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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64화 (1,266/1,567)

1264화. 살려 보내지 않는다. (4)

소란하던 전장에 침묵이 내려앉은 건, 괴이한 일이라 봐야 할 것이다.

서로 물어뜯고 검을 휘둘러 대던 이들이 한 사람의 존재와 한마디 말로 인해 멈추는 상황이 말이다.

'저래도 되나?'

그리고 곽환소는 이 상황뿐만 아니라, 청명의 말에 큰 충격과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호가명이 누구인가? 저 만인방의 군사이자, 명실상부한 만인방의 이인자다.

아니, 지금 시점이라면 살짝 과장 보태서 저 강남을 지배하고 있는 사패련의 이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천하에 아무리 많은 명사가 있다지만, 전 강호를 통틀어 그 중요도를 따지면 열 손가락 안에는 못 들어도 스무 발가락 안에는 응당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의미다.

그런데 뭐? 누구?

'진짜 저 양반 제정신인가?'

아무리 괴상한 인간이라 해도 꾸준히 지켜보다 보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게 정상일진대, 저자는 볼수록 더 알 수가 없었다.

“…… 안면은 있는 것 같은데.”

이젠 아예 호가명을 바라보며 고개를 연신 갸웃대고 있었다. 그런 청명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그…… 청명아.”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슬금슬금 다가온 윤종이 목소리를 낮추며 청명에게 귀띔했다.

“호가명이잖아, 호가명."

".....…호, 뭐?"

"호가명!"

"그게 누군데?”

윤종의 얼굴이 괴이하게 뒤틀렸다.

"호가명! 이 새끼야! 호가명! 우리 회의할 때마다 나왔던 이름이잖아! 만인방의 군사 호가명!"

"아!”

청명이 눈을 빛내며 손뼉을 짝 쳤다.

“나 쟤 누군지 알아!"

"드디어 기억났냐?"

"장일소 그 새끼 졸졸 따라다니면서 수발드는 새끼!"

"......"

윤종이 순간 한 손으로 제 눈을 턱 덮었다.

'그래. 그렇게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모르는 것보다는 낫지.

그게 어디냐, 그게......

"아아, 미안."

청명이 피식 웃으며 호가명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사람 얼굴을 기억 못하는 편은 아닌데..….”

“못하는 편이야."

“많이 못하는 편이다. 청명아.”

“아닙니다. 저 새끼는 사람 얼굴은 잘 기억해요. 저런 인간들을 사람으로 안 치는 거지.”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네.”

옆에서 뭐라고 하건 말건 청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볼 때마다 워낙 눈에 띄는 놈이 같이 있어서 말이야. 미안하게 됐네.”

"......"

“솔직히 말이야 바른말이지. 화장한 사내새끼가 앞에서 깨춤을 추고 있는데, 쟤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냐고. 이건 내 탓이 아니지."

또다시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뭐랄까 굉장히 잘못된 말 같기는 한데……

'납득 간다.'

'그건 솔직히 장일소 잘못이 맞다.'

'수수한 게 죄는 아닌데……'

청명이 히죽 웃으며 호가명을 보았다.

"장일소 없이 따로 다니시기도 하는 모양이네. 괜찮겠어? 혼자서?"

모두의 시선이 호가명에게로 쏠렸다.

사실 저건 굉장히 굴욕적인 말이다. 호가명은 누가 뭐래도 확고부동한 만인방의 이인자다. 그런 이에게 저 말이 모멸감을 주지 않을 리 없다. 면전에 퍼붓는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특히나…… 무위가 무엇보다 중요한 사파의 세계에서 무위가 그리 뛰어나지 않은 호가명이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은 장일소의 절대적인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도 사실.

몇 마디 되지 않으나 청명의 말에는 '너는 장일소라는 범 덕분에 호가호위하는 여우에 불과하다'는 비하마저 담겨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 말이 그리 틀리지 않기에 호가명이 느끼는 굴욕감은 더욱 클 것이다.

모두가 호가명의 반응을 살폈다. 그가 어떻게 분노를 표출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 속에서도 호가명은 여전히 표정 하나 없었다. 평소처럼 서늘한 눈으로 전황을 살핀 호가명의 입술이 무심하게 열렸다.

“굉장히 무례한 말이지만…… 상대가 화산검협이라면 무례가 무례일 수 없겠지."

나직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귀에 박히는 목소리였다. 청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호가명이 담담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히려 천하의 화산검협이 내 얼굴을 기억해 준 게 영광이지."

그의 목소리엔 비꼬는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청명의 도발을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이곳에 있는 이들로 하여금 화산검협이라는 이를 다시 보게끔 했다.

저 만인방의 군사. 아니, 이제는 사패련의 군사라 불러야 할 호가명이 청명이 자신을 알아주어 영광이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새삼 그들과 함께 서 있는 이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절감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조금 놀랍기도 하군.”

호가명의 시선이 청명에게서 떠나 천우맹의 다른 명도를 하나하나에게 닿았다. 흡사 꿰뚫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 먼 남해의 땅까지 오셨는지 말이야."

공기가 삽시간에 싸늘히 식었다. 청명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재미없는 새끼네."

살짝 흔들어 봤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청명은 알고 있다. 경험상 이런 유형이 상대하기 가장 껄끄럽다는 것을.

"놀래는 맛도 없고."

"아니."

의외로 호가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굉장히 놀라는 중이다. 이곳에서 그대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

"련주께서 하신 말씀이 틀리지 않았군. 진짜 무서운 건 강자가 아니라 광인이라더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이 상황도, 천우맹의 의도도.

아니. 의도를 이해 못 한다는 건 조금 틀린 말이다.

의도는 이해한다. 해남을 구하고 싶었겠지. 협의를 위해서든, 추후에 사패련을 상대할 전력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든.

호가명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그런 부분이 아니다.

"하나 물어도 되겠나?"

"얼마든지."

"구파일방 중 하나인 해남, 물론 중요한 문파겠지. 하지만...... 그대들은 정말 이곳에 있는 그대들의 목숨이 해남보다 중하지 않다고 여기는 건가?”

그 말에 몇몇 이들의 안색이 변했다.

담담히 물어와서 오히려 더욱 폐부에 박히는 질문이었다.

“실수를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냉정히 말하면 틀렸다. 사람이란 그게 누구라도 실수를 할 수밖에 없으니까. 중요한 건 실수하지 않는 게 아니라,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거지."

"......"

“내 생각에는 지금 그대들이 저지른 짓이 그 치명적인 실수에 해당하는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지?"

놀라지 않았느냐고?

천만에 호가명이 한 말 중에 거짓은 없다. 이렇게까지 당황해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뒤에서 신호가 터졌을 때도 보나 마나 해남 놈들이 잔재주를 부리고 있는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이곳에서 저 천우맹 놈들과 화산검협을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놀라는 건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나는 이런 말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호가명의 입가에 처음으로 옅은 미소가 어렸다.

“예상도 못 한 소득을 얻는다는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로군. 설마 해남 같은 잔챙이를 처리하러 와서 그대들을 보게 될 줄이야."

백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호가명…… 장일소의 군사.'

분명 크게 놀랄 거라 생각했다.

이곳의 전황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공격해 올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호가명은 그 대신 느릿하게 전장을 멈춰 세우고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백천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압박을 주었다.

장일소는 변덕스러운 짐승이다.

그리고 마교는 광기에 젖은 야수다.

대체로 그랬다. 지금껏 그들이 상대한 이들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에 두려운, 평범한 사람의 상식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호가명은 다르다.

저 차갑게 가라앉은 눈에는 장소나 주교에게서 엿보이는 광기 따위가 일절 어려 있지 않다.

보이는 거라곤 그저 냉철한 지성과 소름 돋을 만큼 대단한 침착함뿐이었다.

'……사냥꾼이라는 건가?'

등 뒤에서 굶주린 짐승이 쫓아오는 건 실로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등 뒤에서 자신을 사냥하려는 자가 쫓아오는 건 또 어떤가?

과연 그게 굶주린 짐승에게 쫓기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이곳에 온 이가 호가명이란 사실이 어쩌면 더없는 불행일지도 모른다고 백천이 생각하던 그때였다.

"실수?"

삐딱한 청명의 목소리가 울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는 피식 웃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네가 하나 모르는 것 같은데.”

"음?"

“실수라는 건 말이야."

청명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걸 짚어 내고 이용할 능력이 있는 놈에게나 의미가 있는 거지!"

파아아아아아앗!

순간 청명의 암매검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선혈처럼 붉은 검기가 허공에 피어났다.

쇄애애애애애액!

검기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호가명의 목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호가명은 피할 생각도 없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기를 차게 바라보았다.

"하!"

그때, 들뜬 듯한 목소리와 함께 호가명의 지척에 있던 이 하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뛰어올랐다.

그가 호가명 앞을 가로막은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검과 검기가 충돌하며 붉은 검기가 폭죽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달려!"

"알았다!"

정신이 번쩍 든 백천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해남 제자 하나의 멱살을 잡으며 뒤쪽으로 밀쳤다.

"승선하십시오! 당장!"

"예? 아…… 예!"

그제야 덩달아 정신 차린 해남의 제자들은 전력을 배를 향해 달렸다. 화산의 제자들은 청명이 검기를 날린 그 순간부터 이미 앞을 가로막은 이들을 뛰어넘고 찌르며 배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놓치지 마라!”

"예!"

어디선가 들려온 고함에, 만인방의 본대 역시 힘껏 땅을 박차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고요하던 전장이 순식간에 다시 끓어올랐다.

혈검단주 괴양은 달려가는 청명의 등을 조용히 바라보며 제 손목을 까딱까딱 털었다.

"......화산검협이라."

나직이 중얼거리자, 이내 귓가에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쿡쿡쿡."

괴양이 웃음을 흘렸다.

그는 만인방의 단주다. 장일소가 아니라면 천하의 누구를 상대로도 이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괴물이야."

손목에서 시큰하게 느껴지는 통증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장난처럼 뿌린 검기와 전력으로 휘두른 검이 충돌했는데, 손해를 입은 쪽은 오히려 그다. 물론 그것만으로 무학의 고하를 논하기는 어렵겠지만, 상대가 얼마나 강한가를 말해 주는 데는 충분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지."

괴양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범도 승냥이 떼에 찢겨 죽는 법, 우리가 하는 건 승부가 아니라 사냥이니까."

그 말에 호가명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무슨 수를 써도 상관없다.

이곳은 해남, 중원의 최남단이다. 범이 아니라 용이라 해도...... 아니, 용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라 해도 이곳에 발을 들인 이가 맞이할 운명은 단 하나밖에 없다.

"반드시 죽여라."

“련주께는 보고하지 않나?"

"...... 죽인 뒤에 보고해도 늦지 않다.”

그 말에 혈검단주가 괴이한 웃음을 보였다.

"책임을 져 준다면 나야 환영이지."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 살기가 들끓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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