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7화. 잘생기고 재수 없으면 진가 놈인데. (2)
“이…….”
뿌드드득.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퍼져 나갔다.
남궁도위는 핏발이 선 눈으로 청명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지난 비무대회에서 청명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이후로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던가?
그건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참패였다. 덕분에 스스로를 후기지수 중에 최고라 믿었던 남궁도위의 자부심은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그 이후 그가 겪었던 고통에 비한다면 패배에 대한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필이면 그가 낭심을 얻어맞는 모습을 그곳에 있던 모두가 다 봐 버린 덕에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까지 괴소문이 돌았다. 덕분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쏟아지던 혼담이 뚝 끊겼고, 허구한 날 드나들던 매파도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본디 남궁도위에게 혼담을 넣던 건 그를 원한다기보다 자신의 후예를 남궁도위의 뒤를 이어 남궁세가의 가주 자리에 앉히고 싶어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의 ‘그곳’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양 일제히 발을 빼 버린 것이다.
그 치욕감과 굴욕!
비참하기 짝이 없었던 순간을 떠올리자 달군 숯을 삼킨 것같이 속이 들끓었다.
‘다 저놈 때문에!’
남궁도위는 본래 패배에 원한을 품는 치졸한 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패배가 아니었다. 사람의 자존심을 모조리 부수고, 산산조각 내고, 맷돌에 넣고 갈아 버리는 짓거리였다.
“후욱! 후욱!”
남궁도위가 크게 몇 차례 심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저 얼굴을 난도질해 버리고 싶었지만, 이곳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남궁세가의 소가주로서 품위는 지켜야…….
“아이고……. 말을 못 하는 걸 보니까 문제가 있나 보네. 이걸 어째야…….”
“아니라고! 문제없다고!”
남궁도위가 화들짝 놀라 소리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렇잖아도 쭉 궁금했던 차에 흥미진진하게 대화를 듣던 구파일방의 문도들이 순간적으로 그의 아래를 재빠르게 바라보더니 다시 시선을 올렸다.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안타까움이 가득 서렸다.
남궁도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 나는 멀쩡하다!”
“……진짜?”
“그렇다니까!”
“그래. 뭐…….”
청명이 한껏 동정하는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지. 다행인데……. 그래. 다행이네.”
“믿으라고!”
“아아, 믿어. 믿는다니까.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그게 뭐……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남궁세가 직계면 무당이나 소림에서도 받아 줄 테니까.”
“…….”
“그죠?”
청명이 법계와 허도진인을 획 돌아보며 물었다.
갑자기 끌려나온 듯한 느낌에 두 사람은 엉겁결에 입을 열었다.
“으응?”
“그, 어……. 그렇긴 한데…….”
천하의 허도진인과 법계가 어정쩡하게 대답하며 당황해하니 남궁도위의 얼굴은 이제 벌겋다 못해 붉으락푸르락했다.
조걸이 윤종에게 작게 속삭였다.
“화산도 도가인데 안 받아 줍니까? 우리는 혼인을 해도 되지만, 안 해도 되잖아요.”
“재수 없잖아.”
“아…….”
남궁도위의 이마에 시퍼런 핏대가 섰다.
‘다 들린다, 이 새끼들아!’
하여튼 이 문파는 시종일관 어디 하나 제대로 된 놈이 없다!
“……화산신룡.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사람을 깔보는 그 태도까지.”
“안 변하다니, 인마! 사람이 이렇게 다정다감하게 진심을 다해 걱정을 해 주고 있는데!”
백천이 진지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청명아, 그건 걱정해 주는 게 아니다.”
“아, 그래? 이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지, 나는.”
남궁도위가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했다.
저놈의 수작에 말리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되새기며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은 또 이 꼴이다. 그래도 전처럼 사타구니를 냅다 걷어차 오지는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후우.”
가까스로 마음의 안정을 찾은 남궁도위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변하지 않은 것 같아 차라리 다행이오.”
“응?”
“……먼저 감사를 표하지. 그대 덕분에 내가 얼마나 우물 안에서 살고 있었는지 똑똑히 깨달았소.”
처음에는 부정했다. 기습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처참하게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화산신룡 청명의 활약은 그가 있던 안휘에도 쉼 없이 들려왔으니까.
“오늘은 날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내 검이 얼마나 날카로워졌는지 보여 줄 기회가 있을 것이오.”
남궁도위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일갈했다.
“나는 반드시 그대를 꺾어 굴욕을 되갚아 줄 것이오. 잊지 마시오. 나는 남궁세가의 남궁도위요. 그대에게 패배를 안겨 줄 사람이지.”
“…….”
멍한 얼굴로 남궁도위를 보던 청명이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이내 백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 묘한 시선에 백천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왜?”
“내가 진짜 너무 궁금해서 묻는 건데.”
“……뭐가?”
“정말로 아버지가 남궁세가랑 관련 없어? 아니면 혹시 어머니 성이 남궁이라든가?”
“둘 다 아니야!”
“……이상하다. 저 새끼 아무리 봐도 진간데. 진씨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재수 없을 수가 없거든? 지금 잊어버렸던 금룡이 얼굴도 떠올랐단 말이야.”
그걸 어떻게 잊어버려, 이 미친놈아!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두 사람으로도 모자라 이젠 아예 진금룡까지 싸잡아서 까 버리는 청명의 언행에 진동룡은 바들바들 떨어 댔다. 물론 청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은룡이는 또 얼마나 재수 없을까 궁금하네.”
“두, 둘째 형님은 그런 사람이 아냐!”
“첫째랑 지가 재수 없는 건 아는 모양이네. 하하.”
“…….”
청명이 피식 웃었다.
언행이야 빼도 박도 못 하게 진가 놈 같지만…… 어쨌든 남궁도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과거보다 확연히 강해져 있었다.
비무대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감안한다면 그동안 침식을 잊고 수련에 매진한 모양이었다. 남궁도위는 다시 한번 비장하게 말했다.
“기억하시오. 반드시 갚아 줄 테니까.”
“아아, 그래그래. 시간 나면 찾아와. 대신 의원 대동하고 오고.”
남궁도위는 말없이 청명을 노려보다가 몸을 획 돌렸다.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며 청명이 히죽히죽 웃었다.
조걸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웃냐?”
“응?”
“평소 같으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은 대가리를 깨 놔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을 놈이.”
“귀엽잖아.”
“……귀, 귀엽다고?”
“어. 딱 동룡이 같지 않아? 옛날에 동룡이도 저러다가 대가리가…….”
“하, 하지 말라고.”
꿈에도 잊힐 리 없는 흑역사가 떠오른 백천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황급히 말허리를 잘랐다.
청명은 소리 내어 웃었다.
남궁도위의 재수 없는 태도야 뭐 귀엽게 봐 줄 수 있는 정도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진 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입으로만 떠벌리는 놈은 아니라는 의미니까.
“수련 열심히 했나 보네.”
“그래야지. 누굴 상대해야 하는데.”
“이래서 될성부른 떡잎은 일단 밟아 가며 키워야 한다니까?”
청명이 낄낄 웃었다.
어떤 계기로 맺어진 인연이든, 병아리 같던 이들이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는 건 꽤 즐거웠다.
‘갑자기 송백이 보고 싶네.’
봉문 한 종남의 제자들도 아마 지금쯤 뼈를 깎는 수련을 하고 있을 것이다.
종남이라는 이름만 생각하면 여전히 이가 갈리고 피가 거꾸로 솟지만…… 사실 이송백과 진금룡 같은 종남의 제자들에게는 딱히 악감정이 없었다. 죄는 그들이 지은 게 아니니까.
재수 없는 진금룡의 얼굴과 꿋꿋한 이송백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두 사람이 봉문을 풀고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나는 날도 있겠지.
하지만 병아리들의 성장에 흐뭇한 감상에 잠겨 있던 청명은 이내 진저리를 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금룡이는 아니야. 걔는 별로 안 보고 싶다. 재수 없어.”
“……그래도 우리 형이야.”
“더 재수 없어.”
“……나쁜 새끼.”
백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청명을 만난 후기지수들은 하나같이 청명의 영향을 받는다.
화산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소림의 혜연만 하더라도 이제는 거의 화산파가 되어 버렸으며, 남궁세가의 남궁도위마저 청명을 꺾기 위해서 침식을 잊고 수련한다.
진금룡과 이송백 역시 마찬가지다.
백천은 청명을 보다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새삼스럽네.’
청명이 얼마나 중원을 바꿔 놓고 있는지가 실감되어서였다. 지나간 화제는 일단 두고, 백천은 청명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거야?”
“뭐가?”
“아무래도 우린 끼워 주지 않을 모양이던데. 묶여 있느라 못 들었나?”
“뭐?”
청명의 고개가 장문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획 돌아갔다.
“우릴 빼놓는다고?”
그가 크게 외치니 남궁황의 얼굴에 순간 노기가 치솟았다.
“어디 감히 일개 제자가 각 파의 장문들 앞에…….”
“그렇게 되었네.”
“…….”
남궁황이 입을 다물고 믿을 수 없단 눈으로 법계를 돌아보았다.
그가 아무리 오대세가의 수장인 남궁세가의 가주라고는 하지만 소림의 이인자인 법계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 법계가 저 말단 삼대제자와 대화를 나눠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발끈한 남궁황의 꼴만 우스워졌다.
‘이게 뭔…….’
남궁황에겐 충분히 당황스러울 만한 일이었지만, 법계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그는 이미 청명과 법정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연유까지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법정은 분명 청명을 한 사람의 무인으로 대하며 존중했다.
소림의 방장이 존중하는 이를 소림의 장로인 그가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 우릴 빼놓는다고?”
청명이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리자 오검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현종도 바로 고함을 내지를 준비를 했다.
하지만.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응?”
의외로 청명이 피식 웃더니 획 몸을 돌려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더니 뒤쪽에 놓인 자신의 봇짐을 주섬주섬 풀기 시작했다.
백천이 당황한 낯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뭘 꺼내는……. 도, 돗자리?”
돗자리, 당과, 전병, 그리고…… 육포?
야…… 너 그거 진짜로 챙겨 왔냐?
급기야 봇짐 안에서 새하얀 호리병까지 나오니 백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미친놈이 술도 챙겨 왔네.
전쟁하러 왔는데!
촤악!
돗자리가 평화롭게 쫙 펼쳐졌다. 청명은 태연하게 그 위에 올라앉아 싸 온 먹거리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흡사 꽃이라도 구경하러 온 모양새였다.
“뭐, 뭐 하는 건데?”
“구경이나 하라잖아.”
“…….”
“그럼 제대로 구경해 줘야지.”
“…….”
“왜 그렇게 봐? 다들 구경하라고 하시잖아. 간만에 착하게 말 좀 듣겠다는데 뭐가 문젠데?”
“……그, 문제는 없는데…….”
이래도 될까?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백천은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절절하게 현종을 응시했다. 그러자 현종은 빙그레 웃으며 다른 장문들에게 말했다.
“허허. 죄송합니다. 우리 아이가 영 버릇이 없어서.”
“…….”
“그럼 저희는 후방에서 지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대화를 마친 현종이 느릿하게 청명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차는 챙겨 왔느냐?”
“헤헤. 또 제가 미리 챙기라고 했죠. 야! 다기 가져와!”
그러자 어디선가 다기들이 속속들이 나와 현종의 앞에 놓였다. 기다렸다는 듯 현영과 현상도 슬그머니 다가와 돗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흐음. 뭐 딱히 할 것도 없으니.”
“잘 알아서들 하시겠지요. 사실 저희까지 끼는 건 좀 과하긴 합니다.”
“그래, 그래. 그 말도 맞구나.”
장로들까지 착석하자 청명이 크게 소리쳤다.
“다들 가져온 거 꺼내서 앉아! 경치도 좋고 바람도 좋은데 물 구경하면 되지!”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남궁황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저 망할 것들이……!’
이건 분명 그들이 화산을 배척하고 밀어낸 상황이다.
그런데 저놈들이 되레 저렇게 나와 버리니, 뒤에서 놀면서 구경하는 화산파 앞에서 재롱떨듯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게 무슨 굴욕이라는 말인가?’
제가 놓은 덫에 스스로 걸린 꼴이었다. 하지만 또 이걸 트집 잡기엔 너무 체면 빠진다. 화산은 그들의 말대로 한발 물러난 것뿐이니까.
화산이 물러나서 뒷짐을 지고 있든, 힘을 빠짝 넣고 경계를 하든, 아니면 판을 깔고 술을 퍼먹든, 거기까진 간섭할 수가 없다. 저들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아닌 천우맹 소속이니까.
“크흠.”
남궁황은 못마땅한 얼굴로 연거푸 헛기침했다.
“……그럼 저희는 어찌 공략을 할지 논의하시지요.”
“으음.”
“……그러십시다.”
각 파의 수장들이 얼굴을 맞대고 진지하게 의논을 하는 와중에도 뒤에서는 내내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빌어먹을 화산 놈들.’
하여튼 저놈들이랑 얽힌 일치고,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