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541화 (539/1,567)

541화. 장문사형. 애들이 엄청 잘 컸어요. (1)

빙궁이 마교와 싸워 이겼다는 이야기는 금세 북해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럼 그 시커먼 놈들이 마교 놈들이었단 말입니까?”

“자네 몰랐나?”

“저 같은 무지렁이가 뭘 알겠습니까? 그럼 형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쉬쉬하긴 했어도, 어쨌든 소문이 돌기는 하지 않았는가? 여하튼 이번에 새로 궁주의 자리에 오르신 전전대 궁주님의 자제분께서 빙궁의 무사들을 이끌고 가, 마교 놈들을 모두 무찌르셨다는구먼.”

“허어. 그럼 이제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도 없겠군요.”

“그렇지, 그렇지! 그리고 괴질이 더 돌 일도 없다는 뜻이지.”

“지, 진짜로 그렇게 될까요?”

“쯧쯧. 이 사람 속고만 살았나?”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이가 혀를 차고는 말을 이어 갔다.

“빙궁에 들었던 이들이 눈으로 보고 확인한 일일세. 이번에 빙궁도 피해가 만만찮았던 모양이야. 사상자가 넘쳐난다더구먼, 지금 약재와 물품들이 빙궁으로 대량으로 들어가고 있다지 않은가.”

“그럼 정말로.......”

“그렇다니까.”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소식을 들은 이들은 이제 그들의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에 하나같이 감격했다. 이제 더는 집 밖으로 나갔다가 누군가에게 잡혀 갈까 떨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궁주님이 바뀌니 세상이 달라지는군.”

“전전대 궁주님의 자제분이라고 하지 않는가? 생각해 보면 전전대 궁주님 때는 살기가 나쁘지 않았어.”

“호부 아래 견자 없는 법이지. 아암.”

사람들이 입을 모아 설소백을 칭송하는 가운데, 중앙에서 대화를 주도하던 나이 든 이의 표정이 슬쩍 미묘해졌다.

“그게 말일세.”

“예?”

“그.........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모든 일을 주도한 이가 새 궁주님이 아니라 중원에서 온 이들이라 하더군.”

“중원이요?”

“거 있지 않은가. 그 조가촌 촌장님께 괴질의 원인을 알려 주고 갔다던 이방인들.”

“아!”

“아! 그 중원인들!”

몰려든 이들은 저마다 들어 본 적이 있다며 손뼉을 쳤다.

북해에 돌던 영문 모를 괴질 치료법을 웬 이방인들이 알려 주고 갔다는 소문이 얼마 전 북해를 크게 휩쓸지 않았던가?

조가촌 촌장이 치료법을 사방으로 알린 덕분에 괴질을 앓던 많은 이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 중원인들이 빙궁을 선두에서 이끌고 마교와 싸웠다더구먼.”

“에이.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들이 해 봐야 몇이나 된다고?”

“어허, 그게 어디 내가 막 지어낸 말이겠는가? 빙궁의 무사님들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이 소리야!”

“무사님들이?”

코웃음을 치던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무사님들이 말했다는데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 아니 그들이 대체 누구기에?”

“들었는데, 뭐라더라? 호산? 화....... 으음. 아무튼 뭐 중원에 있는 도가 문파라던데.”

“구파일방이 아니고요?”

“그렇다더군.”

“허어.....”

이야기를 나누던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믿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그렇다고 덜컥 믿을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 중원인들에게 평생 감사해야겠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북해에 불어온 훈풍은 빙궁뿐만이 아니라 북해인들의 삶조차 녹이기 시작했다.

화산의 제자들은 빙궁을 구해 내었고, 또한 북해를 구해 내었다. 그러니 북해빙궁의 더없이 귀빈으로 대접받으며 더없는 향락을 누릴 자격이 충분했다.

......당연히 그랬어야 했는데.

“......걸.”

“네.”

“물.”

“......”

“걸아!”

“아, 왜요!”

“...얼음. 끄응, 얼음 좀 가져오너라. 몸이 쑤셔 죽겠다.”

“아니.......”

"걸아. 가서 붕대 좀 다시........”

“카아아악!”

참다못한 조걸이 들고 있던 붕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니, 뭔 사흘째 사람을 부려먹습니까! 저도 환자라고요, 환자! 이 붕대 안 보이십니까?”

그러자 침상에 죽은 듯 누워 있던 백천이 고개만 슬쩍 들어 올렸다. 머리와 얼굴에 붕대를 친친 감은 채 기다란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삐져나온 몰골이 괴기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럼 내가 가리?”

“........”

붕대 사이로 보이는 두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 쭈글쭈글 작아진 조걸이 웅얼거렸다.

“아니...... 그 말이 아니라...... 그래도 저도 환잔데.”

“너는 걸을 수는 있잖아?”

“소, 소소도 있잖습니까! 소소도 다리가 멀쩡한데.”

“소소는 의원이지 않느냐. 의원한테 물심부름하라 그럴까?”

“아, 아니, 그래도.......”

그 순간이었다.

“걸아.”

“예?”

백천의 옆 침상에 시체처럼 누워 있던 윤종이 지옥에서 올라오는 양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모가지 뒤로 돌려 버리기 전에 얼음....... 가져오라고.”

“.......”

“양쪽 뺨이 너무 아파 뒈질 것 같으니까, 이 새끼야.”

“.......네.”

이를 갈아붙이는 그 모습에 조걸은 얌전히 목을 움츠렸다. 지은 죄가 있으니 뭐라 변명조차 해 볼 수 없었다.

삽시간에 쭈구리가 된 그는 궁시렁대면서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렸어야 하는 건데....... 왜 다리는 멀쩡해 가지고.”

“내 다리?”

“아니요! 제 다리요, 제 다리! 제 다리 말입니다!”

눈에 불을 켜고 다시 조걸을 구박하려던 윤종이 허리를 부여잡더니 힘없이 다시 몸을 뉘었다.

“끄으으....”

드러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맥없이 풀렸다.

“사숙....”

“왜?”

“뒤질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난 이제 감각도 없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도 모르겠어.”

전투의 여파는 전투가 끝난 뒤에 찾아왔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몇 번은 죽고도 남았을 부상이었다. 나름 고통에는 익숙하다지만, 이만한 부상을 버텨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빌어먹을, 마화인지 뭔지........”

백천은 팔을 들어 붕대 사이로 보이는 거뭇거뭇한 반점들을 보다 이를 박박 갈았다.

마화(魔花).

마기로 인한 상처는 지속적으로 육체를 갉아먹는다. 상처 입은 곳마다 남은 마화가 바로 그 증거였다.

덕분에 육체를 회복하는 데에 쓰였어야 할 내력이 마화를 몰아내는 데 소모되고 있었다.

이러니 당연히 회복이 더딜 수밖에.

“거머리 같은 놈들..........”

“그러니까요.”

그때, 한쪽 구석 침상에 누워 있던 혜연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슬쩍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몸이 말이 아닙니다.”

“스님, 좀 괜찮....... 푸우우웁!”

“왜 그러십....... 푸, 푸후웁!”

자연스레 혜연을 봤던 백천과 윤종은 아픔도 불사하고 황급히 시선을 다른 쪽으로 획 돌렸다. 상처들이 미친 듯이 저려 왔지만 도무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끄으읍.”

“우우우웁.”

백천과 윤종은 배를 움켜잡고 경련하며 웃다가 앓기를 반복했다.

“머, 머리.......”

“아오. 미치겠네, 머리! 끄읍.”

그도 그럴 게......... 혜연의 반질반질한 머리에 검은 꽃잎과도 같은 반점들이 얼룩덜룩 피어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커다란 땜통이 여러 개 남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죽을 것 같다.’

목숨을 걸고 싸우다 마기에 당한 상처이니 응당 걱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몸은 솔직하기 짝이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시주들?”

“아, 아니. 아닙니다, 스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천은 겨우겨우 웃음을 누르고 진정하며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끔직한 전쟁이었어.’

솔직한 심정으로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 마교 놈들도 마교 놈들이지만, 그 악마 같던 주교 놈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려 왔다.

이렇게 누워서 끙끙댈 수 있는 게 행운.......

“사고! 이것 좀 발라 보세요. 이게 저희 당문 특제 고약인데, 부은 상처에는 이게 최고예요! 제가 방금 만들었어요. 아니, 아니에요. 제가 발라 드릴 테니 그대로 계세요.”

“.......”

백천의 고개가 힘없이 돌아갔다.

유이설의 붕대를 풀고 얼굴에 고약을 잔뜩, 조심조심 발라 주는 당소소의 모습이 보였다.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소소야.”

“네?”

“그거 붓기 빼는 약이니?”

“네.”

“그럼 나도 좀....”

“아, 그렇죠.”

소소가 소매에서 고약을 하나 더 꺼내더니 백천에게 툭 던졌다.

“........”

“바르세요. 효과 좋을 거예요.”

백천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래도 내가 대사형인데.......’

이 사질 놈들은 대사형 알기를 발바닥의 때 정도로 여긴다. 예전에는 분명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이게 어쩌다가..........

‘아니, 이게 다 그 망할 놈 때문이지.’

청명을 떠올린 백천이 고개를 힘겹게 들고 당소소에게 물었다.

“그런데 소소야.”

“네?”

“청명이는 아직 차도가 없느냐?”

“........”

당소소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부상이 워낙에 심해요. 솔직히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일단 외상 치료는 대충 마쳤는데, 내상이 워낙에 심해서.........”

“음.....”

백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빠르게 의식을 되찾은 그들과는 달리, 청명은 빙궁으로 실려 온 후로 사흘 내내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워낙 부상이 중하니 그들과 같은 방을 쓰지 못하고 독방에서 따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혹시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

“....... 문제없을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청명 사형이잖아요.”

소소의 말에 백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그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윤종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역정을 냈다.

“이 새끼야, 얼음 가져오는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지천이 다 얼음인데!”

“.....얼음?”

“그....... 응?”

그래, 하고 대답하려던 윤종이 몸을 살짝 세워 문 쪽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청명이 고개를 옆으로 꺾어 대고 있었다.

“사형 많이 컸네. 나한테 심부름도 시키고.”

“.........어, 언제 왔니?”

그리고 왜 멀쩡하니? 도대체 왜?

“얼음? 그래, 얼음 좋지. 지금 줄게.”

“처, 청명아! 그게 아니라, 조걸인 줄 알았다!”

“........ 그게 더 빡치는데?”

“어?”

......어. 그럴 만하지. 어, 듣고 보니 그러네.

청명이 창가 쪽으로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얼어붙은 외벽에서 얼음덩어리를 떼어 내 윤종에게 집어 던졌다.

“아이구, 사형! 얼음 갑니다! 얼음!”

“더, 던지지 마! 아아아악!”

얼결에 얼음을 받아 낸 윤종이 상처가 벌어졌는지 비명을 지르며 침상 위를 뒹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은 쯧쯧 혀를 찼다.

“뭐 얼마나 다쳤다고 아직도 끙끙대고 있어! 약해 빠져 가지고는! 나 때는 칼 서너 방 맞은 정도는 굳이 꿰매지도 않았어! 대충 흙 발라 놓으면 낫고 그랬지!”

“.......그건 네가 거지 출신이라 그런 거고.”

“동룡이 조용히 해.”

청명은 눈살을 슬쩍 찌푸리며 몸에 감긴 붕대를 대충 잡아 뜯었다.

“에이, 뭔 붕대를 이렇게 감아 놨어! 불편하게.”

“아, 아직 풀면 안 되는.....!”

만류하려던 당소소가 순간 붕대가 풀리며 드러난 청명의 몸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입을 쩌억 벌렸다.

통째로 뜯겨 나가고 갈라져서 반드시 큰 흉이 질 거라 여겼던 몸에 벌써 새살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사람인가?”

정식 의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부상자들을 많이 봐 왔다. 그런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튼 엄살들은!”

그 순간 백천이 비척대며 몸을 일으켰다.

“.......너는 이제 다 나은 거냐?”

“나야 말짱하지.”

“....... 그래?”

침상에서 내려온 백천이 비틀대며 청명을 향해 다가갔다.

“응?”

청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건 백천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형제들 역시 말없이 침상에서 내려와 백천과 함께 천천히 청명을 둘러쌌다.

“응? 왜 이래?”

눈을 동그랗게 뜨는 청명을 향해 백천이 빙긋 웃었다.

“청명아.”

“응?”

“너는 다 나았는데, 우리는 지금 아파 뒈지겠거든?”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네 내공이 훨씬 정순하기 때문인 것 같다.”

“........ 그렇지. 근데 그게 왜?"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백천이 슬쩍 공격적으로 이를 드러냈다.

“우리도 내력이 좀 높아지면 빨리 나을 것 같다 이 말이지.”

“...... 그렇겠지. 뭐 빤한 소리를 하고 있...”

“그러니까.”

그의 눈에 광기가 돌기 시작했다.

“내놔라, 공청석유.”

“........”

“많이도 안 바란다. 한 방울. 딱 한 방울이면 된다. 한 명당 한 방울씩!”

“........”

“내놓든가. 아니면 여기서 아주 끝을 보든가.”

“........”

청명은 저를 둘러싼 사형제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딱히 미리 말을 나누진 않은 것 같은데, 백천이 움직이자마자 눈치만으로 사람의 퇴로를 차단하는 기막힌 호흡을 보고 있자니, 감격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근데...... 땡중 너는 거기 왜 끼어 있냐?

그리고.......

“....조걸 사형은 언제 왔어?”

“응? 나 지금.”

“그럼 사형은 뭔 일인 줄 알고 그러고 있는데?"

“아니, 뭔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같이 해야 할 것 같아서.”

“..... 그래?”

청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열린 창으로 하늘의 푸른빛과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사형.

장문사형.

애들이 엄청 잘 컸어요.

엄청....... 다른 의미로 엄청요.......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