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796화 (793/1,567)

796화. 잘생기고 재수 없으면 진가 놈인데. (1)

“남궁황이오.”

“벽현(碧賢)입니다.”

현종이 두 사람을 향해 공수했다.

“화산의 현종입니다. 다시 뵙게 되어 더없이 반갑습니다.”

모두 과거 천하비무대회에서 안면이 있던 이들이다. 하지만 현종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먼저 벽현자.

청성의 장문인인 그가 현종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화산의 명성이 사천에 자자합니다. 천하비무대회 때 화산이 명성을 날릴 것이야 익히 짐작했지만, 제 생각을 뛰어넘는 활약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장문인.”

“어인 과찬이십니까.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과찬이라니요. 아무도 그리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악적들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화산이 와 주시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현종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에도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지금 청성 장문인의 말이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화산이 이곳에서 뭘 한다는 말이오.”

아무래도 남궁황은 그리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차가운 눈으로 현종을 뚫어져라 보았다.

“여기에 모인 전력은 수채 하나를 상대하기에 이미 지나치오. 괜히 인원이 더 늘었다가는 혼란만 생길 뿐이오. 뒤늦게 왔으니 어설프게 끼어들어 분란을 초래하지 말고 뒤쪽에서 지원이나 하면 될 것이외다.”

“…….”

“이곳에 천우맹이 나설 자리는 없소.”

벽현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말씀이 너무 과하지 않으십니까, 남궁가주.”

“뭐가 과하다는 말입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시작은 화산이 했다 해도, 결국 우리가 수적들과 싸우는 동안 화산은 섬에 틀어박혀 신선놀음이나 하지 않았습니까?”

현종의 눈가가 떨렸다.

‘신선놀음이라…….’

그걸 신선놀음이라 할 수 있을까?

뭐……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리 보일지도 모른다. 인생은 본디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법이다.

남궁황은 영 못마땅한 얼굴로 현종을 쏘아보았다.

사실 이곳에서 화산에 감정이 가장 좋지 않은 곳은 무당이 아니라 남궁세가일지도 모른다.

무당은 화산과의 비무에서 패배해 명성을 잃었고, 그 비슷한 성향 때문에 결코 가까워지기 어려운 사이지만 실질적으로 본 손해는 사실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남궁세가는 화산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우선은 당가가 오대세가에서 이탈한 것.

아직 공식적으로 선언한 바는 없지만, 천우맹에 들었다는 것은 오대세가의 결속을 깨겠다는 의미다. 오대세가의 수장으로서 그들을 이끄는 남궁세가에게 있어서 당가의 이탈은 한 팔을 잘라 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피해다.

두 번째로는 북경의 상권을 장악당하고 있는 것.

오대세가에서 가장 큰 자금줄을 담당하는 곳은 남궁세가와 팽가다. 남궁은 안휘를 중심으로 상권을 이룩했지만, 하북팽가는 북경의 상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저 망할 은하상단의 특급표행 덕분에 고관들이 은하상단을 찾기 시작하면서 북경 상계의 균형이 깨질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자연히 남궁세가의 부담 역시 커진 것이다.

돈과 세력.

그 두 가지를 모두 찔러 대는 와중인데, 아무리 남궁황이 호인이라고 한들 무슨 수로 화산을 좋은 눈으로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빌어먹을. 저 망할 화산 놈들 때문에 도위가 개망신을 당했다.’

다른 문파 역시 화산에 큰 망신을 당한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문파의 제자가 망신을 당한 것과 다음 대의 가주가 되어야 할 소가주가 망신을 당한 것은 그 무게감이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궁황은 적어도 그가 있는 이곳에서만은 화산이 명성을 가져가는 꼴을 죽어도 볼 수 없었다.

“장로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화산과 함께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으음.”

법계가 침음성을 흘리며 대답을 미루었다. 이건 섣불리 대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대답하더라도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보통 이런 말은 뒤에서 조용히 논의하는 법인데, 남궁황이 단도직입적으로 찔러 버린 덕에 할 말이 더 궁해졌다. 보는 눈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장문인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허도진인이 질문을 받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따지고 보자면 이 장강 공략은 화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닙니까.”

“……흠.”

남궁황의 눈이 살짝 가느스름해졌다. 허도진인이 말했다.

“화산이 중추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이가 없을 것입니다.”

“장문인께서…….”

“그러니.”

허도진인이 짧은 말로 남궁황의 말허리를 잘라 냈다.

“이번 공략에서는 저희에게 공을 양보하시지요, 장문인. 저희도 나름 협의를 추구하고자 장강으로 온 판인데, 화산이 모든 공을 가져간다면 면이 서질 않습니다.”

“…….”

그런 허도진인을 보는 현종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 뜻이야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지만 그 말을 이리 직접적으로 해 버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부탁드립니다.”

허도진인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현종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그게 뭐 큰일이라고 장문께서 이리 과례를 보이신단 말입니까?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허도진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꼭 공 때문만은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저곳이 지형이 저러합니다.”

“……으음.”

허도진인이 가리킨 건 강 건너편이었다. 현종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런 지형이…….’

강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지금까지 본 장강의 강폭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꽤 좁은 편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도하에 그리 큰 어려움을 겪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저 안이라…….”

강 건너에는 깎아지른 높디높은 절벽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천신이 도끼로 내리쳐 생긴 듯한 좁은 골짜기가 있었다.

“흑룡채가 저 안에 있단 말씀이십니까?”

“예. 겨우 큰 배 하나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폭입니다.”

“…….”

법계가 설명을 이었다.

“뒤쪽으로 돌아 진입해 보려 했지만, 그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선 절벽이 너무 높아 뛰어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 줄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데, 그만한 길이의 줄을 구하는 것도 큰일이거니와…… 저 안에 있는 이들의 실력을 감안한다면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데에만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으음. 그렇지요.”

일전에 화산이 대경채를 칠 때는 녹림이 절벽을 타고 강하했다.

하지만 그건 아래에 있던 화산이 궁수들을 막아 내고, 아래로 내려오는 이들에게 적들이 달라붙지 못하도록 시선을 끌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적당한 높이라면 위를 점거했다는 이점을 활용할 수 있겠지만, 이만한 높이는 오히려 진입하는 자를 위험하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위에서 공격할 방법은 굳이 절벽을 내려가는 것만이 아니잖습니까? 낙석이라든가…….”

“끓는 기름이라도 부으라는 거요?”

현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궁황이 냉소 어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화산이 협의지문이란 명성이 자자하더니 다 과장된 말이었나 봅니다.”

그는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아래에 누가 있을 줄 알고 그런 눈먼 공격을 한다는 말이오? 흑룡채라면 사로잡힌 양민들이나 노역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오. 그런 이들 머리 위로 바위를 던지라?”

“…….”

“말 같지도 않은 소리요.”

현종은 작게 한숨 쉬었다. 입술 새로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과격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협의를 행하기 위해 장강으로 온 이들이 양민들의 피해를 감안하지 않고 무작정 공격할 수는 없는 법.

“남궁가주께서는 조금 숨을 고르심이 옳을 것 같습니다.”

“크흠.”

에둘러 주의를 주는 법계의 말에 남궁황이 크게 헛기침했다. 법계가 상황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리된 고로, 아무래도 전방의 소로를 통해 진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양민들의 피해도 피해지만, 수로채의 정예라면 그런 공격에 피해를 입지는 않을 테니까요.”

“하면…….”

“좁은 길에 너무 많은 인원은 방해가 됩니다. 공격에 나설 문파와 그러지 않을 문파를 구분하긴 어려우니, 가장 늦게 도착하신 화산에서 양보를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법계까지 이리 나오니 현종도 도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 네 문파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라는 결속으로 엮여 있다. 천우맹 소속인 현종을 껄끄러워할 수밖에 없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가는 대화이지만 백천의 귀에는 훤히 다 들렸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미미하게 경련했다.

‘빌어먹을.’

누군가는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누군가는 예의 바르게, 또 누군가는 부드럽게 타이르듯.

방식은 다 다르지만 모두가 자연스럽게 화산을 배척하고 있다. 가장 먼저 수로채와 싸우고, 장강의 양민들을 위해 전쟁을 무릅썼던 화산을.

‘이게 저들의 방식이란 말인가?’

화를 참으며 백천이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때였다.

저벅.

‘음?’

한 사람이 화산 쪽을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보보마다 어린 기운만으로도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게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만 그의 얼굴을 살피던 백천은 일순 흠칫했다.

‘남궁도위?’

과거 천하비무대회에서 청명에게 실로 처참하게 패했던 단악검 남궁도위였다.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다가오는 그의 얼굴은 철갑이라도 두른 듯 차고 무표정했다.

저벅.

백천의 바로 앞에 선 남궁도위가 가만히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화산신룡은 어디에 있소.”

“……예?”

“화산신룡.”

백천은 대답 대신 고개를 슬쩍 돌렸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백천을 따라 한곳에 꽂혔다.

“읍! 읍읍! 읍!”

“…….”

“…….”

남궁도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미안합니다.’

백천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온 진심으로 남궁도위에게 사과했다. 남궁도위가 어떤 심정으로 여기까지 걸어왔을지 생각하면 저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거다. 그게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데…….

“푸, 풀어 줘라.”

“그래도 됩니까?”

“빨리 풀어!”

“예!”

조걸과 윤종이 청명의 입을 묶은 천을 풀고, 몸에 칭칭 감아 두었던 쇠줄을 끌러 냈다. 청명이 기다렸다는 듯 벌게진 얼굴로 꽥 소리를 질렀다.

“푸아아앗! 야! 숨은 쉴 수 있게 묶어야 할 거 아냐? 뒈지는 줄 알았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손님이다, 청명아.”

“응? 손님?”

청명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아…….”

남궁도위가 안색을 굳히며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

“……누구시더라?”

순간 말문이 막힌 남궁도위는 고개를 돌려 먼 하늘만 보았다.

그리고 백천은 그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정말 미안합니다.’

차라리 그냥 계속 묶어 둘 걸 그랬나.

그때 눈치 없는 조걸이 재빨리 청명에게 속삭였다.

“남궁도위잖아! 남궁도위! 단악검 남궁도위!”

“아? 남궁도위?”

“그래!”

청명이 아아, 하며 잠깐 더 남궁도위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게 누군데?”

“너랑 비무대회에서 붙었었잖아!”

“내가 비무대회에서 팬 놈이 한둘도 아닌데, 그걸 무슨 수로 다 기억해.”

“그중에서 셌던 사람!”

“혜연?”

“아, 아니, 그다음으로!”

“이송백?”

“…….”

백천은 보고 말았다.

흘끗 남궁도위의 눈치를 보는 조걸의 얼굴에 진심으로 미안한 감정이 어려 있는 것을.

……저건 굉장히 진귀한 광경이다.

“그, 그다음은?”

“그다음부턴 다 조무래기지. 내가 조무래기들까지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해?”

청명이 손사래를 치고 옷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남궁도위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나를 잊었단…….”

“아!”

그때 얼굴을 불쑥 들이민 청명이 탄성을 내지르며 손뼉을 쳤다. 남궁도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틀린 미소를 흘렸다.

“이제야 알아보는…….”

“그때, 그 잘생기고 재수 없던 놈! 이름이 진은룡이었나? 맞지?”

“남궁도위라고!”

“엥…… 이상하다. 잘생기고 재수 없으면 진가 놈인데.”

남궁도위와 진동룡……. 아니, 백천이 동시에 부들부들 떨어 대었다.

그때 더 고민하던 청명이 다시 아아! 하고 소리쳤다.

“그래! 이야, 너구나! 반갑다! 얼굴 보니까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어…….”

환하게 웃던 청명의 시선이 힐끔 아래로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당시 비무대회장에 있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청명을 따라 힐끔 아래로 내려갔다가 황급히 제자리를 되찾았다.

“……미안하다. 내가 그때는 몸속에 화가 많아서.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는데. 그…… 괜찮지? 혹시 뭐 문제가 있다거나…….”

“끄윽…….”

남궁도위의 잘생긴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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