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9화. 앞으로도 걸어갈 길입니다.(4)
법정의 멍한 눈길이 오래도록 혜연에게로 떨어지지 않았다.
혜연은 굳이 그 시선을 마주 보지 않았다. 두렵거나 껄끄러워서가 아니다. 그저 지금 그가 법정을 마주 보는 것이 법정에게 너무도 가혹한 일이 될 걸 알기 때문이었다.
"허……"
잠시 후, 법정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허허…… 허허허허……"
"……"
"허허허허허."
법정은 마침내 시선을 틀어 다른 이들을 흝었다. 모두가 그 두 눈에 확고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법정은 고개를 내젓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제 보니…… 애초에 이건 아무 의미도 없는 자리였구려. 함께할 생각도 없는 이들에게 내가 그저 매달리고 있었을 뿐."
"방장."
"장문대리."
법정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엔 더 이상 적의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대가 이겼소."
법정의 담담한 눈빛에 도대체 무엇이 담겨 있는지 백천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의 논리를 깰 자신이 없소이다. 정론을 있는 그래도 말하는 이를 내가 무슨 수로 이기겠소이까?"
그의 시선이 백천을 넘어 현종에게로 향한다. 복잡하고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현종에게로 말이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안다면 차마 입에도 못담을 말을 당당하게 하는 젊은이들을, 밀려나는 늙은이들이 무슨 수로 감당하겠소?"
"방장. 저희는……"
"장문대리."
다시 백천에게로 향한 법정의 눈빛에선 씁쓸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 고고한 이상이, 그 드높은 협의가, 또 그 흔들림 없는 정론이 언젠가 장문대리의 목을 죄고 화산이라는 문파를 멸망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걸 아셔야 하오."
"……"
"정의를 외치는 이들은 힘 앞에 굴복하고, 자비를 외치는 이들은 악심에 짓밟히고, 협의를 논하는 이들은 협잡에 목이 베이는 곳."
백천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삶이란 고(苦)이고, 세상은 아귀지옥이외다. 그 고고한 이상은 그 지옥을 버티게 할 힘은 될지언정, 그 지옥을 바꿀 힘이 되지는 못하오."
법정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이 어쩐지 부쩍 지쳐 보였다.
"이건 저주도 악담도 아니외다. 그저 사실이 그럴 뿐이외다, 사실이."
백천은 가슴이 짓눌리기라도 한 듯 무거워졌다. 그가 어떻게 모르겠는가? 화산은 이미 충분히 겪어본 일인 것을.
법정이 다시 물었다.
"그걸로 정말 괜찮은 것이오? 거창하게 말했지만, 결국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화산이 가장 앞에서 희생하고, 피를 흘리겠다는 말이지 않소."
"……"
"주변을 아낄 줄 모르는 이가 어찌 천하만민을 생각할 수 있겠냐고 하셨지요? 그럼 거꾸로, 그리 주변을 아끼는 이가 어찌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위해 그 아까운 목숨을 내어 놓으려 하시오. 그 가시밭길을, 그 지옥 같은 길을 협의라는 등불 하나로 밝히며 걸을 수 있겠소이까? 그대의 명을 따르느라 죽은 이들에게 훌륭했다 치하할 수 있겠소이까?"
이는 악감정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법정이라 해서 청운의 꿈을 꾸던 시절이 없었겠는가? 그 가슴 안에 패기를 불태운 적이 없었겠는가? 닳고 싶어서 닳는 이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몸은 늙어 가도 그 가슴만은 뜨겁고 싶은 것이 사람인 것을.
이건 이미 지나온 이가 아직 오지 못한 이에게 건네는 조언이자, 자신이 밟고 되돌아온 가시밭길로 굳이 향하는 후인에게 건네는 우려였다.
하지만 백천이 그 말에 그저 웃고 말았다.
"제 명을 따르다 죽는 이들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이다."
백천이 이번엔 주위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방장, 보이십니까?"
"……"
"방장의 눈에는 저들이 스스로 옳다 여기지 않는 명령을 목숨 걸고 따를 이들로 보이십니까?"
법정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굳은 얼굴로 법정을 바라보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이 있었다.
"장문으로서 제가 할 일은 그저, 저들의 가장 앞에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뿐입니다."
"그대가 직접?"
"예."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법정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문주가 될 이가 가장 위험한 곳에 제 몸을 던지겠다는 겁니까?"
"그러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장문대리……"
"방장. 방장께서는 방장의 자리를 누구도 대신할지 못 할거라 생각하시지요?"
이 물음에 법정이 입을 닫았다.
"다른 문파는 물론이거니와 소림의 제자 중에서도 누구 하나 방장의 자리를 대신할 이가 없으리라 여기실 겁니다. 방장께서 너무도 뛰어나시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아닙니다. 저는 화산의 누구라도 저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지금은 제가 나설 차례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저보다 더 나은 이가 당연하게 제 자리를 물려받을 겁니다."
법정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그런 그를 보며 백천이 미소를 지었다.
"문파란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혼자 할 수 없는 것을 하기 위해, 그리고 평생에 걸쳐 찾아낸 의지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그렇기에 진정으로 뛰어난 장문은……"
백천이 고개를 돌려 현종을 힐끗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후대를 믿을 수 있는 이입니다. 그리고 후대가 더 나은 길로 갈 수 있도록 하는 이입니다."
그 말에 청명의 어께가 살짝 떨렸다.
'장문사형……'
웃고 있는 청문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은 후대와 미래를 위해서라 말하던 모습이 선했다.
"그러니 저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 것입니다. 그로 인해 흘리는 피를 감수할 것입니다. 그 피가, 그 의지가, 그 희생이 화산을 더욱 화산답게 만들 것이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저와 다른 문도들의 행동이 화산이 지금껏 틀리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입니다."
"장문대리."
법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염치 불고하고 하나만 더 묻겠소이다."
"하문하십시오, 방장."
"그 뜻은 잘 알았소. 어째서인지도 이해했소.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만은 도무지 풀리지 않는구려."
"그게 무엇입니까?"
법정이 백천과 현종,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을 그 눈에 담았다.
"화산은 그것으로 괜찮겠소?"
"……"
"그 드높은 의지가, 그 멈출 줄 모르는 협의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왔는지 가장 잘 아는 곳이 화산 아니외까?"
법정이 제차 물었다.
"이번에도 같은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소. 그리고 그 드높은 협의 때문에 오히려 세상이 무너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소이다. 화산은 정말 그래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백천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방장.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화산의 장문대리가 아니라 화산의 이대제자인 백천으로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일개 이대제자로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백천이 심호흡하고는 말을 이었다.
"방장께서 말씀하신 부분은 저를 가장 오랫동안 고민하게 했습니다. 과거와 같이 행동하고 과거와 같은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말입니다."
"……아미타불."
"저 역시 한때는 선대들이 어리석었다고 눈을 흘긴 적도 있었고, 의미 없는 희생을 했다고 화를 낸 적도 있었습니다. 원망이라기보다는 안타까움에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방장. 방장의 말씀대로 강호를 겪어 본 이후에 저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백천이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이 말은 그저 법정에게 하는 대답이 아니라, 이들 모두에게 하는 말이라는 듯.
그러다 고개를 돌려 법정을 똑바로 응시하며 더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장께서는 그분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십니까?"
"……"
"다시 묻겠습니다. 그 목숨으로 협의를 관철하신 분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아니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이 선을 행하는 이유는 그 선이 이들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로 선이기 때문입니다."
"……"
"도가에서도 측음지심을 강요하고, 불가에서도 중생에 대한 자비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 측음지심과 자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 아닙니다. 설사 결과가 좋지 않다 해도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백천의 두 눈은 곧은 의지로 굳건해 보였다.
"방장께서는 불자이시고, 저는 도사입니다. 한데 어째서 우리가 선대를 판단하며 그 결과를 논해야 합니까? 설령 세상 모두가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한다 해도, 적어도 방장과 저희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
"돌아온 결과가 좋지 못했단 이유로 선을 비난한다면, 세상에 선을 행하는 이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선이기 위해 행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일만을 하려 들 것입니다 .그럼 방장의 말대로 인세는 지옥과 다를 바 없어지겠지요. 방장. 방장께서 말씀하신 지옥과도 같은 인세를 만드는 것은 선대입니까? 아니면 저희입니까?"
말없이 백천을 바라보는 법정의 눈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잘못의 대가를 치러야 할 분들은 목숨으로 선을 행하신 선대가 아닙니다. 벌을 받아야 할 이들은 그 선대의 높은 뜻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한 후대이고, 그 드높은 뜻을 묻어 버린 이들입니다. 당금의 강호가 그 선대의 뜻을 이어받아 협의를 실천했다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
"같은 결과를 후회하지 않겠냐고 하셨습니까?"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화산의 선대가 남긴 뜻은 화산이 이어지는 한,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이어질 것입니다. 아마 화산이라는 두 글자가 세상에 남아 있는 한 영원토록 이어지겠지요."
"……장문대리."
"제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저 역시 그분들의 길을 따라, 선대에 부끄럽지 않은 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저 역시 그분들처럼 의지를 관철하여 후대에 이어질 이가 되는 것입니다."
"……"
"제 선택 때문에 세상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하셨지요, 방장. 우리는 이미 마교를 물리쳤습니다. 이미 수도 없는 사파의 발호를 막아 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우리는 또 같은 상황 앞에 섰습니다. 어째서입니까?"
백천의 두 눈에 단호함이 어렸다.
"진정으로 협의를 실천하지 못하고, 선대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한 후인들이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타협하고 또 타협하고, 현실이라는 이름 앞에 주춤하여 물러서기를 반복하면, 언제고 우리는 또 다른 마교와 마주 서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사패련과 칼을 맞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에게 패하겠지요."
"……장문대리."
"제 결론은 하나입니다."
백천이 어깨를 폈다. 그가 이어받은 화산의 의지가 그와 함께했다.
"이 깊은 어리석음을 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배우고 어은 것을 실천하려 합니다. 그게 화산의 이대제자인 제 의지이고, 화산의 장문대리인 제 의지이며, 또한……"
백천이 이 모든 대화를 끝낼 마지막 말을 그 입에 담았다.
"화산의 의지입니다."
모두가 벅찬 얼굴로 백천을 바라보는 와중, 단 한 사람만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청명. 그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