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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88화 (1,189/1,567)

1188화. 앞으로도 걸어갈 길입니다.(3)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백천을 노려보던 법정이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자리에 앉기 전보다 더욱 차가운 빛을 뿜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소이까. 입발림이라고."

그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백천을 파고들었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선택을 해야 하는 게 이끄는 자이외다. 누구도 해 주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하는 이가!"

"……"

"그렇기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교하고, 내리지 말아야 할 결정을 내리는 것이외다! 장문대리께서 그 입으로 말하지 않았소이까? 그 책임을 짊어지겠다고. 그렇다면 장문대리는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천 명의 목숨을 포기 하는 것이 옳다고 하시는 겁니까?"

백천이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자 법정이 그거 보라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이상은 누구나 논할 수 있소. 하지만 그 이상 때문에 죽어 가는 이들의 삶은 누가 보상한단 말입니까?"

"누가 방장께 그 선택을 할 자격을 주었습니까?"

백천의 물음에 법정이 두 눈을 부릅떴다.

"소림의 방장이기에 타인의 목숨을 저울질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방장께서 다름 아닌 법정대사이기에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보시오! 장문대리!"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 책임을 짊어 져야 한다."

읊조린 백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 책임을 감당해 본 이가 방장뿐이라는 듯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건 이미 많은 이들이 걸어온 길이며, 선대들이 고민하고 또 고민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이미 후대에 결론을 전했습니다."

"……후대에?"

법정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선대가 대체 그들에게 무슨 말을 전했다는 말인가?

"방장께서도 익히 아시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뜻을 협의라 부르지요."

법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무슨 뻔한……"

"뻔한 소리가 뭐가 잘못된 겁니까?"

백천의 얼굴에 격정이 어렸다.

"자기 자신을 현명하다고 여기는 이는 모든 것에 잣대를 가져다 댑니다. 하지만 정말도 현명한 이는 평가하지 않아야 할 것은 평가하지 않습니다! 선인들이라 해서 방장이 말씀하시는 바를 몰랐겠습니까? 그분들이 그저 우둔해서 그 사실을 논하지 않았겠습니까?"

"……"

"머리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 이와 리를 따지지 않고, 제 마음이 가는 길을 따르는 것! 선대는 그것을 협의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오직 그 협의를 지킬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건 그분들이 우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유일한 정답이었기 때문입니다."

법정의 얼굴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분들은 이미 아셨던 겁니다. 그들의 후대가, 자신의 명석함만을 믿고 가치를 판단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대체……"

"그렇기에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 그 무엇보다 협의를 강조했던 겁니다. 그 단순한 가르침 속에 우리가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를 담아 냈던 겁니다. 묻겠습니다, 방장! 그 위대했던, 그 드높았던 소림의 선대는 방장에게 무엇을 전했습니까?"

법정이 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입은 굳게 닫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천은 이미 이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리 없다. 세상 어느 문파보다 협의와 중생에 대한 구제를 강조한 곳은 다름 아닌 소림이니까. 그렇기에 소림이 강호의 북두가 되고, 지금껏 강호의 북두가 되고, 지금껏 강호의 수호자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니던가?

"그 선대께서 지금의 방장을 보면 뭐라 하시겠습니까? 그 서글픈 자기희생을 정말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피눈물을 흘리며 내린 선택을 잘했다 칭찬하시겠습니까?"

"닥치시오!"

법정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이건 그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임과 동시에, 위태롭게 유지되던 협의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듣자 듣자 하니, 못 하는 소리가 없구려! 지금 소림이 협의를 저버리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그럼 따르고 계십니까?"

"뭐라!"

"대체 방장은 협의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럼 화산은 알고 있단 말이오?"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화산에는 알고 있는 이가 있지요."

백천의 시선이 즉각 한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윤종!"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호통처럼 떨어지자 윤종이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저 말씀이십니까?"

"화산의 제자로서 대답하라. 협의란 무엇이냐!"

"협의란……"

윤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당혹스러운 정도로 갑작스러운 질문이지만, 대충 둘러댈 수는 없었다. 이 대답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아야 한다.

그리하여 윤종의 대답은 조금 뜬금없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 칭한다면 더는 도가 아니듯, 협의를 협의라 부르는 순간 협의는 더 이상 협의가 아닌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차분하게 가라앉아 갔다.

"도란 궁구하면 궁구할수록 더욱 뜬구름을 잡는 듯 멀기만 하며, 세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하고 이상적인 무언가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협의 역시 완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괴팍하고, 때로는 이기적이며, 때로는 불합리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이지요."

"또."

"하지만 그렇기에 협의가 협의인 것입니다. 도란 모든 것을 자연스레 내버려 두는 것. 그럼 물이 아래로 흐르듯 자연히 흘러갑니다. 때로는 굽이치고, 그러다 머무르고, 또 때로는 흩어지지만 결국에는 있어야 할 곳을 향합니다. 사람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 마음이란 때로는 우둔하고, 때로는 악하고, 때로는 이기적이지만, 결국은 물이 흐르듯 드넓은 곳으로 나아갑니다."

다시 뜨인 윤종의 두 눈에 심유한 빛이 어렸다.

"그러니 결국 협의란 사람을 믿는 것. 내 가슴의 부름에 답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수 있다면 결국은 옳은 곳으로 나아갈 테니까요."

백천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법정을 바라보았다.

"들으셨습니까?"

하지만 법정은 여전히 진노한 채 쏘아붙였다.

"무얼 들었냐는 말이오! 그저 뻔한 이상론일 뿐이지 않소! 그래서, 그 대단한 이상론이 죽어 갈 이들을……"

"아, 거 진짜 못 들어 주겠네."

어디선가 툭 튀어나온 빈정거림에 법정의 고개가 한쪽으로 휙 돌아갔다. 문 쪽에 앉아 있던 임소병은 슬그머니 그 시선을 외면하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천하만민을 위하는 마음이 크고 한 사람이라도 더 돕고 싶으면 왜 절간에 박혀서 주먹이나 휘두르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관직에 출사했으면 훨씬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

"지, 지금 대체 뭐라……"

법정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녹림왕이라고는 하나, 그래 봐야 사파의 수괴. 그런 이가 어찌 법정의 앞에서 저런 말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틀린 말도 아닙니다."

그런 법정을 더욱 당황케 한 것은 남궁도위였다. 오대세가의 수장인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다른 이도 아니고 녹림왕의 말을 거들고 나선 것이다.

"더 큰 일을 하고, 더 큰 뜻을 이루는 게 반드시 더 옳은 일이라 하면, 강호 자체가 모순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나라의 힘이 천하 곳곳에 닿아 모든 이들을 굽어살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방장께서 대의를 논하시겠다면 작디작은 소림에서 천하를 논하시기 보다는, 차라리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강호가 아주 사라지게 만드는 쪽이 옳지 않습니까?"

"소가주!"

법정의 두 눈에 핏발이 불거졌다.

"모두 이렇게 나오겠다는 것이오? 그 돼먹지 못한 궤변으로 사태를 정말……"

"그만하십시오, 방장."

그 순간 담담한 목소리가 법정의 말을 끊었다.

법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서였다. 혜연이었다.

"방장께서 틀리셨습니다."

"……뭐라 했느냐?"

"방장께서 틀리셨다 했습니다."

"너……"

법정의 얼굴에 망연함이 어린다.

다른 이들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혜연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 아무리 법정이 파문을 입에 올린 적 있다 해도, 혜연은 어쨌든 그가 직접 키우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 혜연이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잇는가?

"지금 방장께서는 이들의 말을 부정하려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계십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부처께서, 석가께서 오랜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으신 뒤 무엇을 하셨습니까?"

뜬금없는 물음에 법정은 대답 대신 혜연을 뚫어져라 보았다. 혜연이 부연했다.

"부처께서는 깨달음 얻으신 뒤, 칠 일이 일곱 번 지날 동안의 고뇌 끝에 천하에 자신의 가르침을 퍼뜨려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답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런 부처께서 처음으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답이 돌아올 걸 기대한 게 아니었던 듯 혜연이 답을 내놓았다.

"그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이들에게 설법하고, 그 발이 닿는 곳에 있는 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혜연. 이, 이놈……"

"아미타불."

혜연이 반장을 하며 말을 이었다.

"부처께서는 세상을 구하고자 하셨지만, 천하 모든 곳에 닿을 불경을 스스로 만들지 않으셨고, 과거의 신분을 이용하여 그 뜻을 더 멀리 퍼뜨리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부처께서 세상에 신음하는 중생들을 위하여 한 일은 그 드높은 뜻을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전하고 가르친 것. 예, 그저 그것입니다."

혜연의 맑고 투명한 눈빛이 법정에게로 향했다.

"그 말이 경이 되고, 그 가르침이 불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전파되고 흘러들어 방장에게까지 닿은 것이 아닙니까?"

법정의 눈이 흔들렸다.

소림의 방장인 그는 이 말에 부정할 수 없다.

"방장의 논리대로라면 부처께서 하신 일은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큰 곳을 보지 못한 어리석은 이의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 크나큰 불도를 깨달으신 부처께서 천하만민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게 됩니다. 하지만 방장. 그 가르침이 과연 헛되었습니까?"

"……"

"그렇기에 자신이 불자라 생각하는 이는 장문대리의 뜻을 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본디 불법이란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한없이 이기적인 길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제 손에 닿는 이를 구하려 드는 이를 어리석고 이기적이라 비난하실 수가 있습니까?"

"네 이놈……"

"방장께서 소림의 방장이기 전에,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는 한 사람의 불자라면……"

혜연의 목소리가 웅혼하게 법정을 휩쓸고 뒤흔들었다.

"스스로 지옥에 떨어지겠다는 말뿐인 면피 이전에, 어느 것이 진정으로 불도인지를 고민하셨어야 합니다."

혜연이 안타까움을 한껏 담아, 하지만 더없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방장께서…… 틀리셨습니다."

그 말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법정의 심장을 꿰뚫었다.

(주*님*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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