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9화. 산은 넘어야 의미가 있는 거지. (4)
현상은 주위를 둘러싼 제자들을 쭉 돌아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빛에 단호한 입매. 거기에 의지견정하게 꽉 쥔 주먹들을 보고 있으니…….
‘믿을 놈이 하나 없구나.’
왜 이리 불안한가?
“끄응. 대화는 다들 들었겠지.”
“예, 장로님.”
“한판 붙자는 것 같은데…….”
현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장문인께서 계시지 않은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내 영 불안을 떨칠 수가 없구나. 어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뭘 어쩝니까.”
옆에서 현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상황을 보니, 못 하겠다고 했다가는 개망신만 당하고 돌아가야 할 판인데. 그럼 호북까지 와서 한 고생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명성을 떨치고 돌아가야 할 판에 망신만 당하고 돌아가는 게 말이나 됩니까?”
“패하면?”
“지는 것보다 수치스러운 게 걸어온 싸움을 피해 달아나는 겁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그리 대단한 문파였습니까? 무당에 지는 게 뭐 그리 창피한 일이라고요.”
“으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의견을 구하기는 했지만, 현상이 생각하기에도 여기에 퇴로 따윈 없었다. 원래 비무든 싸움이든 한쪽에서 작정하고 달려들면 피할 방법이 존재하질 않는다.
“하지만, 장로님.”
그때 잠자코 있던 운암이 입을 열었다.
“저쪽의 면면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일대제자들입니다. 이쪽의 사정을 빤히 알면서도 일대제자들을 이끌고 온 것은 정당한 비무를 하지 않겠다는 수작입니다.”
“……그렇겠지.”
무어라 더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운암이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이대제자가 주력인 화산과 비무를 하겠다면서 왜 일대제자를 이끌고 왔냐고 충분히 따질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화산의 일대제자들 역시 지금 이곳에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저쪽에서 그럼 화산도 일대제자를 내보내면 되지 않냐고 나온다면 대답할 말이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운암아…….”
현상이 고개 숙인 그를 위로하려는데, 순간 심통이 잔뜩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뭐 대단한 놈들 상대한다고!”
“……응?”
막아서는 모든 이들을 떨쳐 낸 청명이 성큼성큼 걸어와 현상의 앞쪽에 쪼그려 앉았다.
“장로도 아니고 일대제자 상대하는데, 쪽팔리게 사숙조들까지 나서요?”
“…….”
“이제 슬슬 뼈마디도 아프실 텐데, 뒤에서 구경이나 하시죠. 젊고 팔팔한 놈들 천진데 뭐 하러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겠어요? 이거 하나 감당 못 할거면 혀 깨물고 죽어야지! 지금까지 한 수련이 얼만데!”
그러자 그 젊고 팔팔한 놈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맞지.”
“뭐 무당 상대하는 데 사숙들까지.”
“저 정도는 저희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봐야 무당이지.”
운암이 슬쩍 입술을 짓씹었다.
‘망할 놈들 같으니라고.’
한 번쯤 원망할 만도 한데, 누구도 그들을 탓하려 들지 않는다.
하긴 이놈들은 원래 그런 놈들이었다.
겉으로야 껄렁하고 위아래도 없어 보이지만, 자신들의 무학이 운자 배를 진즉에 추월했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예의 없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과 맞먹으려 든 적도 없었다.
외양만 강해 보이지, 속은 여리기 짝이 없는 놈들이다.
“사숙.”
앞으로 나선 백천이 단호한 얼굴로 운암을 바라보았다.
“저희가 사숙들께 배운 가르침이 있습니다. 결코 지지 않을 테니 믿어 주십시오.”
“……그래.”
운암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백천이 고개를 돌려 현상과 시선을 마주했다.
“저희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할 수 있겠느냐?”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이 일은 명백히 후자입니다.”
“…….”
“이기겠다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화산의 제자로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릴 일은 없을 겁니다.”
모든 제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별채와의 격전을 통해 한층 더 강해진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가슴이 먹먹해지는 현상이었다.
‘장문인께서 이걸 보셨어야 하는데.’
“장문인께서 너희를 자랑…….”
“아, 뭐 싸움박질 앞두고 이리 축축 처져! 속 시끄럽게!”
“…….”
여하튼 저 새끼는 진짜…….
청명이 입가를 씰룩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봐야 싸움박질이지. 단순하게 생각해. 그냥 덤비면 까 버리면 되는 거야.”
“아까는 얕보지 말라더니.”
“그거랑 이거랑 같아?”
퉁명스럽게 대꾸한 청명이 목소리를 살짝 내리깔았다.
“언제든 한 번은 붙었어야 할 놈들이야. 그리고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 어떤 일이든 우리가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아.”
그 말이 와 닿았는지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청명은 목을 한차례 꺾으며 씨익 웃었다.
“감히 화산에 도전장을 내민 걸 후회하게 해 주자고!”
이제는 의미 같은 건 필요 없다.
돌아가는 상황을 따져 물을 필요도 없다. 남은 것은 하나. 누가 더 강한지 결판을 내는 것뿐이다.
“읏차.”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봤자 무당이지. 새끼들이 언제부터 잘나갔다고.”
그래도 같은 도가라고 좀 덜 패 줬더니, 이 새끼들이……. 태극검제 그 새끼 얼굴을 아주 찐빵으로 만들어 버렸어야 하는 건데.
콧김을 내뿜은 그는 무당 쪽을 노려보았다.
“뭐 좋아. 전에 못 했으면 지금 하면 되는 거니까.”
“응?”
“다들 잘 들어!”
청명이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오늘 지는 놈은 섬서까지 기어서 간다.”
“……청명아. 뛰어서를 잘못 말했다.”
“아니. 기어서 간다고! 기어서!”
“…….”
저 마귀 같은 새끼.
아니, 왜 무당이랑 싸우는데 저 새끼가 더 싫지? 왜?
안타깝게도 청명의 광기는 이미 말릴 수 있는 단계를 훌쩍 넘어서 있었다. 두 눈에서 번들거리는 살기를 본 화산의 제자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어디 뒈지고 싶으면 져 봐. 내가 평생 동안 그 패배 잊지 못하게, 뼈가 쑤시도록 후회하게 해 줄 테니까.”
‘죽어도 이겨야 된다.’
‘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냥 화산파를 떠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전에도 말했지만, 청명이 놈이 숱하게 엿 같은 점 중에서도 가장 최악인 것은 쓸데없이 뱉은 말을 지킨다는 점이었다.
“세상에는 져도 되는 쪽이 있고, 지면 안 되는 쪽이 있어. 뭐? 무당한테 져? 무당한테? 화산에 묻혀 있던 선대들이 관 뚜껑 뜯고 뛰쳐나와서 매화검법으로 싸대기를 처날릴 일이지!”
그거 아프겠네……. 진짜 아프겠어…….
“장로님들!”
“으, 으응?”
청명의 기세에 눌려 있던 현상과 현영이 움찔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방식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일단 붙자고 하시죠.”
“……청명아. 내가 너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만, 정말 괜찮겠느냐?”
“어차피 붙을 거면 화끈한 게 낫죠.”
청명이 씨익 웃었다.
“좋게 생각하세요. 명성 날리러 온 건데 무당까지 잡고 돌아가면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죠. 멧돼지 잡으러 왔다가 범 잡아 돌아가는 거 아니에요?”
그건 맞는 말이다.
대별채의 명성이 아무리 높고 녹림의 명성이 아무리 높다고는 하나, 감히 무당과 비견될 건 아니었다.
상황이 꼬여서 여기까지 온 건 맞지만, 만약 이 상황을 극복해 낼 수만 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어를 잡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겼을 때의 이야기 아니더냐?”
“이기면 되죠.”
“아니, 그래도…….”
“장로님.”
눈을 차게 가라앉힌 청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으음?”
“우리는 화산파잖아요.”
“…….”
“화산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오는 도전을 받지 않을 순 없죠.”
현상이 가만히 청명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화산의 장로. 저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을 굳히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 알겠다.”
결심을 세우고 몸을 돌리던 현상은 다시 불러오는 청명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 대신.”
“응?”
다시 돌아본 청명은 더없이 사악한 미소를 씨익 내걸고 있었다.
“하나만 더요.”
“…….”
“으음.”
잠시 후, 현상과 현영이 논의를 끝내고 걸어 나왔다. 허산자는 얼굴을 굳히고는 그들을 맞아 중앙으로 향했다.
가운데 서로 마주 선 세 사람이 빙그레 미소를 교환했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현상이 살짝 눈을 감았다 뜨고는 허산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나, 귀파에서 어렵게 건네신 제안을 물리치는 것 역시 예의는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이니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역시.’
허산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명예를 아는 문파라면, 그리고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면 여기에서 물러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내심은 화산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발을 빼 버리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결국은 순리대로 일이 흐른 것이다.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살짝 상대를 추켜세워 준 허산자가 웃으며 물었다.
“하면, 방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연승은 어떻습니까?”
“흐음.”
허산자가 고개를 저었다.
“연승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건 서로 배우자는 취지이니,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의 검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의도와 맞아떨어지지 않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속내는 그게 아니었다.
그 역시 과거 종남과 화산의 비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비무대회에서 청명이 보여 준 활약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 혹여라도 청명이 나서서 벌어질 변수를 최대한 차단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흐음. 그렇군요.”
하지만 현상 역시 그건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선선히 발을 뺐다.
“방식이야 무당에서 좋게 정하면 될 일입니다. 대신 하나는 이쪽에서 정하게 해 주십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비무가 벌어지는 장소 말입니다.”
“……예?”
현상이 잠깐 주저하는 듯하더니 에라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질렀다.
“이곳이 아니라 무한에서 가장 큰 광장에서 비무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런 비무 역시 쉬이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니, 무한의 모든 이들이 보고 즐기게 할 수 있다면 산적들의 등쌀에 신음해 왔던 이들에게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어, 어디라고 하셨습니까?”
“무한 중앙입니다.”
한번 질러 버린 현상은 이제 더 이상 거칠 게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여기는 저희가 어우러지기에는 너무 좁지 않습니까? 금선상단에도 폐를 끼치는 게 됩니다.”
“…….”
“그러니 차라리 제대로 하시지요.”
현상의 귓가에 청명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처럼 계속 들려왔다.
- 일을 벌이려면 제대로 크게 벌여야 뒤끝이 없어요.
‘그래, 그 말은 맞지.’
이기기만 한다면 최고지! 이기기만!
‘이젠 나도 모르겠다!’
허산자를 바라보는 현상의 눈엔 핏발이 서 있었다. 이에 허산자는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 참으로 좋은 의견이지만, 너무 많은 이들이 보게 되면…….”
“왜.”
“……예?”
“자신 없으십니까?”
이쯤 되니 허산자의 눈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좋습니다! 해보지요! 무한 중앙에 비무대를 마련하겠습니다!”
일이 끝도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화산의 제자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
“……이래도 되나?”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이게 비무대회가 아닌데 비무대는 또 뭐고…… 관객은 또 뭐고…….
그때 줄곧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청명이 히죽 웃었다.
“사형들. 화산이랑 무당이 사이가 왜 나쁜 줄 알아?”
“……왜?”
“저러다 나빠진 거야.”
“…….”
“역사는 반복되는 거지.”
그리고 반복해서 처맞겠지. 말코 새끼들.
이리하여 화산과 무당의 비무가 생각보다 몇 배는 더 큰 규모로 벌어지게 되었다. 허도진인의 의도와는 조금 다르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