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화. 내 이럴 줄 알았지. (5)
“아오! 이게 왜 이렇게 안 빠져, 제기랄!”
백천이 악을 쓰며 청명의 팔을 꽉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이게 이럴 리가....... 젠장, 걸아! 좀 더 세게 당겨 봐라!”
“저 팔이 부러졌는데요, 사숙?”
“누군 멀쩡하냐? 누군 멀쩡해?”
핏발이 선 눈을 희번덕대는 백천의 모습에, 조걸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순간 청명인 줄 알았네.’
사숙. 너무 멀리 가지 마십시오. 한 번씩 겁납니다.
“끄으으응차!”
뽁!
마침내 청명의 몸이 땅에서 쑥 뽑혀 나왔다.
쿠다당!
반동을 이기지 못한 백천이 바닥에 엎어져 신음을 흘렸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끼었길....... 이, 이게 뭐냐, 이 새끼야?”
청명과 함께 뽑혀 나온 거대한 보따리를 본 백천이 저도 모르게 고함을 쳤다.
저런 걸 쥐고 있으니 그렇게 안 뽑혔지!
“뭐긴”
뒷목을 잡고 넘어갈 기세인 백천을 본체만체하며 청명은 낄낄 웃었다. 그리고 보따리를 풀어 보였다.
“새끼들이 좋은 거 많이 챙겨 놨더라고? 그대로 두면 산에 깔려서 없어질 거, 내가 좋은 데 쓰려고 챙겨 왔지. 크으, 현명해.”
백천이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동굴이 무너지는 와중에 저걸 챙겨 왔단 말인가?
‘이 새끼는 진짜 대가리에 뭐가 든 거지?’
사실상 말이 보따리지 낡고 피 묻은 옷에 싸 온 것이었다. 안에는 무언가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이게 다 뭐....... 헐?”
물건을 확인한 백천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이거 빙정이잖아? 이게 다 몇 개야?”
"낄낄낄낄.”
청명이 간사하기 짝이 없게 웃으며 배를 쭉 내밀었다.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알뜰살뜰 잘도 모아 놨더라고, 이제 한동안은 북해에서 빙정도 안 날 텐데 모조리 챙겨야지.”
“이, 이 술병 같은 건 뭔데?”
“냄새 맡아 보니까 공청석유 같던데?”
“고, 공청....... 공청석유?”
백천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그게 진짜 있는 거라고?’
들어는 봤다. 공청석유(空淸石乳).
사람의 손에 발견되지 않은 설삼(雪蔘)이나 인형하수오(人形何首烏) 같은 영약들은 언젠가는 그 생을 다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약은 워낙 기운이 강하기에 썩어 문드러지지 않고 그대로 녹아 흐르게 된다.
흙이 가득한 숲에 자라났다면야 그 액이 땅을 타고 흡수되어 자연으로 돌아갈 테지만, 암벽 같은 곳에서 자라난 영약은 때때로 특수한 지형에 고여 숙성된다.
그렇게 영약의 진액이 자연의 기운을 더욱 흡수하며 수백 년간 숙성되어 만들어지는 액체가 바로 공청석유다.
한 방울만 먹어도 웬만한 영약의 뺨을 후려친다는 영약 중의 영약.
“다 공청석유라고? 이게 다?”
아니... 마교 이 미친놈들이?
한 방울만 풀려도 강호에 피바람이 몰아친다는 천고의 영약이 바로 공청석유다. 그 가치는 금이나 보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영약을 술병만 한 데에 가득 채우도록 지니고 있으면서, 이런 오지에서 처박혀 흙이나 파먹고 살았다고?
“천마 새끼가 부활하면 처먹이려고 모아 놨겠지. 원래 천마 같은 놈에게는 영약이 따로 필요 없겠지만, 얘들이 뭘 아나?”
아니,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는데?
백천이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터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이 보따리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다 모은 주교도, 모조리 챙겨 온 청명도 참으로 지독히 알뜰살뜰했다.
“세상에......”
사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북해에 자리를 잡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주교에 말에 따르면 이들은 천마가 죽은 이후로 쭉 천마의 부활을 획책해 왔다.
웬만한 대문파의 뺨을 후려칠 만한 힘을 가진 이들이 그 긴 시간 동안 재물을 모은 것임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적은 양이라고 할 수 있다.
“실속 없이 개고생만 했다 싶었는데, 그래도 막판에 좀 쓸 만한 것들 건졌네.”
청명이 희희낙락하며 보따리를 다시 묶고 어깨에 둘러했다.
그때였다.
“청명 도장님! 도장님!”
설소백이 동굴의 잔해로 이루어진 산을 타고 부리나케 올라와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오? 너 살아 있.......”
그리고 다짜고짜 청명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꽉 부둥켜안았다.
“아아아아악! 이 새끼야! 거기 상처! 상처! 아아아악!”
청명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설소백을 걷어차 날려 버렸다.
“으아악!”
설소백은 올랐던 산비탈을 고스란히 데굴데굴 굴러 아래로 추락했다. 백천은 허탈하게 웃었다.
‘하마터면 조금 감동적일 뻔했어.’
그럴 리가 없는데.
청명은 상처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끙끙 앓으며 투덜거렸다.
“저게 진짜 미쳤다. 아파 뒈지겠는데.”
“청명아.”
“응?”
“궁주를 그렇게 발로 차면 안 된다.”
“궁주는 얼어 죽을.”
청명이 짜증 난다는 듯 손을 탈탈 털고는 터덜터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 청명 도장.”
“왜요?”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한이명을 노려보았다. 옆에서 내내 한마디도 못 하다가 간신히 입을 뗐는데 이런 시선을 받으니 한이명도 움찔했다.
“괘, 괜찮으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거 눈독 들이지 마세요! 내가 진짜 개고생하면서 가져온 거니까! 어디 손만 대 봐. 그날로 북해빙궁은 싹 불타 없어지는 거야.”
안 가져가, 이 새끼야! 안 가져간다고!
한이명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북해를 구한 영웅이 이런 인간이라니.........’
죽었다 믿었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뗐던 한이명은 잠깐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피범벅이 된 청명의 무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금 보니 청명이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핏기가 남았다.
‘....도장.’
이 사람이 얼마나 지독한 전투를 치렀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 태도야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어쨌든 바로 이 사람이 마교를 무찌르고 북해를 구해 냈다.
한이명은 그 사실을 결코 잊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와.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이번에는 진짜 뒤질 뻔했어. 염병할 마교 새끼들. 너무 곱게 죽였네. 에라, 썩을!”
아니. 조금은 잊어도 될 것 같았다.
“.....아주.”
“.......”
“몰골들이 ....... 아주 끝내주네.”
화산의 제자들이 서로의 모습을 마주 보다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청명이 낄낄 웃었다.
“동룡이가 못생겨 보이는 날이 올 줄이야.”
“남들 앞에서 동룡이라고 부르지 마라.”
“동룡이를 동룡이라고 부르지, 그럼?”
“흐지믈르그.”
이를 악물고 말하던 백천이 얼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했다.
코가 부러지고 얼굴이 말도 못 하게 퉁퉁 부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꽤 후련한 표정이었다.
“얼씨구? 사고 얼굴은 왜 저래?”
백천과 비슷한, 아니 오히려 좀 더 심한 얼굴이 되어 버린 유이설을 보며 청명이 혀를 찼다.
“괜찮아.”
“잘도 괜찮겠다.”
어디 두 사람뿐이랴?
화산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혜연까지 멀쩡한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다들........ 엄마! 깜짝이야!”
양쪽 뺨이 퉁퉁 부어 오른 윤종의 모습에 식겁한 청명이 물었다.
“사형 얼굴은 또 왜 저래? 아까 맞아서 부은 게 아닌 것 같은데?”
“.......”
조걸이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청명이 헛웃음을 흘렸다.
“.......문파 꼴 잘 돌아간다.”
하나같이 이렇게 다 얻어터져선 끔찍한 몰골이라니.
“다들.....”
청명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피식 웃어 버렸다. 어쩐지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 그러니까 다들..........”
그때였다.
“도장님!”
장내를 정리한 설소백이 남은 빙궁도들을 이끌고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응? 왜 오지?”
“아까 네가 걷어차서 복수하려는 거 아니냐?”
“처맞으려고.”
“.....청명아, 너는 도사다.”
“그러니까. 죽인다고는 안 했잖아.”
“....훌륭하구나.”
“두말하면 입 아프지.”
다가오는 빙궁의 무사들도 그리 좋은 몰골은 아니었다. 마교와의 격전에서 입은 부상이 큰지, 이곳저곳이 피로 얼룩덜룩했다.
하지만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눈빛에 자신감이 가득 차 있다.
‘다들 무인의 얼굴이 되었네.’
청명은 그 모습을 보며 가만히 웃었다.
끔찍한 전쟁이었지만, 북해는 이 전쟁으로 많은 것을 얻었을 것이다.
“도장.”
중앙에 선 설소백이 청명을 보며 깊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양손을 모아 포권을 하며 고개를 더없이 깊게 숙였다.
“북해빙궁의 궁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북해인으로서 화산파 여러분들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청명이 가만히 설소백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그 모습에서 당당함이 느껴졌다. 위기를 딛고 일어선 사람의 모습이었다.
청명이 한 발을 뒤로 빼자 백천이 그 뜻을 알아채고 앞으로 나서서 설소백의 인사를 받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궁주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실로 정중한 대답이었다.
설소백은 고개를 들어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정광 어린 두 눈이 단호하게 빛났다.
“북해는 화산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물론 얼굴이 다들 만신창이라 딱히 보기 좋은 미소는 아니었지만, 설소백의 눈에는 더없이 근사하게만 보였다.
“그 전에........”
“예, 도장님!”
청명이 입을 열자 설소백이 더없이 초롱초롱한 얼굴로 응시했다.
“시신부터 수습해.”
“.......”
“힘겨운 전쟁에서 살아남은 건 더없이 기쁜 일이지. 하지만 궁주라면 죽어 간 이들부터 챙겨야 해. 공치사는 그다음에 해도 충분해.”
청명의 말에 설소백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도장님.”
“그래야지.”
기특하다는 듯 설소백의 머리를 두드려 준 청명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끄응. 그럼 다 되면 불러 줘. 서 있을 힘도 없다. 아이고, 죽겠네. 으으으.”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아예 벌렁 누워 버렸다.
백천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그런 청명을 만류하지 않았다.
“.......그럼 나도........”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갑니다.”
“아미타불.......”
“.......죽어. 진짜 죽어.”
“사, 사고, 옷이라도 깔고.............”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청명을 따라 바닥에 하나둘 주저앉았다.
체면이고 뭐고 다 벗어던지고 아무렇게나 엎어진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설소백은 조금 당황했다. 그때 청명이 누운 채로 눈만 빼꼼 들며 물었다.
“뭐 해?”
“예? 아, 예!”
화들짝 놀란 설소백은 빙궁도들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빙궁도들은 군말 없이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다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힘겨웠지만,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마다할 수는 없으니까.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며 계곡을 정리했다.
“동굴 안의 시신은 수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지.”
한이명은 안타까운 눈으로 동굴 쪽을 보았다.
‘여 장로님’
물론 그가 옳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북해를 위해 싸우고, 북해를 위해 죽었다.
부족함이 많았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걱정 마십시오.’
이제 북해는 달라질 것이다. 모두 저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
“거의 다 됐습니다. 궁주님.”
“시신은 수레를 가져와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예!”
설소백과 한이명이 나서서 진두지휘를 하자 정리는 금세 끝났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조금 남아 있지만, 그건 이곳의 있는 인원들과 도구들만으로는 할 수 없었다.
대충 마무리를 한 설소백이 사람들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리고 몸을 돌렸다.
“도장님! 그럼 이제 빙궁으로.......”
하지만 청명 쪽을 향해 돌아선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청명과 화산의 제자들이 어느새 서로서로 등을 기댄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
잠에 빠졌다기보다는 기절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 그런 것치고 그들의 표정이 너무도 평온했다.
“도장.......”
“내버려 두십시오.”
한이명이 설소백의 어깨를 잡으며 만류했다.
“북해를 구한 영웅들이지 않습니까. 썰매를 가져오기 전까지는 조금 쉬게 해 주시지요.”
그 말에 설소백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엉망이 된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 평화가 내려앉아 있었다.
“.......좋은 얼굴들이네요.”
“그렇군요.”
화산의 제자들에게서 새어 나오는 낮은 숨소리를 듣던 설소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푹 쉬십시오.’
북해는 기억할 것이다.
저 먼 중원에서 찾아와,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들의 목숨을 걸어 싸워 준 이들을.
키이!
청명의 어깨를 타고 오른 백아가 허리를 쭉 펴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만 눈이 반짝거렸다.
어쩐지 조금 따뜻해진 듯한 바람을 타고 화산의 매화 향이 퍼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멀리, 아주 멀리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