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6화.
만인방 새끼들이나 걱정하십쇼! (1)
'이들이 천우맹!'
금양백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사실 처음 계획을 논의할 때만 해도, 금양백은 이 작전을 주도하는 게 자신들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작전을 수립하는 게 누구인지와는 조금 다른 문제다. 만들어진 작전을 누구의 힘으로 이끌어 가는가 하는 문제니까.
금양백의 생각으로는 그게 당연히 그와 해남의 장로들이어야 했다.
이유? 그건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화산검협의 명성이 천하를 뒤덮고, 화산오검의 명성이 이 해남까지 울린다고는 하지만, 또한 그들과 함께 온 이들이 저 오대세가의 가주가 될 이들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결국 아직 어린 청년들이다.
따지자면 해남의 대제자인 곽환소보다도 더 어린 이들이 아닌가?
가진 명성과 그 직위는 당연히 인정하나, 못해도 이들보다 몇십 년은 더 수련해 왔으니 무위에서 밀린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천우맹의 맹도, 특히 화산의 제자들은 그런 그의 생각을 산산이 깨트렸다.
"하아아아아압!"
화산 장문대리 백천의 검이 붉은 검기를 줄기줄기 뿜었다. 뿜어져 나간 검기가 허공에서 산화하듯 흩어지더니 이내 붉은 꽃잎이 되어 적을 휩쓸었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구분하는 게 불가능한 검기다.
애초에 허초란 정직한 정공만으로는 뚫어 내기 어려운 상대의 방어를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검의 허초는 그런 영역을 벗어났다.
흩날리는 수백 개의 검기 중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를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다. 완벽하게 구분한다고 해도 막아 낼 수가 없으니까.
"큭!"
"아아악!"
그리고 그 사실은 백천의 검기를 상대하는 만연방도들의 고전이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 혼전 속에서 저 작은 검기를 일일이 막아 낸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저 검기를 홀로 막아 내는 게 훨씬 어려울 거라 여기기 쉽지만, 실제는 전혀 다르다. 일 대 일 승부에서는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넘쳐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뒤로 물러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화산의 저 검술은 집단으로 싸우는 전장에서 놀라울 만큼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의미다.
'말이야 쉽지.'
저런 검기를 쓰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면 천하의 모든 김수들이 같은 선택을 했을 게 아닌가?
검기란 검을 통해 뻗어 나가는 기운이다. 그 기운을 자잘하게 분절하여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는 건 난해하기 그지없는 일.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조차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기까지 대체 어떤 고련을 겪어 왔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젊은이들이 이런 실력을……'
다른 이가 했다면 무례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양백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누가 뭐라 해도 구파일방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해남파의 장문인이니까.
그리고 그런 그가 보기에도 이 젊은 검수들의 실력은 해남의 장로들과 비등하다. 아니, 해남의 장문인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죽어! 이 만인방 새끼들아!"
"걸아! 혼자 망아지처럼 뛰쳐나가지 말라고 했잖느냐!"
"하지만 만인방이잖습니까. 사형!"
“제발 닥치고 발 좀 바닥에 붙여라! 이 빌어먹을 자식아!"
게다가 이들이 검술을 떠나 적을 상대하는 노련함은 해남의 장로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눈앞에서 전장의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이 물밀듯 밀려오고 있음에도 겁을 먹기는커녕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사기를 끌어 올리고 있다.
'이게 화산인가?'
금양백은 새삼 실감했다.
해남파가 이 먼 해남도에 박혀 자신의 검술을 갈고닦는다는 미몽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이들은 수도 없이 싸우고 또 싸우며 강해진 것이다.
고인 물은 썩는다.
자신이 해남을 위해 해 왔던 일이 어쩌면 해남을 드넓은 바다가 아닌, 해남도라는 작은 섬에 갇힌 물웅덩이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장문인!"
"알았다!"
옆에서 들려오는 격한 목소리에 금양백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쿠웅!
그가 평소와는 달리 강하게 진각을 내밟았다. 그와 동시에 떨쳐진 그의 검에서 노도와 같은 검기가 광폭하게 몰아쳤다.
콰아아아아아!
해남의 검은 몰아치는 바람이자 밀려오는 파도와도 같다.
금양백의 검이 한 번, 또 한 번 거듭 휘둘러졌다.
일파! 또 일파! 또 일파!
해안으로 몇 번이고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금양백의 검기가 적을 향해 끝없이 밀려 나갔다.
만인방도들의 안색이 파래졌다.
화려하고 위협적이지만 무거움만은 갖추지 못한 화산의 검과는 달리, 금양백이 쏟아내는 검기는 실로 거칠고 무거웠다. 그 안에 담긴 내력만으로도 사람을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리를 지켜라! 배를 완전히 손에 넣을 때까지는 이곳에서 버텨야 한다!"
“예!"
그 검기를 본 장로들 역시 용기백배하여 검을 떨쳤다.
뒤쪽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임소병이 히죽 웃었다.
“구파일방은 구파일방이로군.”
배를 점거하러 뛰어다니는 해남파 애송이 놈들이야 별 도움이 안 된 게 사실이다. 냉정하게 따져 아무리 해남파라 한들, 실전을 처음 겪어 보는 이들이 제 역할을 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평소 실력의
반이라도 발휘하면 다행이다.
하지만 금양백을 비롯한 장로들은 강호에서 쌓아 온 시간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그들의 합류로 전선이 단단해진 게 확연히 보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오래는 못 버텨.'
그래 봐야 한계는 극명하다.
"죽여라!"
"모두 죽여!"
만인방도들이 쓰러진 제 동료의 등을 짓밟고 미친개처럼 앞으로 달려들고 있다.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의 수는 고작 서른 남짓. 아무리 일당백의 고수들이라고 해도, 저 많은 만인방도들을 상대로 끝까지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만인방이 사패련의 패자가 되는 일이 벌어졌겠는가?
지금 버틸 수 있는 이유는 하나, 화산이 깔끔하게 기선을 제압하여 적이 밀려오는 기세를 한번 꺾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영원할 수 없다.
머릿수란 때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때로는 모든 것이 되기도 한다. 앞을 막고 있는 이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걸 알고 있는 만인방도들은 끊임없이 박차를 가하며 천우맹도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큭!"
“버텨!”
서걱!
조걸의 왼팔이 날아든 도에 길게 베였다. 피가 흩뿌려졌다.
"걸아!"
“호들갑 떨지 마십시오, 사형!"
“뒤로 빠져라! 내가....!"
“아, 호들갑 떨지 마시라니까!"
이를 악물고 버럭 고함을 친 조걸은 달려드는 이의 목을 단번에 꿰뚫었다.
콰득!
검을 뽑아내는 순간 뻥 뚫린 구멍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가 그의 얼굴로 왈칵 쏟아졌다.
'끝이 없군.'
죽이고 또 죽여도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곳에서는 대체 이 군세가 어디에서 끝나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이 드넓은 해안이 모조리 만인방으로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아아아악!"
옆에서 들려온 비명에 조절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릴 뻔했다. 마지막 순간에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시선을 전방으로 고정했다. 지금 고개를 돌려선 안 된다.
'아니야!'
저 목소리는 그가 아는 목소리가 아니다. 아마 해남의 장로 중 하나가 쓰러지는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안심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어쨌거나 버티지 못하는 이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는 거니까.
"노오옴!"
적들의 대처도 더욱 기민해진다.
소수로는 모두 베이기만 할 뿐이라는 걸 알게 된 만인방도들이 기세를 조금 늦추고 더 많은 이들을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머리 위로 도기를 뿌렸고, 누군가는 사람과 사람의 틈새로 마구잡이로 검을 찔러 댔다.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눈먼 칼질이지만, 그조차도 버텨 내는 이들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윽!
"사고!"
"자리 지켜!"
유이설의 냉정한 목소리가 조걸의 정신마저 번쩍 들게 했다.
"빌어먹을! 녹림왕! 멀었습니까?"
“..…아니, 이쯤이면 이제 됐을 저, 저 새끼들 뭐 하는 거야?"
"예?"
별안간 임소병의 입에서 버럭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야. 이 멍청한 새끼들아! 지금 뭐 하는 거야!"
임소병이 보고 있는 건,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 쪽을 향해 힘껏 밀고 있는 해남의 제자들이었다. 등 뒤에서 날아든 욕설에 항의라도 하듯 그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배, 배가! 배가 모래톱 위에 걸쳐져 있습니다! 밀어 내야 합니다!"
"뭐?"
임소병이 놀란 눈으로 배를 다시 살폈다. 지금 보니 확실히 배의 앞부분이 해안에 걸쳐져 있었다.
'아까는 안 그랬는데?'
그가 상황을 잘못 파악했을 리는 없잖은가?
“썰물이라 물이 빠져서 그렇습니다!"
"썰물? 그게 뭔 소리야?"
그러자 이자양이 답답하단 듯 눈을 까뒤집었다.
하지만 임소병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었다. 평생을 산에서만 살아온 그가 섬의 조석(朝夕)을 대체 무슨 수로 알겠는가?
"당장 밀어내!"
“배, 배가 워낙 커서……!”
임소병이 환장하겠다는 듯 입술을 짓깨문 그때였다.
"녹림왕! 이쪽으로!”
"예?"
"혜연 스님!"
"예!"
임소병이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백천의 명을 받은 혜연이 벼락처럼 달려갔다. 그 광경을 본 임소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 미친 땡중 놈아! 그럼 전선이 비……”
“제가 갑니다아아아!"
"으아아아! 비켜! 넌 아냐. 이 새끼야!"
임소병은 부리나케 달려가려는 설소백을 냅다 걷어차 버리고는 혜연이 있던 자리로 파고들어 직접 죽어라 부채를 휘둘렀다.
“이 책사 귀한 줄 모르는 것들! 다 뒈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임소병이 뭐라 지껄이건 혜연은 선박 앞에 도달해 외쳤다.
"비키십시오!"
"예?"
"어서!"
해남의 제자들이 화들짝 놀라 자리를 터 주었다. 혜연은 짧게 반장하더니 제 장심을 배에 붙였다.
"후웁!"
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혜연의 옷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오오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혜연은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커다란 배를 밀어 내기 시작했다.
"자, 잠시!"
기겁한 곽환소가 황급히 그를 뜯어말리려 했다. 물론 배는 무척 튼튼한 물건이지만, 결국은 목재로 만든 것이니 한없이 약하기도 하다. 저 커다란 배를 밀어 낼 만한 힘을 한곳에 가한다면 배가
움직이기도 전에 목재가 부서져 구멍이 뚫릴 게 아닌가!
“당장 멈추십‥….”
하지만 그런 곽환소의 우려는 순식간에 불식되었다.
해연의 장심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기운이 배의 앞부분을 넓게 뒤덮더니, 이내 거대한 배가 그극그극 소리를 내며 뒤로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 말도 안 돼.‥…”
사람이 대체 어떻게 저 큰 배를 혼자 밀어 낸단 말인가? 이건 단순히 무학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오오오오오오!"
그 순간 혜연이 사자와도 같은 포효를 내지르더니 단숨에 배를 완전히 밀어 냈다. 모래톱 밖으로 훅 밀려 나간 배가 수면을 철썩 치며 크게 출렁였다.
"됐다!"
"해, 해냈어!"
"최고다!"
해남의 제자들은 직접 배를 밀기라도 한 것처럼 환호성을 질러 댔다.
"다음!"
"이쪽 배입니다! 이쪽!"
“남은 분들은 당장 배에 오르십시오. 어서!"
"예!"
다른 배에 즉각 달라붙어 밀면서 혜연이 소리쳤다.
“배를 몰아 나가십시오! 지금 당장!"
"돛을 펼쳐라!”
“손이 비는 이들은 내려가서 노를 잡아!"
해안에 걸쳐져 있던 배들이 드넓은 바다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