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화. 앞으로도 걸어갈 길입니다. (5) - by. 둔산
옳았는가? 아니면 틀렸는가?
청명에게는 그 판단을 내릴 자격이 없었다. 바로 그 당사자였으니까.
아무리 그가 격하게 청문에게 반발했다고 한들, 당대의 화산이 한 일을 막아 내지 못한 동조자란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렇기에 평할 수 없었다.
한숨 섞인 투정이야 부릴 수 있어도, 그 의기를 폄훼하는 이들에게 화를 낼 수는 있어도, 그 선택이 가져온 고통을 제 삶으로 받아 낸 이들 앞에서 선대가 옳았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뜻을 이어받은 이들이 선대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청명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강요한 적이 없었음에도 말이다.
만약 정말 청문을 비롯한 사형제들이 선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면..... 나날이 드높아져 가는 화산의 위상보다, 홀로 남아 중원을 종횡하고 있는 청명의 활약보다도, 백천의 저 말이 더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그들이 목숨을 던지며 전하려 한 것이 결국 여기까지 이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을 테니까. 자신들의 죽음이 가치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백천이 법정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렇기에 저희는 저희의 길을 가려 합니다, 방장.”
"......"
"물론 방장이 보시기에는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바보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친 그는 법정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방장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미타불.”
법정이 눈을 감고 불호를 외었다. 조금은 길다 싶은 침묵이 이어지고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주변의 다른 문주들을 돌아보았다.
“천우맹의 다른 분들도 뜻이 같으십니까?"
“그렇습니다.”
가장 먼저 대답한 건 당군악이었다. 그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치기 어린 말일지는 모르지만, 화산 장문대리의 말에 틀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 ”
“그리고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건 노회한 이들이 아니라 저런 이들의 결정이겠지요. 세상에 순응한 이들이 보기엔 어리석고 성급하게만 느껴지는 그런 결정 말입니다.”
당군악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 깊어졌다.
“옳은지 그른지를 곧장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제가 현명한 이는 아니나, 적어도 저 선택을 따르는 것에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고 해도 말입니다.”
남궁도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방장.”
“...... 말씀하시오, 소가주.”
“저 역시 선친의 선택이 무조건 옳았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그 선택은 분명 성급했습니다.”
법정이 침중한 표정을 짓는다. 오히려 남궁도위의 표정이 담담하였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선친이 그 가슴에 품었던 의기마저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의기를 잃는 순간 남궁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 ”
“그렇기에 남궁세가 역시 화산과 그 뜻을 함께하려 합니다. 남궁세가가 창천제일세가라는 말을 되찾기 위해서 가장 잃어서는 안 될 것이 의기이기 때문입니다.”
법정의 입에 미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 말을 인정해서가 아니다. 그저 자신이 늙었다는 게 새삼스레 실감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공감하기 어렵다. 그저 성급하게만 보인다. 세상이란 의욕만으로 뚫고 나갈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잖은가? 하지만.......
'나 역시 그랬겠지.'
과거의 법정 역시 지금이 이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법정은 결국 세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깎아 내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와는 다른 길을 걷겠노라 선언하고 있다.
틀렸다 하겠는가? 아니면.......
"다른 분들의 말은 굳이 들어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저들의 눈빛이 그 결정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었다.
“저는........”
법정이 잠시 말을 끊고 혜연을 바라보았다.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쳐 오는 혜연의 시선에 법정의 입꼬리가 조금 더 말려 올라갔다.
“한 사람의 불자로서는 여러분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그 높은 의기를 대체 무슨 말로 깎아내릴 수 있겠습니까?"
혜연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법정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한 사람의 불자가 아닌, 소림의 방장으로서는 여러분의 선택을 존중하기 어렵습니다. 그 의기가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경우에는 여러분의 죽음만으로는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방장......”
법정이 그답지 않게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 소림, 그리고 소림과 함께하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앞으로 천우맹에 대한 어떤 지원도 하지 않을 것이며, 천우맹이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일에는 반대의 의사를 명확히 할 것입니다.
백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 말은 구파일방이 공식적으로 천우맹과 구파일방이 서로 다른 곳이라는 사실을 공표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각오야 하고 있었지만, 막상 법정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는 걸 들으니 등골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구파일방, 그 네 글자에 얼마나 깊은 역사와 정통성이 함께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천우맹과 타문 간에 발생하는 분쟁에도 구파일방은 개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방장!”
이 말에 반응한 이는 당군악이었다.
다른 이들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당군악만은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건 설령 사패련이 천우맹을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구파일방은 천우맹을 돕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다.
이 선언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완전한 분열.
그간 소림은 천우맹을 정파의 한 갈래로 인정해 왔고, 어쨌거나 자신들이 품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봐 왔다. 그렇기에 서로 다툼은 있을지언정 노골적으로 적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법정은 지금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천우맹을 잠재적 아군으로도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강호사에 있어서 소림을 위시한 구파일방이, 같은 정파에 대한 적대를 선언한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이건 천우맹이 '정파'라는 사실마저 부정하고 나선 것인지도 모른다. 소림과 구파일방은 천하의 모든 양민과 정파를 보호하는 곳이니까.
거꾸로 말해 그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은 정파가 아니라는 말도 되지 않는가? 다른 길을 걷겠다는 선언 하나만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큰 대가였다.
당군악을 바라보던 법정의 시선이 백천에게로 옮겨 갔다. 이토록 큰 선언을 했음에도 백천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법정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훌륭하구나.”
법정이 이러한 선언을 한 건, 이들에 대한 악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화산이, 천우맹이 어째서 그 길을 가려 하는지는 이젠 이해했다. 하지만 법정 역시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 의기라는 두 글자에 모든 운명을 걸기에 그는 너무도 멀리 와 버렸다.
그렇다면 그 역시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터. 하나라도 더 많은 세력을 규합하고 세상을 덮쳐올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천우맹으로 합류하려는 이들의 움직임을 막아 내야 한다.
설령 그 과정에서 천우맹을 악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해해 주시겠지요.”
그 차디찬 말을 내뱉은 게 자신이 아니기라도 한 듯, 법정의 목소리는 그저 고요했다. 그 질문을 받은 백천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다.
“솔직히 이해는 어렵습니다만."
그러다 이내 고개를 든 그는 어깨를 당당히 펴고 법정을 마주했다.
“그게 방장의 대의를 지키는 방법이라면, 저희 역시 방장을 비난할 자격은 없겠지요.”
법정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천우맹은 자신의 선을 확고히 했고, 구파일방은 천우맹의 기세를 꺾을 명분을 얻어 냈다.
그가 원하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얻은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천우맹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하지 못했다면, 지금까지도 그는 천우맹에 끌려가고 있었을 테니까.
“그럼 되었습니다.”
방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긴 대화를 끝낼 시간이 되었다는 듯. 그러자 앉아 있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법정을 주시했다.
“아미타불.”
법정이 반장을 하며 불호를 외었다.
“좋은 얼굴로 헤어지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서로의 입장을 확인했으니 의미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희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법정의 시선이 백천에게서 청명으로 옮겨 갔다. 뭔가 표정이 묘해 보이는 청명을 바라보던 법정의 시선이 이번에는 눈을 감고 있는 혜연에게로 향했다.
“고고한 이상이 결국 무너지는 이유는 그 이상을 관철하는 길이 더없이 고통스럽기 때문일 터.”
그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박혔다.
“소림의 방장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신 여러분들에 대한 경의를 표합니다. 부디 그 길이 너무 험난하지 않기를.”
법정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모두가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리고 법정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뭔가 아쉬움이 남은 듯한 종리형이 다른 이들을 빤히 바라보다 법정의 뒤를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문주들이 그런 법정을 배웅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배웅은 괜찮습니다.
“그래도 예의라는 게 있는데.......”
“그쪽이 제 마음이 편합니다.”
“그러시다면.......”
법정이 빙그레 웃으며 현종을 바라보았다.
“맹주님.”
“예, 방장.”
“훌륭한 제자들을 두셨습니다.”
“.......제겐 과분한 녀석들이지요.”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다음에 웃는 얼굴로 서로 마주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도 그리되길 바랍니다.”
“강녕하십시오.”
법정이 장원의 정문을 향해 걸어가자 모두가 그런 법정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마지막까지 참던 혜연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인기척을 느낀 법정이 슬쩍 혜연을 돌아보았다.
막상 달려오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혜연이 머뭇거리자 법정이 먼저 말을 건네었다.
“직접 겪어 보아라.”
“너는 지금껏 이들의 의기만을 보았다. 이들이 이루는 것만을 보았다. 하지만 그 의기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아 버린 이상, 이제부터는 너 역시 그 책임을 나눠 짊어져야 할 것이다.”
“..........예, 방장.”
“그럼 스스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소림에서는 가 볼 수 없는 길이겠지."
그 말이 끝이었다.
건강하란 말도, 치하의 말도, 심지어는 원망의 말조차 남기지 않고 법정은 미련 없이 장원을 빠져나갔다.
그 당당한 걸음을 지켜보던 당군악이 한숨을 쉬었다.
“방장은 방장이로군.”
"......예.”
백천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이니 소림의 방장이 되었겠지요.”
당군악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예?”
“화산의 장문 역시 아무나 하는 자리는 아니니 말일세."
백천의 입가에 당군악과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리되어야지요.”
법정의 등을 떠난 백천의 시선이 드높은 창공으로 향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보였다.
“반드시.”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이 그들을 그저 내려다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