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3화. 그렇다는데? (3)
“다, 단주님!”
“왜 호들갑이냐?”
“구, 군사께서 도착하셨답니다!”
“뭐? 벌써?”
만인방 동심단의 단주, 곽보(郭普)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틀은 더 지나야 도착할 예정이 아니었더냐?”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곽보는 황급히 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해남으로 향할 배를 다 준비하지 못했는데 호가명이 벌써 도착해 버린 것이다. 예정된 날짜보다 이틀이나 앞당겨서 말이다.
“이, 이 일을 어떻게⋯⋯.”
아직도 한창 건조되고 있는 선박들을 망연히 바라보던 곽보가 불현듯 화들짝 놀라 외쳤다.
“이, 이럴 때가 아니지! 군사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느냐?”
“조금 전에 외곽에 진입하셨다고 합니다!”
“도열!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도열해라! 군사께서 오신다! 뭣들 하느냐, 이 빌어먹을 놈들아! 당장 도열하라니까!”
군사라는 말을 들은 이들이 기겁하며 곽보가 있는 쪽으로 허둥지둥 달려왔다. 주위가 술렁거리니 일하고 있던 인부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곽보 쪽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그대로 일을 하면 된다! 손을 멈추지 마라!”
“예.”
빠르게 모여든 만인방의 무사들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줄을 맞췄다. 시선은 이곳으로 이어지는 숲길 쪽으로 고정되었다.
또르륵.
몇몇 이들의 얼굴을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뜨거운 햇볕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디 동심단은 만인방의 운영을 담당하는 곳. 호가명의 수족 역할을 하는 군사전과 더불어 호가명의 직속 단체라 해도 무방한 곳이다.
직속상관이 예정보다 일찍 갑작스럽게 현장에 들이닥치는 꼴이니 긴장하는 것도 당연했다.
“또, 똑바로 서라!”
“예!”
누군가가 마른침 넘기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잠시 후, 앞쪽 수풀 사이로 난 길을 통해 한 무리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 저벅. 저벅.
무력대를 이끌고 나타난 호가명은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해안까지 걸어왔다.
죽음과도 같은 정적 속에, 호가명의 시선이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싸늘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은 해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군사를 뵙습니다!”
“군사를 뵙습니다!”
도열해 있던 동심단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만인방. 이제는 이 광동뿐만 아니라, 강남 전체를 지배하는 가공할 세력.
그 내부에서도 무릎을 꿇는 예를 받을 수 있는 이는 오직 둘. 방주인 장일소와 군사인 호가명뿐이다.
만인방 내에서 호가명이 얼마나 확고한 입지를 지녔는지는 이 광경만 봐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곽보는 납작 엎드린 채로 슬쩍 호가명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싸늘한 표정에서 생각을 읽어 내기란 만만치 않았다.
“단주.”
그때 곽보의 허를 찌르듯 호가명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움찔한 곽보는 얼른 더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해안의 하얀 모래가 식은땀으로 젖은 그의 이마에 잔뜩 붙었다.
“보고해라.”
“예, 군사! 해, 해남으로 가는 배를 징발하는 일은 모두 끝마쳤고, 지금은 지시하신 대로 추가적인 배를 건조하는 중입니다. 다만⋯⋯ 최근 날씨가 좋지 않아 배의 건조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곽보는 최대한 고개를 그대로 둔 채 눈알만 위로 치켜떠 호가명의 표정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러다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 이틀! 앞으로 이틀이면 건조가 완료될 것입니다!”
사박.
그때, 귓가에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백사장 모래를 밟는 발소리라는 걸 알아챈 곽보는 등을 둥글게 말며 머리를 더 깊게 처박았다.
사박.
그의 머리 바로 앞에서 호가명의 발이 멈추었다.
곽보의 등허리며 얼굴이 온통 땀으로 젖어들었다.
“이틀이라고 했나?”
곽보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떨며 고개를 들었다. 호가명의 서늘한 시선과 마주하자 몸이 꿰뚫리는 듯했다.
“말을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군.”
“구, 군사⋯⋯.”
“다시 묻지, 단주. 내가 뭐라 지시를 했지?”
“군사께선⋯⋯ 이틀 후까지 병력을 이끌고 방으로 오실 터이니, 그때까지 해남으로의 출진 준비를 모두 마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분명 그리 말했지.”
곽보가 마른침을 삼킬 때 그의 귓가에 다시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이 나의 도착에 맞춰서 배의 건조를 마무리하라는 뜻이었나?”
“⋯⋯.”
“아무래도 련주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방이 꽤 느슨해진 모양이로군. 시간에 맞춰 제 일만 끝내면 문제가 없다는 안일한 생각이 방의 단주라는 놈 머리에 들어찬 걸 보니 말이야.”
“주, 죽여 주십시오, 군사!”
곽보가 머리를 짓찧으며 조아렸다.
‘만인방’이라는 말을 들으면 세상 사람들은 으레 장일소의 이름과 그의 잔혹함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작 만인방 내에서 가장 두려움을 받는 이는 사실 장일소가 아니다. 일반적인 방도들에게 장일소란 구름 위에 떠 있는 존재이자 선망의 대상이지, 그 피부에 와 닿는 존재는 아니었다.
더욱이 장일소는 세세한 일에는 딱히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방에서 벌어지는 웬만한 일은 그에게 보고되지도 않는다. 그런 그를 대신하여 방도들을 관리하는 이가 바로 호가명이었다.
다시 말해, 사파답지 않게 더없이 철두철미한 만인방의 체계를 만들어 낸 이는 장일소라기보다는 오히려 호가명 쪽인 셈이다.
만인방의 적은 장일소를 두려워하지만, 만인방의 방도는 호가명을 두려워한다. 그들에게 벌을 내리는 이는 적도, 장일소도 아닌 호가명이니까.
“말해 보지.”
그때 호가명의 목소리가 다시 곽보의 귀를 파고들었다.
“상부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단주에게 어떤 벌이 적당할까?”
곽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앞에 선 이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변명을 시도해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아는 호가명은 변명이라는 게 통할 만한 이가 아니었다.호가명이 내리는 모든 명은 이행하는 이의 능력, 처한 상황, 심지어는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고려한 끝에 나온 것. 그렇기에 어떤 이유도 변명이 될 수 없다.
“바, 방의 방규에 따르면⋯⋯ 느, 능력이 부족하여 작은 명을 이행하지 못한 이에게는 직위의 강등과⋯⋯.”
“능력?”
그 순간 한층 더 가라앉은 호가명의 목소리가 곽보의 심장을 옥죄었다.
“능력이 부족한 이가 왜 단주 자리에 앉아 있지?”
“구, 군사⋯⋯.”
“그리고 그게 정말 능력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인가?”
곽보는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방도들은 방을 위해 타지로 가 적과 대치하고 있는데, 후방에 남은 이는 왕이라도 된 것처럼 즐기고 있었군. 마음만 먹었다면 며칠 전에는 끝났을 일을 아직 붙들고 말이야.”
“⋯⋯.”
“가져와라.”
“예!”
호가명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쪽에 있던 군사전의 문사가 품 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내밀었다.
호가명은 무심한 손길로 그걸 받아 펼쳤다. 말없이 내용을 확인한 그가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곽보 앞에 툭 내던졌다.
“확인해라.”
“이, 이게⋯⋯.”
호가명이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내려다보자 곽보는 두루마리를 주워 들고 떨리는 눈으로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이내 곽보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두루마리에는 장일소와 호가명이 자리를 비운 동안 곽보가 어떤 일들을 했는지가 일 단위로 세세히 적혀 있었다.
‘이, 이게 대체⋯⋯.’
하루아침에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거꾸로 말하면 호가명은 그 급박한 상황에 장강으로 향하면서도 후방에 남은 곽보에게 감시를 붙여 두었다는 뜻이다.
“할 말은?”
“구, 군사⋯⋯.”
“재미가 좋았나?”
호가명의 입가가 살짝 뒤틀렸다. 다른 이들에게는 얼굴을 찌푸린 것처럼 보이겠으나, 호가명에게는 이게 미소였다.
“방도들이 전방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후방에 남은 이가 지원에 전력을 다하지는 못할망정 기루나 드나들고, 흥청망청 잘도 놀아 댔군.”
“사, 살려 주십시오, 군사!”
곽보가 제 이마를 땅에 세게 내리찧었다. 변명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그나마 목숨이라도 보전하려면 모든 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자비를 구걸하는 수밖에 없다.
호가명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얼굴로 곽보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너 같은 놈을 딱히 싫어하지는 않는다.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놈에게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지나친 욕심이지.”
“⋯⋯.”
“하지만 나 역시 만인방의 군사. 너도 알다시피 방주께서는 배에 기름이 낀 돼지 놈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시지. 특히나 제 동료들의 피를 빨아먹고 제 배를 채우는 돼지를 말이야.”
“구, 군⋯⋯.”
“장간(長干).”
“예! 군사.”
“이자의 무공을 금제하고 매질한 뒤, 여섯 달간 노역에 처한다.”
“예!”
“그간 모은 재산은 모두 압류하고.”
“예!”
곽보가 납작 엎드린 채 머리를 짓찧으며 외쳤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군사!”
어찌 보면 가혹한 처벌이다. 일을 제때 끝마치지 못한 것에 대한 대가로는 말이다.
그럼에도 곽보는 그저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저 호가명이 내린 것치고는 더없이 자비로운 처분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안도는 이어진 호가명의 목소리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노역이 끝나고 복귀시킬 때, 저놈의 쓸모없는 다리의 힘줄을 끊어 버려라.”
“구, 군사!”
청천벽력 같은 말에, 곽보가 눈을 부릅뜨고 호가명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호가명이 차게 말했다.
“쓸데없이 기력이 남으니 헛짓이나 하고 다니는 거겠지. 제 발로 걸어 다니지 못한다면 할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구, 군사! 군사! 잘못했습니다! 제, 제발! 그것만은⋯⋯! 군사!”
“이행하라.”
“예.”
호가명의 뒤쪽에 서 있던 이들이 절규하는 곽보를 잡아 끌고 갔다.
처절한 비명이 해안에 울려 퍼졌지만, 호가명은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부단주가 누구지?”
“저, 저입니다, 군사.”
“선박의 건조를 차질 없이 마무리해라.”
“예! 이, 이틀 뒤까지는⋯⋯.”
“내 말을 이해 못 하는군. 제대로 건조하라는 말이다. 보나 마나 시간만 맞춘다고 대충 만들어 뒀겠지. 문제가 없는지 처음부터 다시 점검하고 제대로 된 계획을 내게 가져와라. 만약 배에 문제가 생긴다면 너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꼴이 될 테니까.”
“며, 명심하겠습니다.”
호가명의 시선이 인부들에게로 슬쩍 가 닿았다. 망치질하는 움직임에 긴장감이 바짝 서려 있었다.
“방으로 간다.”
“예!”
호가명이 몸을 돌리자 장간이 재게 따라붙었다.
“군사. 본보기를 보이시려거든 그냥 죽여 버리는 쪽이⋯⋯.”
“필요 없다.”
호가명은 끝까지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잘랐다.
“쓸데가 어디에라도 있는 놈이라면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 죽여 없애는 건 잠시 잠깐 통쾌할 뿐이다. 중요한 건, 저런 놈조차도 제대로 활용해서 방에 이득이 되게끔 하는 것이다.”
“⋯⋯고견을 이해 못 한 저의 무지를 탓해 주십시오.”
호가명은 대답 없이 발을 옮겼다.
‘방주께서 후방에 신경 쓰시는 이유를 알겠군.’
장일소가 어떤 사람이고, 호가명이 어떤 사람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방의 단주조차도 두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나자마자 패악을 저지른다. 그러니 그 아래에 있는 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저 해남이 조금만 일을 벌여도 동조하거나, 그 기회를 틈타 제 이득을 취하려 하는 이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러니 확실히 정리해야지.’
호가명은 슬쩍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있는 해남도를 바라보았다.
“음?”
“⋯⋯왜 그러십니까?”
한참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를 살피던 호가명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니다. 물고기겠지.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모양이다.”
“예, 군사.”
“인부들을 물려라.”
“⋯⋯예?”
“곧 태풍이 몰아칠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장간이 바다 저 먼 곳을 내다보았다. 과연, 그새 파도가 꽤 높아졌고 저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본디 남해의 날씨는 변덕스럽기 이를 데 없다.
“일정이 조금 지체될 수도 있겠군요.”
“예상했던 변수다.”
호가명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건조하고 있던 선박들을 제대로 관리해라. 아무래도 예사 태풍이 아닌 것 같으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쿠르르릉!
저 멀리서 천둥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호가명이 피식 웃었다.
“해남의 입장에서는 저 태풍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야겠지.”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지독히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