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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95화 (792/1,567)

795화. 오직 그만이 가치 있을 뿐이오. (5)

“사형.”

“응?”

흑룡채를 향해 달려가던 와중, 조걸이 슬쩍 입을 열었다.

“그…… 무당 장문인이란 분 있잖습니까.”

“허도진인?”

“예. 그분이요.”

“그분은 왜?”

“좀 생각하던 거랑 다른 것 같지 않습니까?”

“응?”

윤종이 의문 어린 얼굴로 바라보니 조걸이 살짝 고민하는 듯하다 말했다.

“무당파의 장문인이라고 해서 엄청 날카로운 검수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니 굉장히 사람 좋은 도인 같던데요.”

물론 무당의 장문인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 천하후기지수 비무대회에서 높은 단상 위에 앉은 허도진인을 본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먼발치에서 바라본 것에 불과했다.

허도진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람 좋은 도인이라…….”

윤종이 잠깐 그 말을 되뇌더니 한심하다는 눈으로 조걸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걸아.”

“예?”

“너는 화산에 오길 참 잘했다.”

“헤헤. 뭔 그런 말을 하십니까. 쑥스럽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인을 했으면, 집안을 몽땅 거덜 냈을 텐데.”

“…….”

윤종이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듣고 있던 당소소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조걸 사형. 대문파의 장문인들은 보이는 그대로 믿으면 안 돼요. 그 속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고요.”

조걸은 영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당가주님께서도 그렇다는 소리냐?”

“아버지가 화산에 유별나게 우호적인 분이라 그렇지, 다른 문파를 상대할 때는 그렇지 않아요.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들은 모두 제 속을 숨기는 걸 숨 쉬듯 하는 사람들이라고요.”

“으음.”

“맞는 말이다.”

백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덕담이나 주고받고 끝났지만, 여기까지 와서 굳이 말을 붙인 목적이 덕담이었을 리 없다. 아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걸 파악하고 갔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요?”

“그러니 무당의 장문인이겠지.”

백천이 눈을 빛낸다.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고, 본받을 것이 있으면 본받아라.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절대 경계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

“예, 사숙!”

“명심하겠습니다.”

한편 대화를 나누는 병아리(?)들을 뒤에서 지켜보던 청명은 몰래 피식 웃었다.

‘잘 컸네.’

예전 같았으면 무당 장문인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갖은 호들갑을 떨어 댔을 놈들이, 이제는 저들 나름 경계하고 고민하고 있다.

“우선은 눈앞의 일에 집중해라. 지금 우리의 상대는 흑룡채다. 무당이 아니라.”

“예, 사숙!”

의욕 가득한 모습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이 씩씩하기 그지없었다. 청명은 히죽 웃었다.

“아주 잘나셨어.”

하긴, 뭐. 아무리 병아리라도 이 정도는 해 줘야지.

* * *

탓.

선두에 선 허도진인이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얼굴에 이전 현종과 화산파의 제자들 앞에서 보여 주었던 부드러운 표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싸늘히 굳은 냉엄함만이 남았을 뿐.

“어떠셨습니까?”

허산자가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그러자 허도진인이 표정에 변화조차 없이 입을 뗐다.

“화산 말이더냐?”

“예.”

화산에 대한 평가는 그간 질릴 만큼 들었다.

하지만 그건 대체로 화산의 행적에 대한 평가였을 뿐이다. 허산자가 듣고 싶은 것은 허도진인이 눈으로 직접 본 화산에 대한 평가였다.

“경계해야 함은 분명하다. 하나…….”

허도진인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조금 고민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가 잠시 후에야 다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화산은 분명 훌륭한 문파다. 오늘 직접 보니, 그 대단함을 절절히 느끼겠더구나.”

찬사에 가까운 말이다. 허산자는 허도진인의 입에서 이만한 호평이 또 나온 적이 있던가, 잠깐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뼈저리겠지. 그들이 잃었던 시간이 말이다.”

“…….”

“내 눈으로 화산을 확인한 것이 다행이었다.”

허도진인의 눈이 어둑해졌다.

실제로 본 화산은 생각 이상으로 위협적이고, 생각 이상으로 훌륭했다. 무당에서는 찾을 수 없는 무언가가 저 화산에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약점도 분명하다.’

아직 적이라고는 칭할 수는 없는 곳이지만, 어찌 되었건 적이 될 수도 있는 곳을 면밀히 파악할 기회를 얻은 것은 실로 다행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출정에는 가치가 있었다.

‘한번 벌어진 거리라는 건 그리 쉽게 좁혀지는 게 아니다.’

그간 너무 우습게 보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화산을 화산 그대로 인정하고 경계한다면, 저들과의 격차를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예전 같으면 화산이 장강의 모든 민심을 쓸어 담고 챙길 수 있는 이득을 모조리 챙겨 갈 때까지 구경이나 했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이번에는 화산이 장강에 출현해 수적과 싸운다는 말을 듣자마자 앞뒤 제쳐 놓고 몰려들었다.

경계의 대상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장문인. 무릇 위로 올라서는 자는 그만한 무게를 버텨야 하는 법이라오.’

백 등이 십 등이 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십 등이 이 등이 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고, 다시 일 등이 되기 위해서는 또 그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이미 타 문파의 경계를 받기 시작한 화산은 더는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이득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허도진인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긴장에 가까운 감정이 떠올랐다.

‘천하가 지금과 같다면 이 거리는 좁혀지지 않겠지. 하지만…….’

세상이 지금처럼 평온하지 않다면? 과연 그때도 무당이 저 화산과의 격차를 유지할 수 있을까?

허도진인의 눈이 차게 빛났다.

‘무당으로 돌아가면 바빠지겠군.’

그러려면 우선 흑룡채를 처리하는 것이 먼저다.

허도진인이 경기를 다리에 밀어 넣으며 땅을 힘껏 박찼다.

* * *

“오…….”

쉴 새 없이 달린 화산의 제자들이 마침내 흑룡채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다들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 장문인.”

“으음.”

이 광경을 대체 뭐라 표현해야 할까?

장관?

아니, 아니다. 이 광경을 그런 긍정적인 의미를 품은 단어로 표현하는 건 적절치 않았다.

강변에는 여러 무리의 무인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누런 황포를 입은 소림의 중들. 그리고 그들보다 먼저 나아간 무당의 제자들이었다.

그 옆으로는 하늘빛의 무복을 갖춰 입은 이들이 보였다.

“하늘빛…….”

“창궁(蒼穹)! 남궁세가의 창궁검대(蒼穹劍隊)입니다.”

“남궁이구나.”

한눈에 보아도 그 기세가 대단하게 날카로운 검수들이 완벽한 모습으로 정렬한 채 강 건너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렇다면 저 청의(靑衣)를 입은 이들은 청성파겠구나.”

소림, 무당, 남궁, 청성.

천하를 오시하는 네 문파가 강변에 집결해 있다. 실로 숨이 턱 막히는 광경이었다.

‘지난 마교와의 전쟁 이후로 이만한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적이 있었던가?’

비로소 과히 실감이 났다.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화산을 향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지 않음에도 몸이 짓눌리는 것 같은 압박이 느껴졌다. 그들도 그럴진대, 이 모두를 상대해야 할 수적들은 그 부담이 오죽하겠는가?

강호에 몸을 담는다면 무조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게 되는 그런 문파들이 분연히 검을 뽑아 들고 산문을 나선 것이다.

“장문인.”

현종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가자꾸나.”

소매 안에 감춘 손이 잘게 떨려 왔지만, 지금은 의연하게 나아가야 할 때다. 그는 화산의 장문인이니까.

화산의 제자들이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저곳에 합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지라 내딛는 발걸음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뒤쪽에서 화산이 다가오는 것을 본 법계가 천천히 걸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아미타불.”

그는 진중한 얼굴로 반장을 하여 예를 표했다.

“화산의 장문을 뵙습니다.”

“법계 장로님. 격조했습니다.”

“저를 기억하십니까?”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화산에 베풀어 주신 온정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법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딱히 화산에 온정을 베푼 것은 아니지만, 문파를 대표해 만나는 자리에서 개인적인 사정이야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저 화산의 장문인이 소림에게 우호적인 말을 건넨다는 사실이다.

“이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산의 의기에 천하의 모두가 감탄할 것입니다.”

법계의 말에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청명의 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훌떡 뒤집어졌다.

“아니, 저 중 새……. 읍읍!”

“하하하하. 그래, 청명아! 중생들이 다들 화산에게 고마워할 것이라 말씀하시는구나! 우리 청명이 기특하구나! 불교에 관심도 많지! 중생이란 말도 다 알고! 하하하하하!”

백천이 웃으며 필사적으로 청명의 입을 틀어막았다. 심지어 혜연마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청명의 목을 움켜잡고 조용히 조여 대고 있었다.

“읍! 읍읍! 저 새……. 저…….”

“그래, 그래. 또 어느새 보았구나! 저건 오리다! 오리 새끼 처음보지? 나도 퍽 신기하구나!”

그 틈에 오검이 재빨리 달려와 천으로 청명의 입을 단단히 감고 몸뚱이까지 칭칭 묶어 버렸다.

“끄으으읍! 읍읍!”

삽시간에 번데기 꼴이 된 청명이 죽어라 버둥거렸지만, 그 누구도 그런 청명을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후. 저기 뒤로 멀리 치워 놔라. 아니, 아니다. 이 기회에 차라리 묻어 버려라.”

“그럴깝쇼?”

“……아냐. 죽이지는 마라.”

백천이 한숨을 푹 쉬며 끌려가는 청명을 보았다.

애초에 수적 토벌을 시작한 것은 화산이다. 그러니 화산이 저들을 환대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법계는 교묘하고도 자연스럽게 화산에 감사를 표했다.

마치 자신들이 주역이고, 화산이 그런 소림의 의도를 돕는 것처럼 말이다.

‘스님이라는 사람이!’

제 문파를 위하는 마음이 잘못되었다 할 수는 없겠지만, 저건 너무 비겁하고 치졸하지 않은가?

그 마음을 이해했는지 혜연의 얼굴 역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때 법계가 혜연을 흘끗 보더니 현종에게 말했다.

“장문인.”

“예, 장로님.”

“소림의 제자를 거둬 가르침을 내려 주신 것에 더없는 감사를 표합니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금부터는 저희 제자를 저희가 거둬야 할 것 같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현종의 허가가 떨어지자 법계가 가만히 혜연을 불렀다.

“혜연.”

“……예.”

“이리로 와 소림에 합류하거라.”

“…….”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혜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장로님. 방장께서는…….”

“방장께서 네게 외유를 허하셨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가르침을 구할 때가 아니다.”

“…….”

“또한 방장께서 내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셨다. 더 말하지 않으마.”

이렇게 되니 더 이상의 말은 할 수 없었다. 혜연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풀이 죽은 얼굴로 뒤돌아보자 백천이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괜찮습니다, 스님.”

“백천 시주. 저는…….”

“사문의 명은 응당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

혜연의 커다랗고 순한 눈망울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그는 이윽고 살짝 풀죽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다시 뵙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혜연이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정중하게 반장을 했다. 그러자 화산의 제자들도 일제히 포권 해 혜연에게 예의를 표했다.

화산의 제자는 아니되, 화산의 제자나 다름없는 이에게 표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였다.

“안 볼 사이처럼 굴지 마십시오!”

“또 놀러 오세요, 스님!”

“고기 따로 숨겨 둘게요!”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아!”

정겨운 목소리들을 뒤로하며 혜연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소림 쪽으로 걸어가 섰다.

“제자가 폐를 끼쳤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혜연 스님이 계셔 주셔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화산의 장문으로서 혜연 스님과 소림에 크게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현종이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혜연을 바라본다.

화산의 제자가 아니건만 제자 하나를 잃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갑작스러운 이별을 겪는 듯하여 마음이 무거웠다.

혜연이 넘어온 걸 확인한 법계가 문득 저 옆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현종에게 말했다.

“그보다, 인사를 나누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법계가 바라본 쪽에서, 남궁세가의 가주와 청성의 장문인이 일직선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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