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5화. 살려 보내지 않는다. (5)
전장이 다시 들끓어 올랐지만, 곽환소는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앞에는 만인방의 배가 있고, 뒤쪽으로는 만인방의 본대가 밀려오고 있다. 그가 일개 해남의 제자였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배를 탈취하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남의 대제자다. 밀려오고 있는 만인방의 본대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막아야 하나?'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갈팡질망하는 그 순간,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확 끌어당겼다.
“배, 백천 대협?"
“뭐 하는 겁니까!"
“저, 저도 돕겠…‥”
"뒤쪽은 저희가 막을 테니, 당장 배로 가십시오! 배 안에도 적이 있을 겁니다!"
곽환소가 그제야 아차 하며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의 말이 맞다. 저 배 안에 만인방도들이 남아 있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럼 누군가는 배 위에서 해남을 지휘해야 한다.
“제자들을 이끌고 배를 모두 탈취하십시오! 남김없이 승선하면 기다릴 것 없이 바다로 나가시면 됩니다!"
"그, 그럼 대협들은?"
"어서!"
백천이 다시 한번 곽환소의 어깨를 꽉 틀어쥐었다.
“우릴 살리고 싶으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움직여요!"
백천은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곽환소를 떠밀었다. 획 밀려난 곽환소의 눈에 사방에서 날아와 그의 앞을 채우는 천우맹의 맹도들이 보였다.
"어딜 기어와!"
파아아아앗!
조걸은 띄워 올렸던 몸이 채 착지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검기를 날려 댔다. 검 끝에서 분열하듯 퍼져 나간 검영이 흡사 비처럼 만인방도들을 향해 쏟아졌다.
곽환소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검에서 쏟아져 나간 검영이 내리쬐는 남해의 뜨거운 햇빛을 갈라 버리는 것만 같았다.
"큭!"
"이, 이놈이!"
본대의 등장에 용기백배하여 공격해 오던 창귀대원들이 그 빛살과도 같은 검기에 주춤대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조걸의 등 뒤로 또 한 사람이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라락!
낙화(落花).
조걸의 머리 위로 치솟은 검에서 붉은 꽃잎이 만발했다. 뜨거운 한낮을 한순간 봄의 정취로 뒤덮어 버린 꽃잎들은 남해의 하늘을 수놓으며 분분히 떨어져 내렸다.
"크, 크윽!"
겉으로야 한없이 가녀려 보이는 꽃잎이 하늘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검을 상대하는 이들은 알 수밖에 없다. 저 가녀린 꽃잎 하나하나가 얼마나 날카롭고, 또 얼마나 위험한지.
조걸의 검영과 유이설의 검기가 만인방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 놓는 순간.
"타아아아압!"
"오오오오오오!"
눈 부신 백광과 상서로운 불광이 동시에 솟구쳤다.
남궁도위와 검강과 혜연의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이 뭉쳐 달려드는 이들의 한가운데로 여지없이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앙!
백광과 불광이 뒤섞여 폭발하는 소리에 터져 나오던 비명조차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하지만 괜히 만인방이 아니다. 동료들이 육편이 되어 터저 나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쉬이 기세를 놓치지 않았다.
"크하하아아아앗!"
만인방도들은 짐승 같은 기합을 지르며 아래로 착지하려는 조건과 유이설을 노렸다. 그런 그들 앞으로 누군가가 달려와 가로막고 섰다. 어느새 전위까지 단숨에 달려온 백천이었다.
쾅!
땅을 터뜨릴 기세로 전각을 내밟은 백천이 가공할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붉은 검기가 달려드는 이들을 단숨에 양단했다.
파아아앗!
뜨거운 피가 얼굴을 뒤덮었지만, 백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소리쳤다.
"지켜라!"
실로 간결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미 백천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데 익숙하니까. 당연히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빠르게 이동해 검을 휘두른다.
“으아아아아! 오른쪽! 오른쪽! 제기랄, 오른쪽이 비잖습니까! 당 소주님 뭐 하는 겁니까! 밥은 어디로 처먹……. 아니, 씨! 밥 대신 독을 처먹어서 그런가? 빨리 가세요, 빨리!"
“.……언젠가 꼭 둘이 봅시다. 녹림왕."
당패가 이를 갈아붙이며 임소병이 가리킨 쪽으로 재빠르게 달려갔다. 신경질적으로 휘두른 손끝에서 발출된 독질려가 성난 물소처럼 뛰어오는 만인방도의 앞에 흩뿌려졌다.
콰득!
“끄윽!"
발을 꿰뚫고 들어온 강침에, 만인방도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통증이 상당했으나 그 정도쯤은 무시하고 앞으로 달렸다. 아니, 달리려 했다. 몸이 그 자리에 쿵 엎어지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상처를 통해 삽시간에 침투한 당문의 독이 몸을 순식간에 마비시킨 것이다!
“간격 더 벌리라고, 간격! 좌우로 빠져나가는 놈들을 막아요!"
“저, 저는 어디로 갑니까, 녹림왕!"
어디선가 날아든 질문에 임소병이 획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을 꽉 잡고 입술을 질끈 깨문 설소백의 모습이 보였다.
"궁주께서는!"
"예!"
"..…..어디 쓰지?"
"..….예?"
임소병이 부채로 뺨을 꾹꾹 누르며 급히 머리를 굴렸다.
“어...... 일단 그...... 저 뒤쪽에 어......"
“당 여협! 위험합니다!"
그 순간 설소백이 임소병의 지시가 떨어지기도 전에 당소소 쪽으로 전력을 다해 달려가 버렸다.
황당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던 임소병은 이내 피식 웃었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원."
그걸 말해 뭐 하겠는가? 뻔한 일이지.
그리고 그때, 그들이 만들어 낸 방어선에 한 무리가 합류했다.
“장문 대리를 도와라!"
“가자!"
해남 장문인 금양백을 비롯한 해남의 장로들이 방어선에 합류한 것이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며 이를 갈았다.
"이 악적 놈들!"
“내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위야 둘째치고, 사패련과 만인방에 대한 악감정이라면 화산에도 뒤지지 않을 이들이 해남이다.
처음으로 만인방을 향해 마음껏 검을 휘두를 기회를 얻은 해남의 장로들은 노한 파도와도 같은 검을 쉴새 없이 뿌렸다.
"아이고, 영감님들. 힘도 좋으시지!"
“장로님들이셔, 이 미친놈아!"
“......사형. 요즘 저를 너무 막 대하시는 것 같은데."
“네가 인간이 막돼먹은 거야!"
“...…말 너무 심하시네."
조걸이 윤종에게 받은 상처를 애꿎은 만인방에 풀겠다는 듯 검을 찔러 댔다.
“자, 와……”
"와 봐! 이 새끼들아!"
"......"
목소리가 끼어든 곳을 향해 조걸이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악귀 같은 얼굴로 검을 무자비하게 쑤셔 넣는 당소소가 보였다.
조걸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쾅!
땅을 박찬 순간 모래가 거세게 튀어 올랐다.
“더 빨리 달려!"
"으아아아아아아!”
곽환소가 이를 악물었다.
만인방의 본대가 주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도 이를 악물고 있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가자!"
"예!"
그런 곽환소를 움직이게 하는 건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고함 소리였다.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는 건 바로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 순간에도 치열한 격전으로 인한 굉음이 연신 터지고 있었다. 곽환소의 몸이 절로 앞으로 쏘아져 드높은 선박의 뱃머리를 단숨에 박차고 올랐다.
"으아아아앗!"
머리끝까지 차오른 혈기를 굳이 참을 것 없이 발산하며 선상으로 뛰어오른 곽환소의 눈에, 배를 지키고 있던 몇몇 만인방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제압해라!"
범이 울부짖듯 포효한 곽환소는 대답을 기다릴 것 없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검기가 성난 해일처럼 적에게 쏟아졌다.
"크윽!"
곽환소의 검에 어깻죽지를 길게 베인 만인방도가 억눌린 신음을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만인방도를 향해 다른 해남 제자 하나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쇄애애애액!
그건 곽환소가 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는 일검이었다.
그렇기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어깨를 베인 만인방도가 두 눈으로 살기를 뿜으며 도를 휘두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촤아아아악!
섬전처럼 날아든 만인방도의 도가 해남 제자의 가슴을 길게 베고 지나갔다.
"좌, 좌공!"
“사제!"
곽환소가 악을 쓰며 만인방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연이어 그의 사형제들이 날린 검이 만인방도의 전신을 꼬치 꿰듯이 꿰어 버렸다.
"으아아아아아! 이 애송이 놈들!"
하지만 만인방도는 전신이 꿰뚫리고도 오히려 그들을 향해 달려들며 무서운 기세로 도를 휘둘렀다.
콰앙!
막아내려는 검을 두 동강 낸 도는 몇몇 해남 제자들을 더 베었다. 붉은 피가 울컥울컥 사방으로 뿌려지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갑판 위가 지옥도로 돌변했다.
“이 개자식아아아아아!"
이자양이 거칠게 달려들며 만인방도의 가슴에 검을 쑤셔 박았다. 곽환소도 뒤지지 않고 단숨에 뛰어들어 만인방도의 목에 검을 찔렀다.
콰득!
"꼬르륵......"
만인방도의 입에서 피가래가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는......”
"......"
"모두 죽는..….”
아무리 독기 가득한 인간이라 해도 목을 꿰뚫리고는 버틸 수 없었는지,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숨이 끊기고도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곽환소의 손끝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좌공! 괜찮으냐?"
“비, 빌어먹을! 대사형! 채욱이 놈이 크게 다쳤습니다!"
"피, 피가 계속 나옵니다. 사형!"
"후욱……”
곽환소는 소매로 얼굴에 엉망으로 튄 피를 문질러 닦았다. 귀가 먹먹해서 그 어떤 소리도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심장이 목으로 튀어나올 듯 쿵쾅대는 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대사형!"
다시 한번 재촉하는 소리가 쏟아지자 곽환소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진정 못 하겠느냐!”
크게 고함치는 소리에 호들갑 떨던 이들이 움찔했다.
"각오하고 온 게 아니냐!"
"......"
“밑에서는 천우맹 분들이 목숨 걸고 저들을 막아 내고 있다. 그런데 상처 좀 입었다고 뭣들 하는 짓거리야!"
“사, 사형……”
"몇은 남아 부상자를 돌보고! 남은 이들은 빨리 배를 모두 장악해라! 어서!"
"예!"
"자양!"
"예, 사형!"
"조타실로 가라! 배를 움직여야 한다!"
"예!"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자 곽환소는 그제야 쓰러진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락을 함께 나누었던 그의 사형제들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눈빛은 어느새 반쯤 빛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보는 곽환소는 날카로운 강침에 찔리기라도 한 듯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되레 눈을 한차례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다!
"빨리 움직여라! 아래에서 버티고 있는 분들이 쓰러지기 전에!"
"예!"
곽환소는 검을 꽉 움켜잡고 몸을 날렸다.
우선은 맡겨진 역할을 해낸다. 슬퍼하는 것도, 분노하는 것도 그다음 일이다.
'이게 전쟁!'
흡사 꿈을 꾸는 듯 멍했던 것이 가시니 갑자기 피비린내가 코로 확 밀려들었다. 그 냄새가 이게 현실임을 실감하게 했다. 지금 그는 전장의 한중간에 있는 것이다.
"으아아아앗!”
곽환소가 선실에서 뛰쳐나오는 만인방도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검 끝이 살을 가르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곽환소의 눈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악의 여린 살기가 어렸다.
"모조리 쳐 죽여라! 해남 땅을 밟은 것을 지옥에서 후회하도록!"
전장의 광기가 또 하나의 검수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