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화. 나는 배분 같은 건 모르고! (1)
“이…….”
허산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대체 이놈들은 뭐 하는 문파인가?’
문파간의 약속이란 개인의 약속보다 더 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리 약속한 시간을 뻔뻔스레 어겨 놓고는 어찌 저리 태연자약할 수 있단 말인가?
“후우.”
그는 노기를 누르며 짧은 한숨을 토했다.
이윽고 가볍게 기운을 돌려 마음을 진정시킨 후 차가운 눈으로 청명의 뒤에 있는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청명을 철저히 무시한 채로 말이다.
“화산이라면 그래도 한때는 명문이라 불렸던 문파이거늘, 이리 약속을 가벼이 여기실 줄은 몰랐습니다.”
뾰족한 말에 현상의 얼굴에는 겸연쩍은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곁에 서 있던 현영이 태연하게 한 발짝 나서서 대신 답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흐음.”
“다만, 하나 정정할 것이 있습니다.”
“……뭘 말이오?”
“화산은 한때 명문이라 불렸던 문파가 아니라 지금도 명문입니다.”
“…….”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허산자는 하도 어이가 없어 허허 웃어 버렸다.
선두에 선 화산신룡 놈이 제일 문제인 건 사실이지만, 저 뒤에 있는 것들도 크게 다를 바 없는 것들이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도인이라는 신분이 무색하게 허산자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심지어 이건 격장지계도 아니다.’
그를 흥분시키기 위해서 이만한 연기를 할 수 있다? 그럼 이들은 굳이 힘들게 무인을 할 필요도 없다. 적당한 극단 하나 차려서 여기저기를 돈다면 곧 명극단으로 소문이 나 황제의 초청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저리 출중한 연기자가 한곳에 이만큼이나 모여 있을 리가 있겠는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무당과 화산은 물과 기름처럼 절대 어우러질 수 없다는 것.
“그래도…….”
그 사실을 새삼 확인한 허산자는 평소의 그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늦었지만, 이렇게 와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혹여 오늘 비무가 취소되면 어찌하나 했습니다.”
말투야 부드럽지만 그 안에 숨은 뜻은 ‘잘도 달아나지 않고 여기에 얼굴을 들이밀었구나.’에 가까웠다.
그 말을 들은 청명이 피식 웃으며 장로들 대신 답했다.
“뭐 대단한 애들 상대한다고.”
“……소도장. 내 타문의 일이라 웬만해서는 입을 떼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어른들이 말하는 데 그리 끼어드는 건 도리가 아닐세.”
“아, 우린 괜찮아요.”
“지금 뭐라 했는가?”
“화산은 그래도 된다고요. 그렇게 고리타분하지 않거든요. 역사도 짧은 양반들이 뭐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그러세요. 그런 걸 따지시려면 선조가 되는 문파에게 예를 표하시든가.”
일순 허산자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또 그 망할 놈의 화룡진인을 들먹여 대는데 어찌 화가 치밀지 않겠는가?
“그 뜬소문을……!”
허산자가 막 뭐라 하려는 순간, 뒤쪽에 서 있던 무진이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채었다.
그 작고 가벼운 동작에 자신의 실책을 알아챈 허산자는 화를 누르며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말을 오래 섞을수록 상대에게 말려든다면 대화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자존심만이 강한 이라면 어린놈과의 말싸움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겠지만, 다행히 허산자는 자존심보다 문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뭐 그렇게 얼굴 붉히지 말자고요.”
“…….”
청명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건 두 문파간의 우호를 다지기 위한 자리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지금 그렇게 씩씩거리시는 것만 보면 뭐 자존심 걸고 생사결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설마 그런 의도로 오신 건 아니죠?”
“물론 아니네.”
“그럼 웃어야죠.”
보란 듯이 활짝 웃는 청명을 보던 허산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게 잠시간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는 명백하게 청명을 외면하고 현상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제 비무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저희는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 굳이 오래 끌 것 없겠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두 사람이 서로 포권을 했다. 손을 내리자마자 허산자는 찬바람이 나도록 몸을 획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런 그의 뒤를 지키던 무진은 허산자를 따라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서서 청명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오, 도장.”
“엥?”
청명이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절 아세요?”
“…….”
무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에 딱히 적의 같은 건 없었다.
“일전에 승부를 겨루었던 무진이요.”
“무진……. 무진……. 아!”
곰곰이 생각하던 청명이 뭔가 떠오른 듯 손뼉을 짝 쳤다.
“그때, 그 이대제자들 후려 패고 나니 오셨던 일대제자 분!”
“……그렇소이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이에요? 진짜 반갑네요.”
청명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붕붕 흔들자 무진도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아무래도 그때 내 검이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듯하오.”
“아,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워낙에 다른 사람 얼굴을 잘 기억을 못해서. 게다가 편하게 통성명이나 하고 있을 상황도 아니었고.”
“하긴, 복면도 쓰고 계셨으니까.”
“아, 그……. 어?”
청명의 눈이 한차례 거세게 흔들렸다.
“근데 제가 그때 그놈인지 어떻게 아셨어요?”
“……바보가 아니면 누가 모르겠소.”
당황한 청명이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 백천 일행이 일제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모를 거라 생각한 거냐?”
“사람들 눈이 다 옹이구멍이라고 생각했겠지.”
“고개 돌려. 우리까지 창피하니까.”
청명은 뚱한 얼굴로 입술을 삐쭉대며 다시 무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요? 지난 일을 들춰서 항의라도 하시게요?”
“이미 지난 일을 항의해서 뭐 하겠소? 결국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을.”
청명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무당은 여전히 혼원단에 대해 모른다. 만일 그때 청명이 혼원단을 발견했다는 것을 이들이 알았다면, 지금처럼 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 왜?”
“그저 소도장과 대화를 한번 나눠 보고 싶었소.”
청명을 바라보는 무진의 눈은 한껏 진중했다.
“이번 비무에서 내가 소도장을 상대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소도장의 상대가 아닌 모양이오.”
“호오, 그래요?”
“하나 그렇다 해서 우리의 인연이 끝난 것은 아닐 터. 언젠가 내가 도전할 그날까지 그 날카로운 검을 잃지 않길 바라겠소.”
정중하되 호기로운 말에, 청명은 재미있단 얼굴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따라오기 힘들 텐데?”
“힘들다 해서 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
“그럼.”
무진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멀어졌다.
그러자 뒤에서 듣기만 하던 백천 일행이 청명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무진이라면 무당삼검 중 하나잖아?”
“그렇지.”
“……그럼 너 저 사람하고도 싸웠던 거냐?”
“내가 말을 안 했었나?”
백천 무리는 황망한 얼굴로 청명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이놈은 대체 무슨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는 거지?
“강해 보이는데.”
“그러네.”
청명은 동의하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무진이라.”
전에 싸웠던 무진의 검이 아직 그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오늘 만난 무진은 그때의 그와 또 달랐다. 과거의 무진에게서 조용한 연못이 연상되었다면, 지금의 무진에게서는 물안개 가득한 드넓은 호수가 보였다.
“역시 쉽게 보진 못하겠네. 무당은 무당이라는 건가?”
청명이 히죽 웃고는 빙글 몸을 돌렸다.
“자, 이제 준비는 끝났고. 싸울 준비는 됐겠지?”
하지만 그 말에 돌아오는 반응은 영 곱지 못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어디서 입을 털어!”
“네가 지붕 위에서 처자빠져 자지만 않았어도 진즉에 도착했을 것 아냐!”
“내가 창피해서 살 수가 없다, 살 수가 없어! 이게 뭔 꼴이냐! 비무까지 약속해 놓고 지각이 말이나 되냐, 어?”
비처럼 쏟아지는 원성에도 청명은 시큰둥한 얼굴로 잘 안 들린다는 듯 연신 귀를 후볐다.
“뭐 사소한 데에 그렇게 신경을 써. 사람이 살다 보면 좀 늦을 수도 있는 거지.”
“남이 늦으면 패 죽인다고 난리 칠 놈이.”
“어떻게 뇌가 저렇게 지 좋은 방향으로만 돌아갈까……. 저것도 재주다, 재주야.”
현영이 웃으며 그런 제자들을 말렸다.
“진정들 하거라. 어쨌든 이제 비무를 치러야 하지 않느냐?”
“끄응……. 예, 장로님.”
“어휴.”
입으로는 한숨을 쉬면서도, 현영은 내심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저 무당을 상대로 비무를 치르는데도 아직 농담을 할 여유가 남아 있구나.’
간덩이가 큰 것인지, 아니면 실력에 자신이 붙은 것인지. 여하튼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그리 나쁘지 않은 현상이었다.
“십 선승이라고 하셨죠?”
“그렇다.”
현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십 전이 아니라 십 선승.
열 번을 싸우는 게 아니라 열 번을 먼저 이긴 쪽이 승리를 가져가는 방식이다. 최소 열 번에서 최대 열아홉 번의 비무가 벌어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열 번을 싸우는 것보단 문파간의 힘의 우열이 좀 더 잘 드러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상대를 정하지 않은 십 선승이라. 저쪽도 진심인가 봐요.”
청명이 히죽 웃었다.
얼마 전까지의 무당이었다면 절대 이런 방식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방식을 제안하고 저런 기세를 뿜는 걸로 보아 이번 기회에 화산을 반드시 눌러 놓겠다는 악의가 느껴졌다.
“뭐 나쁠 것 없지.”
연신 히죽대는 청명에게로 백천과 운검이 다가와 물었다.
“누굴 선으로 내보낼 작정이냐?”
“우리는 저들보다 내보낼 수 있는 이들의 수가 적다. 잘 생각해서 내보내야 한다.”
“선이요?”
“처음 나가는 이 말이다.”
청명은 빤한 질문을 들은 사람처럼 피식 웃었다.
“뭐 그런 걸 묻고 그래요?”
“응?”
“이건 선승제잖아요. 그럼 일반적인 비무보다 기세가 백배는 더 중요하죠.”
“그렇지.”
“그럼 초반부터 완전히 상대의 기세를 눌러 놓거나, 열받아 뒈지게 만들어야 유리하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그래. 그렇다. 그래서 누굴 보내겠단 말이냐?”
“에이, 사숙조도. 우리 중에서 나가서 이겼을 때 사람 속을 제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군데요?”
“그야…….”
정확히 꽂혀 오는 운검의 눈빛에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 빼고요.”
“으음. 그럼 좀 고민이 되는데…….”
“에이. 한 사람밖에 없지.”
청명이 고개를 돌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 방향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 선 이를 보는 순간, 모두가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열은 받겠네.”
“입을 다물면 열까진 안 받겠지만, 다물 리 없지.”
“……찬성. 찬성이요.”
“응?”
정작 시선을 받은 이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나가거라.”
허산자의 말에 진현은 얼굴을 굳히며 답했다.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숙들이 계신데, 제가 선으로 서는 것이 괜찮을지 걱정됩니다.”
“상대는 화산이다. 처음부터 일대제자가 나서면 모양이 좋지 않다. 어차피 승부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럼 가장 모양새가 좋은 방식을 택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진현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네가 이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 장로님. 걱정 마십시오.”
결연한 목소리로 말한 그는 송문고검을 움켜쥐고 비무대로 올랐다. 아니, 오르려 했다.
폴짝.
“……응?”
그런데 누군가가 먼저 경쾌하게 비무대로 뛰어오르더니 이쪽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왔다. 진현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선수를 뺏겼군.’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첫 비무만 이겨 낸다면 기선을 제압할 수 있을 테니까.
“믿는다.”
“예, 장로님!”
그가 막 비무대 위에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에이, 아니지.”
응?
진현에게 응원의 말을 해 주려던 무당의 제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비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그쪽은 좀 심심하고, 이왕이면 제대로 붙어야지.”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화산의 검수가 뚱한 눈으로 진현을 바라보다가 대뜸 무진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거기, 무당삼검인가 뭔가로 유명하신 것 같은데 저도 마침 화산오검으로 불리는 사람이니까 같은 검끼리 한판 떠 봅시다.”
“…….”
화산오검 조걸이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무진을 똑바로 가리켰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언행이었다. 무당 제자들의 얼굴에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노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