께 말이다.

“저, 저기도 옵니다.”

당상수의 시선이 이번에는 북쪽으로 향했다. 거기에서도 한 무리의 무인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이를 본 종남의 선발대들이 반응을 보였다. 종남의 검수들인 게 틀림없었다.

“종남인가 봅니다! 종남!”

기묘하게도 화산과 당가, 그리고 종남이 서로 짠 듯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 것이다.

“아⋯⋯.”

그제야 당상수는 어째서 장일소가 미련 없이 물러났는지 알 수 있었다. 제아무리 만인방을 이끌고 왔다고 해도 화산과 종남, 당가라는 세 문파를 동시에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털썩.

그제야 당상수의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어쨌거나 저 지독한 만인방의 마수에서 벗어난 것이다.

“총관!”

“가, 가주님! 여기입니다, 여기!”

당군악의 외침에 당상수가 황급히 다시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를 발견한 당군악은 대지를 접어 달리듯 단숨에 그의 앞으로 쇄도했다.

쿠웅!

멈춰선 당군악의 눈매가 슬쩍 일그러졌다.

“가, 가주님.”

주변에 있는 숱한 시신을 본 것이다. 만인방을 막아 내느라 희생한 장로들과, 만인방도의 마수 아래 비명에 횡사한 장인들까지.

게다가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도 몰골이 말이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숨이 넘어가도록 자지러지게 울고 있고, 탈진해 주저앉은 여인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은 와중에 그런 아이들을 달래 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처참하고, 또 비참하다.

전멸은 피했으나, 피해가 적다고 할 상황도 아니다. 천하의 당가가 이런 꼴을 당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죄송합니다, 가주님.”

당상수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가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그의 결단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를 이들이다. 그런 이들의 시신 앞에, 살아서 가주를 마주한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제가 미욱하여 가솔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제가! 제가 미욱해서 당가가 불타고, 공방과 독고가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제 결단이 늦어 모든 걸 다 잃었습니다⋯⋯!”

당상수가 울음을 터트리고 온몸을 들썩이며 고함쳤다.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저를! 가주님. 저를⋯⋯.”

꽈악.

그 순간 당군악이 당상수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마치 벌벌 떠는 몸을 진정이라도 시키는 듯이.

“그런 말 하지 말게.”

“⋯⋯가주님.”

“대신 사람이 살지 않았는가. 그거면 됐네. 독도 암기도 사람보다는 중요하지 않아.”

“⋯⋯.”

“고생했네.”

당군악의 말에, 당상수가 오열하며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당군악은 그런 그의 등을 내려다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부상 입은 이들과 탈진한 이들을 확인해 수습해라! 당장!”

“예, 가주님!”

분한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던 당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답하며 흩어졌다.

“학아!”

“어머님! 어머님, 어디 계십니까!”

“다친 사람은 이리로 오십시오! 아니, 제가 갑니다. 손만 드십시오!”

무인의 얼굴을 지우고 한 사람의 아비, 그리고 누군가의 자식으로 돌아간 제 수하들을 바라보던 당군악이 고개를 돌렸다. 저 앞에 홀로 있는 이의 등이 눈에 꽂혔다.

더는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할 힘이 없는 듯 주저앉은 청명이었다. 당군악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장일소는?”

“갔어요.”

청명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잘난 듯이 처웃더니 미련 없이 엉덩이를 빼더군요.”

당군악의 짙은 눈썹이 슬쩍 꿈틀했다. 장일소가 지었을 표정이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감정을 지워 낸 당군악이 짧게 말했다.

“고생했네.”

“⋯⋯뭐가요?”

청명이 획 고개를 돌려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눈빛에 한기가 그득하여 당군악은 안색을 굳혔다.

“벌써 죽을 사람은 다 죽었는데, 대체 뭘 고생했어요? 조금만 빨리 도착했어도 안 죽을 수 있는 이들이었는데.”

“⋯⋯그렇게라도 오지 못했다면 모두 죽었을 이들이 산 것이지.”

“내가 조금만 더 강했어도.”

“⋯⋯.”

“화산이 조금만 더 강했어도, 이들은 죽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조금만 더 현명하게 판단하고, 조금만 더 냉정했어도.”

당군악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솔들의 죽음 앞에 가장 안타깝고 가슴 아픈 것은 당군악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 더 큰 책임을 느끼고 있는 건⋯⋯ 청명인 듯했다. 당군악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그 순간, 어디선가 찢어지는 고함이 들려왔다.

“가, 가주님! 여기 당외 장로님께서!”

당군악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고함을 친 사람은 혹시 장로 중 생존한 이가 있는지를 확인하던 당패였다.

당군악은 힘껏 땅을 박찼다. 단번에 그곳으로 달려간 그는 당패가 안고 있는 당외를 빼앗듯이 안아 들었다.

“상태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당군악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니, 애초에 대답은 필요도 없었다. 당외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 그 역시 직감했으니까.

“장로님⋯⋯.”

당군악이 당외를 내려다보았다. 단전이 폐해진 이가 중독된 채로 양팔마저 잘렸다. 이건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살릴 수 없다.

초점 없는 당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당군악을 알아본 듯 움찔한 그가 입술을 희미하게 달싹였다. 그 움직임의 의미를 이해한 당군악이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예.”

당군악이 품 안에서 침을 꺼내 당외의 몸에 박아 넣었다. 이것으로 잠깐은 힘이 돌아오겠지만, 당외는 예정된 것보다 더 빠르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꺼지기 직전의 초가 더 강하게 타오르듯이 말이다.

“가, 가주⋯⋯.”

“예. 말씀하십시오, 원주님.”

당군악은 당외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한때는 증오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런 묵은 감정이 다 무슨 소용일까. 말 그대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가솔을 지키기 위해 이런 꼴이 된 노인에게 어찌 전과 같은 증오를 품을 수 있겠는가.

“⋯⋯미안하외다.”

얼굴에 생기가 돌아온 당외가 처음 꺼낸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군악의 얼굴이 굳어졌다.

“원주님⋯⋯.”

“내가⋯⋯ 내가 너무 어리석었⋯⋯소이다.”

당외의 야윈 몸을 붙든 당군악의 손이 잘게 떨렸다. 당외의 얼굴에는 처연한 후회가 내려앉아 있었다.

“내가, 내가 어리석어⋯⋯ 가주께 너무 큰⋯⋯ 짐을 남깁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원주님, 저는⋯⋯.”

당외의 두 눈에 뿌연 눈물이 맺혔다.

“가, 가주.”

당군악이 당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듣고 있습니다.”

“당가는⋯⋯ 당가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소⋯⋯. 이제 예전처럼은 어려울 것이오. 예전처럼은 될 수 없소. 그러니, 가주⋯⋯.”

“예.”

“법도 같은 건⋯⋯ 무시하고 가주의 뜻대로 하시오. 그게 가문을 위한 일이외다.”

“원주님⋯⋯.”

“결국은⋯⋯ 이리될 것을⋯⋯.”

당군악의 얼굴을 바라보던 당외가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 걱정스레 이쪽을 바라보는 가솔들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한껏 지쳤을 텐데도 되레 그를 걱정해 오는 이들이.

‘당가는 여기에 있구나.’

진정한 당가는 그 울타리로 둘러싸인 전각 안에 있지 않았다.

문득, 당군악을 향해 걸어오는 한 남자가 눈에 보였다. 익숙하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결코 잊을 수 없는 남자가.

‘화산검협⋯⋯.’

증오스러워야 한다. 하지만 증오스럽지 않았다.

되레 지금만은 기껍다. 저자가 당군악의 곁을 지켜 준다는 것이. 그가 했던 말은 지금도 기억에 확연히 남아 있으니까.

지금 당가에 가장 필요한 이는 바로 저런 이일 것이다.

“가주⋯⋯. 저들을⋯⋯. 저들을 부탁⋯⋯.”

“워, 원주님!”

당외의 고개가 천천히 꺾였다. 그리하여 온몸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이제 빠르게 식어 갈 일만이 남았다.

당군악은 그런 당외를 내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굳건한 어깨가 미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당외를 땅에 조심히 내려놓은 당군악은 몸을 곧게 일으켰다. 그는 당가의 가주다. 슬픔에 젖을 자격도, 고통에 겨워할 여유도 없다.

“⋯⋯장로들의 시신을 수습해라.”

“예, 가주님.”

당패가 희미하게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단순한 장로가 아니다.

당가는 피로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죽어 간 이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누군가의 할아버지다. 또 누군가의 둘도 없는 형제이자, 누군가의 지주였다.

“가주님⋯⋯.”

당군악에게 다가온 현종이 어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당군악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슬퍼만 할 일은 아닙니다, 맹주님.”

“⋯⋯.”

“되레 기뻐해야 할 일이지요.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모두 맹주님 덕분입니다. 사천당가의 가주로서 감사드립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현종을 향해 깊게 고개 숙인 당군악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조금 전부터 도착해 있었으되 아직 말을 건네지 못한 이들에게 시선이 닿았다.

“그보다, 일단 저쪽에도 감사를 드려야겠지요.”

당군악을 따라 시선을 옮긴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

만일 저들이 천우맹보다 먼저 도착해 주지 않았다면 살아남은 이들은 지금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당군악은 종남의 검수들이 도열한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 중앙에 있던 한 남자가 당군악을 맞이하듯 앞으로 나섰다.

천하검(天下劍) 종리곡(鐘離穀).

종남의 장문인이자, 화산과는 악연으로 얽혀 있는 바로 그였다.

“사천당가의 당군악이 장문인을 뵙습니다.”

“종남의 종리곡이 대사천당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깊이 포권을 했다. 동시에 사방으로 미묘한 긴장감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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