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5화. 그렇다는데? (5)
해남의 날씨는 변덕스럽다. 해가 뜨겁게 내리쬐는 시기가 되면 시시때때로 강한 비바람과 태풍이 몰아치고는 한다. 그러다 보니 해남 땅에 뿌리내려 살아가는 이들은 웬만한 태풍은 그러려니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전각 창을 통해 몰아치는 태풍을 바라보는 해남 장문인 금양백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내려앉아 있었다.
‘몰아치는군.’
머릿속이 눈앞의 풍경만큼이나 혼란했다. 대해남파의 수장으로서 모두를 이끌어야 하건만, 지금 그의 어깨에 올려진 짐은 감당하기가 힘들 만큼 무겁게만 느껴졌다.
‘차라리⋯⋯.’
그는 이리저리 뒤흔들리는 나무들을 보다 그만 헛헛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차라리 이 태풍에 모든 것이 휩쓸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니, 한 문파의 장문이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다.
‘나도 약해졌구나.’
아니, 어쩌면 그가 약해진 게 아니라 그가 상대해야 하는 이들이 너무도 강대한 것이리라. 그게 사패련이 되었든, 아니면 비정한 강호가 되었든.
똑똑.그때 바람 소리를 뚫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문인. 임겸입니다.”
“들어오너라.”
문이 살짝 열리며 방 안으로 바람이 몰아친다. 그 바람에 벽을 장식하고 있던 족자 하나가 치솟았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금양백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족자에 가 닿았다. 정확히는 거기에 쓰인 문구로 말이다.
의기여해 협의여랑(意氣如海 俠義如浪). 의기는 바다와 같고, 협의는 파도와 같다. 해남을 상징하는 여덟 글자다.
금양백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바람이 거셉니다, 장문인.”
임겸이 열린 창을 보며 말하자 금양백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놔두거라. 내 속만큼 어지럽지는 않을 것이다.”
“⋯⋯.”
“어찌되었느냐?”
“우선⋯⋯.”
임겸이 짧게 심호흡하고는 입을 열었다.
“분부하신 대로 어린 제자들을 사가로 내보내려 했습니다만⋯⋯.”
“음.”
“이행하려는 찰나 태풍이 불어, 우선은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만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구나.”
금양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큰 장정들이라면 모를까. 작은 발로 걸어야 하는 아이들이라면 이 비바람에 내보내는 것도 할 짓은 아니었다. 어차피 태풍이 부는 동안은 적이 침습해 올 일이 없을 테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아이들은 순순히 말을 듣더냐.”
“저항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만, 어찌하겠습니까? 혼을 내서라도 내보내야지요.”
“⋯⋯잘했다.”
“그리고⋯⋯.”
임겸이 슬쩍 금양백의 눈치를 살피다 말을 꺼냈다.
“말씀하신 파문은⋯⋯.”
임겸의 표정을 본 금양백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주저할 것 없다. 시간을 아끼자꾸나.”
“⋯⋯예. 본산에 있는 장로들을 포함한 진산제자 사백일흔여섯 중, 파문을 요청한 이는 일흔여덟입니다.”
금양백이 말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찬 탓인지, 그의 낯은 한층 창백해 보였다.
“⋯⋯생각보다 적구나.”
“⋯⋯.”
“아이들이 본문을 위하는 마음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깊은 것이더냐?”
“그게⋯⋯.”
임겸은 살짝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금양백이 눈빛으로 재촉하니 결국 이기지 못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장문인께서 하신 말씀이 꼭 틀린 것은 아니겠으나, 제자들 사이에서는 어차피 파문을 받고 사가로 내려가 봐야 사패련이 인정해 주지 않을 거란 생각이 강한 듯했습니다.”
“⋯⋯.”
“그럼 그저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하나하나 척살당할 뿐이니,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곳에서 항전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금양백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래. 그도 그렇겠구나.”
“파문을 원하는 제자들은 그렇다 해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쪽을 택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두 사람은 굳이 파문을 원하는 이들의 충심과 협심을 논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는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해남에 대한 마음이 부족하다면, 그건 지금껏 해남을 잘못 이끌어 온 문주와 장로들의 탓이고, 그들에게 협심이 부족한 것 또한 지금껏 제자들에게 협의에 대한 본보기를 보여 주지 못한 문주와 장로들 탓이다.
어떻게 비난하든 결국에는 제 얼굴에 침 뱉는 꼴밖에 되지 않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파문식은⋯⋯. 예, 파문식은 태풍이 지나가면 바로 이행하기로 했습니다.”
“파문식?”
금양백이 피식 자조했다. 이제 와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되었다. 그냥 내보내 주거라. 문적에서 이름 하나 지우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장문인, 그게 아니라⋯⋯.”
“음?”
금양백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임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제가 파문식을 시행하겠다 전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파문식을 원하고 있습니다.”
“⋯⋯뭐라 했느냐?”
“그⋯⋯ 사패련이 추궁할 때, 확실한 방패막이가 필요한 모양입니다.”
그 순간 금양백의 얼굴에 뭐라 말할 수 없는 허탈함이 번졌다.
“하하⋯⋯. 하⋯⋯.”
해가 머리 꼭대기로 내리쬘 때는 그림자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해남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파의 위세가 한창 대단할 때는 어떠한 문제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 순간, 금양백은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선대가 가꾼 문파를 이어받아 최선을 다해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문파에 암운이 밀어닥치자, 어쩔 수 없이 알게 되었다. 그동안 그가 믿어 왔던 것들이 그저 허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 해 줘야겠지.”
“장문인⋯⋯.”
“문파를 떠나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인데, 그것 하나 해 주지 못해서야 되겠느냐?”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금양백을 보며 임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너무한 요구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쩌겠느냐? 그들을 그리 가르친 게 우리일진대.”
“하지만⋯⋯.”
“그만하자꾸나.”
금양백이 지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임 장로.”
“예, 장문인.”
“외부에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는가?”
“⋯⋯태풍 때문인지 아직은⋯⋯.”
금양백은 또다시 자조했다.
태풍이 불어온 지 몇 시진이나 되었다고, 저 태풍 때문에 올 연통이 오지 않는단 말인가? 결국 애초에 오지 않을 연통이었단 뜻이다.
그의 시선은 다시 맥없이 창밖을 향했다. 저 하늘을 가득 채운 검은 암운이 지금 해남이 처한 상황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태풍은 언제고 그치고, 다시 해가 뜨기 마련이지. 하지만⋯⋯.’
해남에도 다시 해가 뜨는 날이 오려는가?
“장문인⋯⋯.”
그때 임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결단이라니?”
“자양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대로 버티고 있는다 해서 답이 나오는 게 아니잖습니까? 차라리⋯⋯.”
“그럼 버티지 않으면 답이 나온단 말이더냐?”
금양백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제자들을 이끌고 해남을 떠나는 걸 말하는 것이겠지.”
“예, 장문인. 사패련도 양민들에게는 딱히 손을 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남은 이들에게 큰 문제가 닥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내가 그 생각을 해 보지 않았을 것 같으냐?”
“⋯⋯.”
“말하지 않았더냐. 우리가 이 섬을 빠져나가기를 가장 바라는 이는 다름 아닌 사패련이라고. 이 섬을 떠나 우리가 갈 곳이라고는 저 강남 땅과 임읍 땅뿐이다. 그중 우리에게 우호적인 곳이 하나라도 있더냐?”
“그건⋯⋯.”
금양백이 고개를 내저었다.
“살고 죽고를 선택하는 게 아니다. 어디에서 죽는가를 선택하는 것이지. 목숨줄을 조금이나마 더 부여잡아 보겠답시고 뿌리내린 곳을 떠나 죽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은 아니다.”
“장문인⋯⋯.”
금양백이 고개를 들어 임겸을 빤히 보았다.
“임 장로.”
“예, 장문인.”
“정말 방법을 찾고 싶은가?”
순간 임겸의 눈에 의혹이 차올랐다. 살짝 바뀐 금양백의 말투 때문에 묘하게 신경이 곤두섰다.
“⋯⋯방도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방도라⋯⋯. 그래, 있지. 방도가 하나 있긴 있네.”
“무슨 방도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해남이라는 이름이 존속하는 것과 이곳의 제자들이 그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굴욕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임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서, 설마⋯⋯.”
“방도야 있지. 해남이라는 이름을 존속시키다 못해 천하에 널리 떨칠 방법이.”
금양백이 자신을 스스로 조롱하듯 웃었다.
“사패련에 항복하고, 장일소의 발아래에 머리를 조아리면 적어도 문도들은 모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장문인!”
임겸의 목소리가 문밖의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터져 나왔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패군은 받아들이겠지. 아니,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걸세. 지금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구파일방을 발아래에 둔 사파의 수괴가 될 수 있을 테니. 고이고이 모셔 우대해 주려 하겠지.”
“그만하십시오!”
임겸이 핏발 선 눈으로 금양백을 쏘아봤다.
“아무리 농처럼 던진 말씀이라고는 하나, 대 해남파의 장문인이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 어찌 그런 패역무도한 말을 입에 담으신단 말입니까?”
“패역무도라.”
금양백이 실소했다.
“뭐가 그리 패역무도한가? 남이 피를 흘려 이뤄 낸 것을 받아 즐기고, 은인이 누려야 할 것을 훔쳐 누린 이들이 뭐가 그리 당당해 패역무도라는 말을 입에 담는가?”
“장문인!”
“⋯⋯애초에 우린 사파와 그리 다를 것도 없었지. 그저 아닌 척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금양백이 의자에 힘없이 늘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저 한 번쯤은 입으로 내뱉어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게 아니면 그저 받아들이세나.”
“⋯⋯.”
“도와주는 이가 없다면, 우리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네. 상대는 저 장일소와 사패련, 그리고 독심나찰 호가명일세. 저 소림과 하북조차 농락한 이들을 상대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저들은 우리의 움직임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덫을 놓아 뒀을 걸세.”
임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하겠는가⋯⋯.”
쿠르르릉!
힘없는 중얼거림에 이어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믿었었지.”
“⋯⋯.”
“높이 오르고, 명성을 얻고, 칭송을 듣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잘해 내고 있다고 믿었다. 정말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껍데기만 남은 문파에 제아무리 대단한 찬사가 쏟아진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가?”
“⋯⋯.”
“본분을 다했어야 하는 것을. 해남이 왜 해남인지를 잊지 않아야 했던 것을. 휘둘리지 말아야 할 것에 휘둘린 대가를 이제 치르는 것뿐이네. 그저⋯⋯ 선대와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 대가를 함께 치를 제자들에게 미안할 뿐.”
“장문인⋯⋯.”
금양백의 시선이 저 먼 곳을 향했다.
저 바다 건너에 있는 땅, 그곳 어딘가에 그들이 있을 것이다.
‘한 번쯤은 직접 뵙고 사죄를 드렸어야 했는데.’
이제 그럴 수 없으니 가슴이 아플 뿐이다. 그저 그의 마음이 언젠가는 전해지길 바랄⋯⋯.
콰아아아앙!
그 순간 문이 부서질 듯 격하게 열렸다.
“장문이이이이이인!”
이내 홀딱 젖은 장로, 자양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사패련? 사패련이 온 것이냐?”
사색이 된 두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그게 아니옵고⋯⋯!”
“⋯⋯그럼?”
자양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와 보셔야겠습니다! 손님!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금양백이 되물으려는데 자양이 다시 외쳤다.
“화, 화, 화산!”
“⋯⋯응?”
거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산이 왔습니다!”
- 2022년 05월 1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