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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42화 (540/1,567)

542화. 장문사형. 애들이 엄청 잘 컸어요. (2)

“이제 좀 살 것 같다.”

“몸에 힘도 좀 나고요.”

다 같이 둘러앉은 화산의 제자들과 혜연이 어깨를 돌리고 목을 꺾으며 몸을 점검했다. 확실히 몸이 많이 가뿐해졌다.

“크으, 과연 공청석유!”

“한 방울만 먹어도 효능이 끝내줍니다! 역시 영약 중의 영약!”

“아미타불. 역시 사람은 잘 먹어야…….”

하지만 청명의 얼굴은 오히려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심지어 질끈 감은 두 눈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아귀 같은 것들.’

세상에 뺏어 먹을 게 없어서 공청석유를 뺏어 먹나.

비록 혼원단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천하의 영약을 논할 때면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공청석유다.

그 귀한 것을…….

“이제 속이 시원하냐, 이제?”

“뭐래.”

청명을 바라보는 백천의 얼굴이 뚱해졌다.

“거, 그 한 방울 그것도 덜 주겠다고, 온갖 수작을 한 놈이 누군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사숙. 내 살다 살다 그렇게 작은 한 방울은 처음 봤습니다. 그렇게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 것도 능력이죠.”

“구두쇠.”

빗발치는 원성에 청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어떤 건 줄 알고!”

“네이, 네이. 쇤네들은 잘 모릅니다.”

“아, 힘이 난다! 힘이나!”

청명이 습기 어린 눈가를 훔쳤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가 내 걸 뜯기는 날이 올 줄이야.’

- 꼬시다, 이놈아.

“카아아악!”

아, 거!

아무 데서나 튀어나오지 마시라니까!

청명이 갑작스레 허공을 향해 발작했지만, 이젠 모두가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청명아.”

“응?”

“너는 괜찮으냐?”

백천의 질문에 청명이 잠깐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흐린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유분수지. 사람이 양심은 어디다 팔아먹고.”

“아니, 너는 안 먹는 것 같기에.”

“사숙 같은 약골들이야 그 정도 다친 걸로도 골골대겠지만, 나야 이 정도로는 끄떡없지!”

“그래? 그럼 약골한테 한 방울 더 베풀어 주실 생각은…….”

“손대지 마! 손모가지 날아가니까!”

금세 독 오른 살쾡이처럼 하악거리는 청명을 보며 백천이 입맛을 다시며 손을 뺐다.

“그나저나 그 귀한 공청석유를 먹었는데도 아직 몸이 완전하지 않네.”

“그만큼 많이 다쳤으니까요.”

윤종이 몸을 떨며 진저리를 쳤다. 정말이지, 영영 기억에 남을 듯한 끔찍한 싸움이었다. 등골에 소름이 내달렸다.

“여하튼 우리가 마교를 이겨 낸 거잖아.”

“심지어 주교도 잡았지!”

화산 제자들의 어깨가 한없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앞에는 사람의 어깨가 솟구치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보지 못하는 망종이 있었다.

“주교를 잡아?”

청명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이기 시작했다. 움찔한 조걸이 외쳤다.

“왜, 왜! 또 무슨 초를 치려고!”

“아니, 뭐.”

청명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착각은 자유지만 현실은 똑바로 아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우리가 잡은 주교는 제대로 된 주교도 아니야.”

“…….”

“애초에 제대로 된 주교나 제대로 된 교구라면 홀로 이렇게 외진 곳까지 떨어져 나와서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해 대고 있지는 않겠지.”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는 게 마교의 특징이라면서?”

“그거랑은 다르지.”

청명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주교를 자칭하던 그놈이 하는 말을 들어서 알겠지만, 그놈들은 마교 내에서도 배척받던 것들이야. 중앙교와 떨어져 나와서 홀로 독자 생존을 해야 했으니, 맘 편히 수련도 할 수 없었겠지.”

“그럼…….”

윤종이 슬쩍 굳어진 얼굴로 입을 뗐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진짜 주교나 진짜 마교도는 더 세다는 거냐?”

“뭐 빤한 말을 묻고 그래.”

청명이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그래도…….”

하지만 윤종은 영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눈치였다.

두 눈으로 본 마교의 힘은 말 그대로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소수에 불과한 그들 때문에 화산의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빙궁마저 완전히 멸문할 뻔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제대로 된 마교가 아니라고?

“결과만 놓고 봐.”

“응?”

“아무리 교구 하나라고는 하지만 애초에 마교의 교도가 빙궁 놈 하나에 정리당할 수준이었으면, 백 년 전에 중원이 마교에게 속절없이 밀렸겠어?”

“…….”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묘해졌다.

듣고 보니 그리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물론 빙궁이 마교를 몰아 낸 데는 화산 제자들의 활약이 있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백 년 전 중원에 그들 이상의 무인이 없었겠는가?

“우리가 처리한 건 마교 내에서도 쭉정이에 불과한 놈들이야.”

“……그렇구나.”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가 갔다.

“……진짜 마교라…….”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더없이 심각해졌다.

‘세상에 그런 놈들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었다는 거로군.’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시절들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생각하니,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천마가 더해지면…….”

윤종의 중얼거림에 청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중원을 멸문시킬 뻔했던 그 마교가 되는 거지.”

“……천마…….”

그때 조걸이 생각이 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청명아. 그 안에서는 어떻게 된 거냐? 정말 천마가 부활할 뻔한 거야?”

“부활은 얼어 죽을.”

청명이 코웃음을 쳤다.

“사부작사부작 수작질을 부리기는 했는데, 모가지를 쳐서 날려 버렸지.”

“……그건 진짜 다행이네.”

반편이 주교도 그리 끔찍했는데, 천마가 정말 부활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하지만 큰일을 면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썩 안심시켜 주지는 못했다. 그들이 상대했던 것 이상의 힘을 갖춘 교구들이 아직 세상에 건재하다는 것을 알아 버렸으니 말이다.

언제 자랑스러워했냐는 듯 다분히 심각해진 모두의 얼굴을 보며 청명이 피식 웃었다.

“뭐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시무룩할 건 없어.”

“응?”

“반편이라 해도 주교는 주교고, 어설퍼도 마교는 마교지. 그런 놈들을 상대로 이만큼 싸워서 이겨 냈다는 건 대단한 거야.”

“……너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가 너무 심한 것 아냐?”

“내가 뭔 병을 줬는데, 내가!”

청명이 억울한 얼굴로 외치자 백천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하나는 알았다.”

“뭘?”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

그의 눈에 단호한 의지가 서렸다.

“마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강하다. 만일 마교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온전한 전력을 갖추고 중원을 공격한다면, 화산이 무사하리라는 보장이 없어.”

그 말에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의 힘은 충분히 느꼈다. 그리고 그들을 막아 내기에는 지금의 화산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사실도 말이다.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해.”

“우리라고 하시면?”

“여기 있는 우리뿐 아니라 화산 전체가 더 강해져야 한다. 나는 화산의 누구도 그놈들의 칼 아래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동감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숙!”

서로를 마주 본 그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 대적자는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법이지.’

입 밖으로 내기에는 정말이지 엿 같은 말이지만, 지금의 화산을 강하게 만든 것은 종남이고, 그다음은 소림을 비롯한 구파다.

스스로 더 강해지고 싶다는 의지만으로 수련을 이어 가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지고 싶지 않은 상대, 이겨 내고 싶은 상대가 있을 때 사람은 더 기를 쓰고 노력할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강해질 수 있다.

이제는 스스로 목표를 잡고 의지를 다지는 걸 보니 이제는 눈앞의 이들을 온전한 한 사람의 무인으로 인정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럼 화산에 돌아가는 즉시 사제들을 죽어라고 굴려야겠네요.”

“지옥을 보여 줘야지.”

“내가 마교 놈들에게 느낀 것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 줄 겁니다!”

“죽일 거야.”

“…….”

어…….

얘들아?

그거 방향이 조금…… 어…… 내가 생각한 거랑은 조금, 아니, 많이 다른 것 같은데?

응?

“아미타불.”

그때 묵묵히 있던 혜연이 반장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도 느낀 것이 많습니다. 대체 왜 방장께서 그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시주들을 이곳으로 보내려 했는지, 솔직히 이해를 못 했었습니다. 한데 마교가 이리 위험한 것을 알고 보니, 과연 방장의 혜안이…….”

“맞다! 그 빌어먹을 땡중 새끼!”

“……때, 땡…….”

혜연의 말문이 턱 막혔다. 잠잠하던 청명의 두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그냥 마교 놈들 몇몇이 숨어 있는 거라고 개수작을 하더니, 아예 교구가 통째로 들어와 있어? 젠장, 아주 그냥 주둥아리만 열면 거짓부렁이야! 이 지옥에 떨어질 놈 같으니!”

“거, 거짓부렁……. 지옥…….”

“중원으로 돌아가면 방장 땡중 놈 대가리에 머리털을 싹 다 뽑……. 아, 원래 없구나! 그럼 수염이라도 다 쥐어뜯어 버린다! 내가!”

본래 혜연이 이쯤에서 꺼냈어야 할 말은, ‘아무리 그래도 소림의 방장께 너무 과한 언사가 아니오.’였다.

하지만 두 눈으로 살기를 줄줄이 뿜으며 용과 같은 숨을 토해 내는 청명의 앞에선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 시주. 일단은 진정을…….”

“추가로 청구해야지.”

혜연의 말을 대번에 끊고 들어온 건 곁에 있던 백천이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입을 모아 거들었다.

“그럼요. 이걸로는 수지가 안 맞지. 안 맞고말고.”

“이 기회에 소림 기둥뿌리 싹 뽑아 버리죠!”

“불상도 녹여서 내다 팔아야 해.”

“…….”

방장.

여기 마구니들이 가득합니다.

소림에 대한 적대감을 열과 성을 다해 표현하는 모습들을 보며 혜연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화를 내는 저들은 문제도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소림에게 추가로 대가를 받아내야 한단 말을 그럴싸하다 느끼는 자신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도대체 언제부터 머릿속에 이토록 마구니들이 가득 들어찼단 말인가!

‘아니……. 그런데 역시 다시 생각해 봐도 시주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닌 것 같고.’

“끄으으응. 아미타불.”

혜연은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괴로워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때마침 그를 구원해 줄 이가 등장했다.

똑똑.

“들어오십시오.”

백천의 말에 문이 열렸다. 이내 새하얀 무복을 입은 설소백과 한이명이 안으로 부리나케 들어왔다.

“도장! 의식을 찾으셨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이제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설소백이 청명의 바로 앞까지 달려와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오냐.”

“궁주님께 오냐라니!”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맞아야 돼!”

모두가 말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청명은 그들의 말을 콧구멍으로도 듣지 않았다. 설소백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킨 그가 물었다.

“바쁠 텐데 뭐 하러 왔어?”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입니다, 도장! 아무리 중요한 일들이 많다지만, 북해를 구원해 주신 도장을 뵙고 감사를 표하는 일보다 더 중한 것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허허허. 요거 똘똘한 거 보소.”

잘 키웠네. 아주 잘 키웠어.

더없이 흐뭇해진 청명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제 화산 놈들은 어떻게든 그를 이겨 먹으려 들고, 그의 물건까지 강탈해 가는 판이다 보니,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은 설소백이 더욱 귀여워 보였다.

설소백의 눈은 한층 더 빛났다.

“대체 이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도장! 도장 덕분에 빙궁이 멸문을 피했고, 북해가 큰 화를 면했습니다. 정말, 정말 더없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

청명의 웃음이 더욱더 흐뭇하게 번졌다.

“그럼요, 도장!”

“알긴 아는구나. 그렇지?”

“물론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짐승과도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설소백, 많이 배우지는 못했을지언정 짐승은 아닙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설소백의 얼굴은 더없이 진중했다. 청명은 환한 미소로 이에 화답했다.

뒤에서 지켜보는 한이명의 눈엔 촉촉하게 물기가 어렸다.

‘참으로 좋은 모습이구나.’

중원에서 달려와 북해를 구해 낸 영웅과, 그런 영웅의 의지를 이어 앞으로 북해를 이끌어 갈 어린 궁주.

이 어찌 훌륭한 모습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그때였다.

청명이 더할 나위 없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말로만?”

“……예?”

설소백이 무언가 잘못 들었다는 얼굴로 고개를 슬쩍 들어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다시 한번 친절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말로만 고맙냐고, 말로만.”

“…….”

그러더니 손을 뻗어 설소백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세상에 말로 하는 감사는 없고, 입으로 갚을 수 있는 은혜는 없지. 원래 은혜와 감사라는 건 물질로 보상하는 거야. 물질로! 무슨 뜻인지 알지?”

“…….”

“왜? 설마 고맙다는 말 몇 마디로 입 싹 닦을 생각이었어? 에이, 아니지?”

“아, 아니, 그게…….”

“은혜를 모르면 짐승이라고?”

“……예.”

“짐승은 가죽이라도 넘겨주잖아. 은혜를 모르는 대신에 그 가죽으로 은혜를 갚는 거지. 그런데 설마 사람이 짐승보다 못하게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지? 그지? 에이. 북해빙궁 체면이 있지, 설마.”

동그란 설소백의 이마에 땀이 삐질삐질 솟기 시작했다.

빙궁의 체면이라는 말까지 나온 이상 이건 물러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무, 물론입니다, 도장. 북해빙궁은 은혜를 반드시 갚습니다.”

“……그래?”

청명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로 웃었다.

“하하하하핫! 그럼 그렇지. 내가 빙궁이 그렇게 몰염치한 곳이라고는 생각 안 했지!”

“그, 그럼요. 당연하죠.”

“그래, 그래. 그러니까…….”

청명의 손이 설소백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당황한 설소백을 바라보는 두 눈에선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일단 가지고 와 봐.”

“뭐, 뭘요?”

“뭐긴.”

청명의 웃음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될 만큼 환했다.

“북해빙궁의 재산 목록.”

“…….”

“어서.”

“…….”

늑대에게 잡힌 양 같은 설소백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딱 걸렸네.’

‘불쌍하게도.’

‘미안합니다, 궁주님.’

세상에는 신세를 져선 안 될 상대도 있다.

그것을 몰랐던 게 설소백과 빙궁의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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