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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34화 (1,235/1,567)

1234화. 그렇다는데? (4)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햇살은 부드럽게 드리워져 있고, 갈매기는 한가롭게 울어 댄다. 그야말로 평화롭다는 말이 어울⋯⋯.

“푸하아아아아앗!”

지옥에서 막 달아난 듯한 얼굴들이 그 평화를 깨고 튀어 오르듯 수면으로 솟구쳤다.

“케엑! 켁! 케헤헥!”

코와 입에서 물을 줄줄 뿜으며 괴로워하던 당패가 눈을 부라렸다.

“아니, 왜 갑자기 사람을 물 안으로 밀어 넣고 난리입니까! 왜!”

“혀, 형님. 일단 진정 좀⋯⋯.”

“진정하게 생겼냐? 진정? 뒈질 뻔했는데!”

죽어라 자맥질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을 내리눌렀으니 놀랄 만도 하다.

하지만 청명의 패악질을 눈으로 보기만 했지 제대로 겪어 본 적이 없었던 당패와는 달리, 오검은 강제로 잠수하는 꼴이 되었음에도 희희낙락했다.

“사형! 사형! 방금 그 커다란 물고기 보셨습니까?”

“봤다! 사람만 하던데?”

“그게 혹시 고래인가 뭔가 하는 것 아닙니까? 우와! 저 진짜 저런 거 처음 봅니다.”

“다시 가 볼까?”

“만져 보고 싶던데⋯⋯.”

사질들의 천진난만한 대화에, 백천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거 상어야, 이 미친 놈들아.’

만지다가 손모가지 날아가는겨.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질들에게 세상의 냉엄한 현실을 알려 줄까 고민하던 백천은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발밑에 상어가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

설사 공격을 받는다고 해도 그 정도에 죽을 놈들은 아니니⋯⋯.

“와! 이쪽으로 온다! 뭐가 삐죽이 나와 있는데? 쓰다듬어 볼까요?”

“그쪽으로 가지 마, 이 새끼들아!”

백천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조걸과 윤종이 시무룩해졌다.

“사숙은 왜 화를 내십니까?”

“사숙은 동물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잖느냐.”

“아, 그래요?”

“백아도 싫어하시잖아.”

“⋯⋯그건 그냥 백아한테 묘한 경쟁의식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같은 백씨고, 같은 백자 배고.”

“내 생각에는 그거보다 그냥 옷에 털 묻어서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 깔끔병이 있으시잖아.”

아니야! 다 틀렸다고, 이 미친 놈들아!

백천이 억울한 누명에 속앓이할 때, 그런 그의 속내에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이들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그새 생각보다 멀리 왔네요, 사고.”

“응. 생각보다.”

“이러면 정말 금방 가겠는데요?”

유이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문파 사람들이야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애초에 화산 사람들은 자맥질에 익숙하다. 자고로 검수란 공중에서도, 물속에서도, 심지어는 불 속에서도 검을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청명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화산의 제자들은 온갖 상황에서 검술을 연마해 왔다.

그나마 불 속에서도 검을 휘두를 줄 알아야 한다며 그들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으려 했던 청명의 수작질은 분기탱천한 현종의 이단옆차기로 무력화되었지만 말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청명은 ‘나중에 화공에 당할 수도 있는데, 미리미리 찜질 좀 해 놔야 하는데.’라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 혹독한 시간 덕분에 화산의 제자들이라면 이 정도 거리는 얼마든지 헤엄쳐 갈 수 있었다.

예상보다 살짝 높은 파도가 좀 거슬리기는 하지만, 장강에서도 적당한 파도는 경험을 해 봤으니 이 정도야 뭐⋯⋯.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가시죠.”

“이 속도면 해 지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겠는데?”

남궁도위가 높은 의욕을 보이자 당패가 피식 웃었다.

“해 지기 전이라니. 벌써 해가 반쯤 졌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해가 지다니요? 남해는 해가 짧기라도 합니까?”

“응? 아니지. 내가 알기로는 여기가 오히려 낮이 조금 더 긴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데 왜 해가 벌써 집니까? 시간상으로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이제 정오나 됐을겁니다.”

“그, 그래? 그럼 왜 이리 어두컴컴한 것이냐?”

“어두컴컴하다뇨. 이렇게 밝⋯⋯.”

남궁도위가 금세 입을 다물었다.

“⋯⋯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의 여름날 같았는데, 지금은 정말 당패의 말처럼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아니, 갑자기 왜 이렇게 어둡⋯⋯.”

그 순간.

쿠르르르르릉!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에, 모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몰려오는 커다란 먹구름이 그제야 보였다.

“⋯⋯시커멓네.”

“북해에서는 눈보라가 신기하더니, 여기서는 또 뭔 놈의 구름이 저렇게 딱 선 그은 듯이 선명하게 밀려오냐.”

“이것도 나름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하. 그러니⋯⋯.”

쿠르르르르르르르릉!

그 순간 모두는 보았다.

바다 위로 드리운, 그린 듯한 시커먼 뇌운에서 말 그대로 백색의 섬광이 연이어 작렬하는 모습을 말이다.

순간 모두가 침묵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남궁도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와⋯⋯. 죽인다.”

여러 의미로 죽여주는 광경이었다.

“태풍 같죠?”

“내가 보기엔 폭풍 같군.”

“뭐 다를 것 있나?”

“확실히 그게 그거긴 하죠.”

콰아아아아아!

그 순간 맹렬한 바람과 함께 밀려온 거센 파도가 그들을 한 번 휩쓸고 지나갔다. 그 순간 그곳의 모두가 세 살 시절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무등을 탄 심정으로 모두가 어색하게 깔깔 웃었다.

콰르르르릉!

벼락과 강풍이 동시에 밀려들고, 머리 위로는 집채만 한 파도가 솟구쳤다. 조걸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엿 됐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콰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

밀려오는 해일이 사람을 종잇장처럼 들었다 놓았다. 단번에 몇여 장 솟구쳤던 이들이 이내 저 아래로 순식간에 처박혔다.

“주, 죽는다! 죽는다고오오오오!”

조걸이 눈을 까뒤집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 악명 높은 화산에서 오래도록 단련한 검수다. 눈앞에 수천의 적이 몰려온다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달려들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또라⋯⋯. 아니, 용기 있는 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적이 있을 때의 이야기고.

“아악! 사수우우우욱! 죽는다니까⋯⋯. 꾸르르르륵!”

머리 위로 몇 장이 넘는 파도가 덮쳐오는 상황에서 대체 검으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그들의 무학이 신화경에 올라 일 검으로 수십 장의 파도를 베어 낼 수 있다고 해도, 바다의 입장에서는 ‘예. 그럼 다음 파도 갑니다.’라고 비웃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닥치고 헤엄을 치라고! 입만 놀리지 말고!"

“파도가 이렇게 치는데 어떻게 헤엄을 칩니까!”

그 순간 백천이 눈을 부릅떴다.

“파도고 나발이고, 우리는 화산의 제자다! 이겨 내면 그만이야!”

“우리는 도사잖아요!”

“그게 왜?”

“자연에 순응하는 게 도사지! 대체 어느 도문에서 자연에 저항하라고 가르칩니까!”

“그럼 뒈지든가!”

“그걸 말이라⋯⋯.”

그 순간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백색 뇌전이 내리꽂혔다.

쿠르르르르르르릉! 콰쾅!

조금 뒤이어 터진 뇌성벽력에 모두가 입을 쩌억 벌렸다.

“와⋯⋯. 개 빠르네.”

“앞으로 내 앞에서 벼락같은 검이 어쩌고 하는 새끼 있으면 조동아리를 찢어 버린다."

“⋯⋯무릇 자연이란 무엇보다 위대하고, 모든 순환의⋯⋯.”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옵니까? 예?”

모두 몸이 짜릿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눈앞에서 벼락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저런 것에 직격당하면 천하제일의 검수니, 전대미문의 마인이니 할 것 없이 모조리 황천행이다.

“도, 돌아가자니까요, 사숙!”

“⋯⋯아니.”

“이대로 가면 뒈지기밖에 더 합니까? 지금이라도 빨리 해안으로 물러나서 태풍이 가라앉으면 그때 돌아와야 한다니까!”

“알겠는데⋯⋯.”

“해남이고 나발이고! 우리가 살아야 쟤들도 사는 거지! 사패련이 아니라 장일소가 직접 왔어도 이 태풍 보면, ‘흐음. 일단 태풍 그칠 때까지 술이나 퍼먹자꾸나!’ 하겠죠! 그러니까 우리도 나중에 와도 되잖아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인마!”

“그럼 뭐가 문젠데요?”

“⋯⋯돌아가는 것도 이제 쉽질 않으니 그게 문제지.”

“어?”

순간 당황한 조걸이 떨리는 눈으로 지나온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 아주 머얼리 떨어진 육지가 보였다.

“⋯⋯.”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죽는 건 매한가지야.”

“⋯⋯한 많은 인생.”

뒈질 때도 참 기깔나게 뒈지네.

“그러니 전진한다!”

백천의 눈에 광기가 스쳤다. 하지만 그 눈이 채 광망을 뿜어내기도 전에 밀려온 바닷물이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꼬륵!”

“⋯⋯잘한다.”

콰르르르르릉!

콰르르르르르르릉!

백색 뇌전이 연이어 내리꽂혔다.

이쯤 되면 엄살이니 아니니를 따질 때가 아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사람을 휘두르는 급류도, 집채만 한 크기로 머리 위를 덮쳐오는 파도도 무섭다.

이런 걸 다 어찌해 본다고 쳐도, 눈 한 번 깜빡하는 순간에도 몇 번이나 내리치는 벼락만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진짜 죽는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모두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명아아아아아아아!”

“야 이 새끼야아아아!”

“어떻게 좀 해 봐!”

청명이 한심하다는 듯 모두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것들은 내가 무슨 요술 주머니인 줄 아나. 태풍이 오는 걸 나보고 뭘 어쩌라고?”

“네가 출발하자고 했잖아!”

“네가 헤엄치자고 했고!”

“반나절이면 도착한다며, 이 새끼야! 도착은 하겠지. 도착하는 데가 황천이라 그렇지!”

“아이고, 장문인⋯⋯. 제자는 여기서 갑니다!”

“⋯⋯아빠.”

“사고, 울지 말아요!”

반쯤 정신이 나간 이들을 물끄러미 보던 청명이 혀를 찼다.

“대 화산의⋯⋯. 아니, 대 천우맹의 문도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겁은 많아서는. 그러고도 너희들이 일문의 문주고, 한 문파의 장문대리⋯⋯.”

콰르르르르르릉!

“아, 따거!”

고작 십여 장 앞에 꽂힌 뇌전에, 청명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거봐, 이 새끼야!”

“이거 어쩔 거야?”

“여하튼 이 새끼들은. 머리는 도관 걸이로 가지고 다니나.”

청명이 피식 웃으며 당당하게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모두 잠수하십시오!”

“⋯⋯예?”

청명은 살짝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임소병이 시퍼레진 입술로 다시 한번 말했다.

“잠수하십시오! 밑으로 몇 장만 잠수하면 그냥 잔잔한 바다일 뿐입니다. 벼락이 친다고 해도 그 밑까지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오!”

“역시 천우맹의 군사!”

“이야⋯⋯. 저 양반이 멋있어 보일 때가 있네. 얼굴도 하얗⋯⋯. 괜찮으세요?”

거친 물살에 얼굴을 직격당한 임소병이 힘없이 웃었다.

“하하. 저는 괜찮……. 쿨럭! 쿨럭! 괜……. 쿨럭! 우웨에에엑!”

“⋯⋯와 입에서 피가 샘물처럼 나오네.”

“저쯤 되면 안 죽는 게 이상한데?”

“저기 머리 위로 희끄무레한 거 빠져나가는 것 같은데.”

“사형! 사형! 제문 좀 읊어 봐요! 어떡해…….”

쿠르르르르릉!

그때 하늘이 다시 한번 크게 울었다. 모두가 황급히 시선을 교환한 뒤 외쳤다.

“들어가!”

“잠수해!”

“으아아아아아!”

“저, 저는 심해 공포증이 좀⋯⋯.”

“이 인간은 고소공포증도 있다더니! 닥치고 들어가요!”

길게 숨을 들이쉰 천우맹 일행들이 아래로 또 아래로 깊이 파고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

그들이 모습을 감춘 수면 위를 집채만 한 파도가 맹렬히 휩쓸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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