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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10화 (608/1,567)

610화. 산은 넘어야 의미가 있는 거지. (5)

호북성 무한.

무한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을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모두가 중앙을 도도히 가로지르는 장강을 꼽을 것이다.

중원의 젖줄이나 다름없는 이 넓디넓은 강 주변으로 펼쳐진 드넓은 평야. 무한은 그 위에 세워진 곳이었다.

그토록 상징적인 장강의 강변에, 지금 한 무리의 무인들이 무언가를 부지런히 만들고 있었다. 주변에서 그 광경을 보던 이들이 수군거렸다.

“저거 뭐 하는 건가?”

“못 보던 이들 같은데, 저 강변에 뭘…….”

“어엇? 저분들 혹시 무당파 분들이 아닌가?”

“응? 무당이라고?”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강변에 모인 이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진짜네? 무당파야!”

“아니, 무당파 분들이 저기에서 뭘 하는 건가?”

도포를 입은 이들이 강변의 토대를 다지고, 그 위에 단단한 청석을 가져와 깔고 있었다. 그러더니 검을 뽑아 울퉁불퉁한 표면을 매끄럽게 잘라 내기 시작했다.

“세, 세상에! 바윗덩어리를 저리 두부처럼!”

“뭘 놀라고 그러나? 무당파의 도인들이 아니신가? 한달음에 산을 넘고, 강을 건너시는 분들인데 저 정도야 일도 아니지.”

“아니, 그래서 지금 뭘 만드시는 건가?”

“무슨 무대 같아 보이는데?”

실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집채만 한 바위가 공깃돌처럼 옮겨지고, 그렇게 옮겨진 바위가 깔끔하게 잘려서 벽돌처럼 바닥을 덮는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고 나니 이내 꽤 높은 무대가 만들어졌다.

“장로님, 거의 끝났습니다.”

“음.”

비무대를 바라보던 허산자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걸 왜 저희가…….”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무진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허산자가 조용히, 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한은 무당의 영역이다. 제집에 온 객에게 일을 시키는 이가 있더냐? 객에게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것처럼, 주인에게도 주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법이다.”

“아…….”

허선자가 살짝 눈을 빛냈다.

“작은 것에서 기 싸움 하려 들지 말거라. 작은 것을 탐하는 이는 큰 것을 보지 못하는 법. 별것도 아닌 일에 집착하며 손해를 보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는 이는 대맥을 놓치기 마련이다. 너도 무당의 제자로서 천하를 보려 한다면 크게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장로님.”

깊이 고개 숙이며 진중하게 답하는 무진의 모습에 허산자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무진은 과거 청명에게 한 번 패했다.

무당삼검이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무당제일검의 자리까지도 노리던 그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화산의 제자를 자신의 적수로 여겨 본 적도 없던 이가, 자신보다 어린 자에게 패하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그 패배가 무진의 발목을 잡지는 않았다. 세상 무서울 것 없던 이가 부족함을 알게 되고, 겸손을 알게 되었을 뿐.

한차례 밟힌 보리가 더 꼿꼿이 자라고, 거친 들에 자라난 소나무가 더 질기고 튼튼한 뿌리를 가지듯이, 그 패배는 무진을 단련시키고 더 높은 곳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어떠냐?”

“예?”

“화산신룡을 다시 본 소감은?”

허산자가 묻자 잠깐 고민하던 무진이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너무 많은 것이 변한 것도 같고. 애초에 저는 그를 잘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다. 네 소감을 물은 것이지.”

“……기뻤습니다.”

“음?”

무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명성은 그리 높지 못했습니다. 물론 종남과의 비무에서 이름을 날리기는 했지만, 그 명성에는 의혹이 가득했지요.”

“그랬었지.”

아직도 기억이 선명했다.

허산자 역시 화산신룡이라는 이름에 그리 큰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 봐야 잠시 반짝하고 말 기재라 생각했다.

막상 만나 본 후에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를 어떻게든 무당으로 데려오려 하지 않았던가? 무당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걸면서.

하나 결국 그는 화산에 남았고, 그 화산이 이젠 무당의 턱 끝에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 모든 게 화산신룡의 공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저 화산신룡의 존재가 없었다면, 화산의 입지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 후에도 그는 승승장구하며 명성을 날려 왔습니다. 이제는 화산신룡이라는 이름 앞에 천하제일후기지수는 물론이고, 백 년 내 제일기재라는 수식어마저 붙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무진은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되갚는 데에도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

“되레 고마운 마음입니다. 그가 나태해지지 않았기에 저는 계속 가슴 한편에 그를 두고 수련할 수 있었습니다. 저보다 어린 이를 목표로 삼는다는 게 조금 부끄러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부끄러울 것 없다.”

허산자가 딱 잘라 말했다.

“강호에선 나이도, 출신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올곧고 누가 더 강하냐는 것뿐이다.”

“예, 장로님.”

허산자가 손을 뻗어 무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어릴 적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기재들은 한 번의 패배로 나락에 빠지기 쉽다. 승승장구할 때는 알지 못했던 ‘두려움’을 알아 버리기 때문이다.

흔치 않은 패배에 상심할 만도 한데,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거목처럼 스스로를 지켜 준 무진이 더없이 기특하고 기꺼운 허산자였다.

‘이건 확실히 화산신룡에게 고마워해야겠군.’

덕분에 무당은 앞으로의 무당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동량을 얻은 셈이었다.

“진현이 녀석은 어떠하더냐?”

“저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됐다.”

허산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소리를 살짝 낮추었다.

“하나 네게는 미안하게 됐구나. 상황을 본다면 네게 설욕의 기회를 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상황의 여의치가 않다.”

“괘념치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사문이지, 제가 아닙니다.”

무진 역시 이번 비무에서 자신의 상대가 청명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로님.”

“음?”

“허공 장로님께서 정말 비무에 나서십니까?”

“그럴 것이다.”

“세파에 관심이 없으셨던 분이…….”

우려 섞인 목소리에 허산자는 나지막이 웃었다.

“장로치고 세파에 관심이 있는 이가 있겠느냐? 내가 이상한 게지.”

“그도 그렇습니다만.”

“골치 아픈 녀석이지만, 장문인께서 직접 말씀하신 이상은 움직이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놈은 그저 이곳까지 오기만 하면 된다.”

선뜻 이해하지 못한 무진이 눈으로 의문을 표하자 허산자가 빙그레 웃었다.

“그 녀석의 호승심을 생각한다면, 검을 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이다. 녀석은 과거 무당을 압도……. 아니, 무당과 견줄 수 있다 불렸던 화산의 매화검법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아아.”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무당 제일의 무귀라 불리는 허공이라면 필시 매화검법에 큰 관심을 보일 것이었다.

허공이 무당제일검은 아니라지만, 언젠가는 무당제일검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이다. 그가 장로 중 가장 어리지 않고 다른 장로들과 비슷한 연배였다면, 지금쯤 무당제일검의 명성은 그의 것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허산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허공이 화산신룡을 꺾는 것은 자랑할 일도 내세울 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 화산신룡을 상대하기 위해서 무당의 장로까지 나서야 한다는 건 남 앞에서 말하기도 힘들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다.”

“…….”

“아무리 압도적으로 이긴다고 해도 결국 손가락질당하게 될 것이다.”

무진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의 삼대제자와 무당의 장로.

누가 들어도 검을 섞는 것 자체가 괴이한 일이다. 설사 청명이 허공을 상대로 손도 써 보지 못하고 패한다 해도 그 명성은 조금도 낮아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무당의 장로가 그 상대였다는 점 때문에 명성이 더 오른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너희가 해 주어야 한다.”

허산자가 단호한 눈으로 무진을 바라보았다.

“일대제자의 신분으로 화산의 이대제자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릴 거란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하나 이 승부는 우리가 화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리는 게 목적이 아니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일. 우리가 천하에 알려야 할 것은 화산의 명성이 지금 너무 과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

“화산에는 감히 너희를 상대할 이가 없다는 것을 천하만민에게 알려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무진이 단호한 눈으로 답했다.

“저 개인의 원한은 소사(小事)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문의 명예입니다. 화산은 아직 무당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함을 제가 이 검으로 증명하겠습니다.”

실로 듬직한 대답이었다. 허산자는 기꺼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듬직하게 자란 제자를 보는 것만큼 뿌듯한 일은 없을 것이었다.

아마 화산 역시 자신들의 제자를 지금 허산자와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겠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문파의 미래를 짊어질 이들이 가진 힘과 기세는 화산 쪽이 우월하다.

허산자 역시 이번에 화산의 제자들을 직접 본 후 실감했다. 도가답지 않은 탈속함과 자유분방함은 영 못마땅했지만, 그들 하나하나에게선 단단한 힘과 의지가 느껴졌다.

여기서 발생한 초조함이 허산자로 하여금 별것 아닌 도발에 넘어가도록 만들었다. 이대로 몇십 년이 더 지나면 저 화산신룡의 말이 정말 사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말이다.

“이 비무에서 모두 털어 내야지.”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허산자는 비무대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생각보다 일이 요란해졌지만, 저들 스스로 망신을 자처하겠다는데 우리가 굳이 말릴 필요는 없을 터. 아이들에게 말해 무당과 화산의 비무가 있음을 알리고 구경꾼들을 모으도록 해라.”

“대대적으로 말입니까?”

조금 당황한 듯한 제자의 물음에 허산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는 이들에게 진정한 도가의 명맥을 잇는 문파가 어디인지를 알려 주어야겠지. 사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은인자중한 면이 있다. 내세우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았어야 하는데…….”

화산 덕분에 그걸 알게 되었다.

“움직이거라.”

“예!”

몸을 돌려 멀어지는 무진을 가만히 바라보던 허산자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판이 커져 관객이 생기고 적당한 겨룸이 거창한 비무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모두 이기기만 하면 그들에게 이득으로 돌아올 일이었다.

그리고 무당의 일대제자들이 화산의 이대제자들에게 패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총명한 화산신룡이 왜 제 무덤을 파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그래. 모든 것은 완벽하다.

그런데…….

‘왜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든단 말인가?’

허산자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돌을 깎아 만든 차가운 비무대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 * *

“관객들도 다 왔고.”

“생각 이상으로 많이 왔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입니다.”

“으음, 그래. 그렇구나. 사람들이 무당과 화산의 비무에 이리 관심을 보일 줄이야.”

허산자는 어마어마하게 몰려든 인파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무당의 명성만으로는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일방적인 승부라는 건 보통 맥 빠지는 일이고 굳이 귀한 시간을 써 가며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다시 말하면 이곳에 몰려든 이들은 무당과 화산의 비무가 나름 격이 맞다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화산이 최근 명성을 얻고 있다고는 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허도진인이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있었는지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이쪽의 준비도 모두 끝나지 않았느냐?”

“예! 만전입니다.”

“……허공 놈이야 곧 도착할 테고.”

“…….”

허산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장문인이 그리 신신당부하셨건만, 장로라는 놈이…….’

하기야 허공은 원래 그런 놈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럼 준비는 다 끝나지 않았느냐?”

“예.”

“화산에도 이미 비무 시작 시간을 말해 주었고.”

“예. 답변까지 들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예.”

“……화산은 왜 안 오는 것이냐?”

“…….”

허산자의 안면 근육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이 예의가 뭔지도 모르는 놈들 같으니.’

벌써 약속한 시간으로부터 한 식경은 지났다.

도를 알고 예의를 아는 것들이라면, 약속된 비무 시간을 이리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애초에 그들이 무례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다시 가 볼까요?”

“됐다!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재촉을 한단 말이냐!”

허산자는 언짢은 기색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꾸만 말리는 기분이구나.’

이건 속이 빤한 수작이었다. 기다리는 이들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어서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겠다는 얕은 잔꾀겠지.

‘그래도 역사가 있는 도문이라는 것들이 이리 얕은 수작을…….’

더 짜증이 나는 건, 수작을 부리는 그들이 아니라 속내를 빤히 알면서도 자꾸만 초조해지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의 뒤쪽에 도열해 있는 무당 제자들의 얼굴에도 짜증과 초조함이 어려 있었다.

“무량수불.”

도호를 외어 마음을 진정시킨 허산자가 막 입을 열어 제자들을 달래려는 순간이었다.

“온다!”

“저기 화산이다!”

“대별채를 무찌르고 무한에 재물을 풀어 주신 분들 아닌가!”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순간 열화와 같이 터져 나오는 함성에 허산자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화산의 제자들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진정 허산자를 놀라게 한 것은 화산의 등장이 아니라 관객들의 저 반응이었다.

“화산! 화산! 화산!”

“화산파 만세!”

화산을 향한 환호가 온 사방에서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이, 이렇게나?’

화산이 민심을 적잖이 사로잡았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래도 무당이 호북을 지켜 온 세월이 벌써 몇 해인데, 이제 겨우 얼굴을 들이민 화산을 저리 열렬하게 응원한단 말인가?

심지어 상대가 무당인데도!

허산자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화산은 자유분방한 걸음으로 휘적휘적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거, 다시 보니 더 반갑습니다.”

선두에 선 화산신룡이 동네 왈패처럼 손을 흔들어 왔다.

“잘 주무셨어요? 비무 끝난 후에는 잠을 통 못 주무실 테니 미리 잘 자 뒀어야 할 텐데.”

“…….”

허산자의 머릿속에서 이성이 홀연히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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