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저는 화산의 장문인이 될 사람입니다. (5)
"하, 항……."
"항?"
항복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진송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장문인들이 모여 앉은 단상 위에서 무당의 장문인인 허도가 차가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끄으으응.'
상대가 안 되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무당의 제자로서 출전한 이상, 이 많은 이들의 앞에서 항복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는 그쪽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지켜보는 이들이나 사문의 어른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진송이 검을 들어 청명을 겨눴다.
"하, 한 수 배우겠습니다."
"배워?"
"……예."
"이거 웃긴 새끼네?"
"……네?"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배우고 싶으면 네 사부를 찾아갈 것이지. 어디 다른 문파 놈이 나한테 배우겠다고 나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좋아. 가르쳐 주지."
청명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대신!"
"……네?"
"배움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오늘 비무에서 네가 살아남으면 좋은 경험이 될 거다! 살아남는다면 말이지!"
"……."
살기까지 번들거리는 청명의 시선을 마주한 진송은 빙그레 웃었다.
'아니, 어쩌다가 정도문파에 저런 인간이 나타났지?'
그리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저런 인간에게 저런 무력을 내려 주신다는 말인가?
진송은 울상을 지으면서 검을 움켜잡았다.
"후욱."
그리고 크게 심호흡한 뒤 단호한 눈으로 청명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오호. 끝까지 해보시겠다?"
"사, 상대가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응?"
"하지만……."
진송이 파들파들 떨면서도 말을 잇는다.
"평생 이길 만한 상대만 맞아 싸울 수는 없겠지요. 죽지는 않을 테니 최선을 다해 부, 부딪쳐 볼 겁니다."
"호오?"
청명이 씨익 웃는다.
"이거 재밌는 놈이네?"
때때로 저런 이들이 있다.
과거 마교와의 전쟁에서도 그랬다.
입으로 협의를 논하고 물러서지 않을 것을 주장했던 이들은, 막상 전쟁에 나서서는 그 주둥아리로 지껄인 것의 반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저런 놈들은 겁에 질려 떨면서도 결코 물러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기어코 해낸다.
'무당은 무당이네.'
저런 놈도 있고 말이다.
청명이 씨익 웃었다.
"어이."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진송입니다."
"진송. 그래, 진송. 기억하지."
청명이 가볍게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럼 시작하자."
"예!"
청명이 지체 없이 진송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송의 눈이 순식간에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히익!"
입으로는 비명을 지르지만 그의 손에 들린 검은 흔들림 없이 단호하게 태청검법의 검로를 따랐다.
허공에 절도 있고 깔끔한 검식이 펼쳐진다.
"다리가 빠졌잖아!"
따악!
"윽!"
하지만 청명의 검은 깔끔하게 그려진 태청검법의 검로를 유령처럼 스쳐 지나 정확하게 진송의 무릎을 내리쳤다.
진송이 반사적으로 검로를 틀어 청명의 목을 노린다.
"허리!"
따악!
옆구리를 얻어맞은 진송이 이를 악물었다.
실전이었다면 다리가 잘리고 옆구리가 크게 베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비무! 쓰러지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
"하아아아앗!"
진송이 크게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떨쳐 내었다.
그가 비장의 초식으로 생각한 태청검법의 초식 청하곤곤(淸江滾滾)이 유려하게 펼쳐진다.
"어깨! 손목! 검지!"
딱! 따악! 딱!
청명의 검이 진송의 어깨와 손목, 그리고 두 번째 손가락을 연이어 찍고 지나갔다.
"아악!"
검식을 펼쳐 내던 검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
진송이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럴…….'
"대가리이이이이이이!"
빠아아아아아아아악!
"……."
털썩.
검집째로 진송의 대가리를 내리찍어 버린 청명이 검을 회수하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검수면 하체와 어깨부터지. 그리고 무당이고 나발이고 대가리는 공평한 법이다. 하나 배워 둬라."
이미 바닥에 쓰러진 진송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을지는 애매했지만, 청명은 개의치 않고 몸을 획 돌렸다.
그런 그에게 폭발적인 환호성이 쏟아진다.
청명이 웃으며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최고다! 화산산룡!"
"이번에도 한 방이다!"
"으하하핫! 무당의 제자를 저리 쉽게 제압하다니! 아직까지 검은 한 번도 뽑지 않았잖아!"
"우승은 벌써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지!"
쏟아지는 환호를 받으며 청명이 얼굴을 실룩였다.
'크으. 이것도 나름 맛이 있네.'
이래서 사람이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구나!
청명이 새삼 실감하며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런 청명의 뒤에서 진송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
그리고 저도 모르게 손으로 정수리를 더듬거렸다.
'안 아파?'
분명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는데, 머리에서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진송이 황당함이 묻어나는 눈으로 멀어지는 청명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청명 도장.'
화산의 신룡.
그리고 화산의 개차반.
무위를 뺀다면 그에게 좋은 말을 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와 손을 섞어 본 무진과 허산자는 청명을 그리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은 진송이었다.
"이번 비무는 화산 청명의 승리요!"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 청명이 비무대를 벗어났다.
"으아아아아! 청명 도장님!"
위소행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환호에 묻혀 버렸지만, 개의치 않고 발악하듯 환호했다.
"청명 도장님! 하하하하핫! 청명 도장니이임!"
그 순간이었다.
비무대를 내려가던 청명의 고개가 관중석 쪽으로 획 꺾였다.
"어?"
청명과 위소행의 눈이 마주쳤다.
'아니. 저기서 내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
그것도 이리 많은 이들 사이에 있는 사람을 정확히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
하지만 그 순간 청명이 반색한 얼굴을 하더니 손을 흔든다.
'진짜 본 건가?'
그리고 비무대에서 훌쩍 뛰어올라 중인들의 가운데에 내려섰다.
깜짝 놀란 중인들이 환호하며 청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청명은 불쑥불쑥 내밀어지는 손들을 가볍게 맞잡아 주며 성큼성큼 걸어 순식간에 화영문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아이고, 문주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청명이 반갑게 외치자 위립산이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이리 환대를 해 주다니.'
만면에 웃음을 띤 청명을 보고 있으니 그가 진심으로 반가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립산도 바보가 아니다.
지금 쏟아지는 환호만 봐도 그가 과거에 화영문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위상을 떨치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청명은 전과 전혀 다름없는 얼굴로 반가워해 주지 않는가?
'정말 도사답지 않은 사람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없이 도사 같은 사람이 청명이었다.
"화산이 대회에 참가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을 데리고 달려왔습니다."
"잘 오셨어요!"
청명이 위립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여기까지 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하하하. 청명 도장이 이기는 걸 보니 여기까지 온 고생이 싹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헤헤헤. 그렇죠?"
배시시 웃은 청명이 슬쩍 위립산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혹시……."
청명이 살짝 입맛을 다시며 그의 봇짐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위립산이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열 병."
"크으으으으."
청명이 감격한 듯 위립산의 손을 꽉 움켜잡는다.
"저쪽으로 가시죠. 저기에 화산의 자리가 있어요."
"하하. 우리는 속가문파라……."
"괜찮아요, 괜찮아요. 자리 남아요."
"아, 아니. 그게 기본적으로 규정이……."
"규정은 얼어 죽을. 우리 자리 우리가 쓰겠다는데 뭐가 문제예요! 땡중들이 와서 따지면 머리통에 기름 처발라 반짝이게 만들어 버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위립산이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사람이 명성을 얻고 위상이 달라지면 전과는 달리 언행을 조심하고 근엄한 척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청명은 과거와는 비할 바 없는 명성을 손에 넣었음에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선 전보다 좀 심해진 것 같기도 하다.
'꼭 그게 좋은 건 아니겠지만.'
그 모습이 더없이 기껍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 위립산의 뒤에 있던 위소행이 얼른 입을 열었다.
"청명 도장님!"
청명이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잘 봤어?"
"예! 정말 강하시네요."
위소행이 동경으로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센 게 아니라 쟤들이 약한 거야."
"정말요?"
"……아니. 내가 센 걸 수도 있겠다."
청명이 피식 웃으며 위소행과 위립산을 잡아끌었다.
"어쨌든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으로."
"어엇!"
청명은 두 사람을 붙든 채 인파를 헤치며 한쪽으로 향했다. 화영문의 제자들도 다들 그 뒤를 따랐다.
"장로님! 장로님!"
인파를 헤치고 줄을 넘어 문파들이 대기하는 곳까지 간 청명이 소리를 질렀다.
"화영문 문주님께서 오셨어요!"
"화영문?"
"오!"
화영문과 인연이 있던 백천 무리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려던 위립산은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살짝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여기가 화산이 있는 자리라고 하지 않았나?
'맞는데?'
검은 무복과 가슴에 새겨진 매화 문양이 이들이 화산의 제자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화산이라고?'
아닌데?
그나마 윤종이나 조걸, 그리고 백천은 나은 편이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성숙한 느낌이 물씬 풍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알고 있는 모습에서 그리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주변에 있는 이들은 확실히 뭔가 심상치가 않았다.
"……소행아."
"……예?"
"네가 전에 화산에 갔을 때도 저랬었느냐?"
"아니, 아니요.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위소행이 화산에 들른 지가 일 년도 되지 않았다.
그럼 대체 그 일 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뭔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움츠러들 정도가 되었단 말인가?
"장로님, 장로님!"
"엥?"
"여기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화산에 뭔 손님이야!"
커다란 산적……. 아니 화산의 문도들 앞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딱 산채마다 하나씩 붙어 있는 염소수염의 책상물림이로군.'
사문의 장로를 그리 평하는 것은 무척이나 불경한 일이지만, 너무 딱 들어맞는 느낌이라 도무지 다른 비유를 찾을 길이 없다.
'그런데 장로?'
화산 장로 중에 저리 젊은 사람이 있었나?
"누구시라고?"
"화영문주님이세요."
"화영……. 화영문?"
그 순간 사내의 얼굴이 화악 피더니 마치 후광이라도 뿜을 것 같은 자애로운 표정을 띠었다.
'뭐, 뭐지?'
장로, 현영이 재빨리 달려 나오더니 화영문주 위립산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화영문주시라고!"
"예? 아 예……. 제, 제가 화영문의 문주인 위립산입니다."
"그래, 그래. 그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내가 화산의 현영이다."
"혀, 현영 장로님?"
"그래, 그래!"
위립산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현영이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어깨를 두드린다.
"잘 와 주었다. 잘 왔어! 오는 길에 화영문에 한번 들렀어야 하는 것을 내가 경황이 없어 잊었구나!"
현영이 더없이 기꺼운 얼굴로 위립산의 어깨를 꾹꾹 주물렀다. 손짓 하나, 표정 하나에 반가움이 듬뿍듬뿍 묻어나 되레 황송할 정도다.
"그런데…… 정말로 현영 장로님?"
"그래. 그래. 네가 어릴 적 화산에 들렀을 때 보지 않았느냐?"
"……너무 젊으셔서."
"하하하. 좋은 일이 있었지. 그래, 먼 길을……."
무어라 말하려던 현영이 불현듯 뒤쪽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뭐 하느냐! 이 밥버러지 놈들아! 손님이 오셨으면 의자라도 가지고 와야 하지 않느냐! 돈 한 푼 안 내고 밥 빌어먹는 놈들이 어디 고객……. 아, 아니. 속가 분들이 오셨는데 거기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어! 당장 일어나지 못해?!"
"……."
위립산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말이 너무 심한…….'
하지만 화산 제자들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의자! 의자! 빨리!"
"움직여, 이것들아!"
앉아 있던 의자들을 일제히 잽싸게 들어 올리더니 경공을 펼치듯 뛰어와 속가 인원들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편히 앉으십시오!"
"저희는 그냥 서서 보면 됩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
위립산은 너무 당황하여 할 말을 잃었지만 현영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거거, 청명아. 너는 괜찮다. 너는 거기 그 앞쪽에 의자 붙여 눕거라."
"그러려고요."
"그래, 그래. 내 새끼."
이것도 좀 이상한데…….
현영이 빙그레 웃으며 위립산에게 자리를 권했다.
"장문인은 지금 다른 곳에 계시니 저녁에 뵙고 인사를 드리면 될 게다."
"아. 그러겠습니다, 장로님. 이리 환대를 해 주시니 제가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
그 순간 현영이 그의 손을 다시 움켜잡았다.
"화영문주."
"예?"
"화산은 화영문이, 그리고 자네가 얼마나 본산을 위해 주었는지 너무 잘 알고 있네. 그러니 불편한 마음을 갖지 말고 편히 있어 주시게나."
"장로님……."
위립산의 눈이 감동으로 넘실거렸다. 현영이 굳건하게 잡아 온 손을 보자니 온갖 감정이 물밀듯 밀려든 것이다.
그때 현영이 조금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음……."
"예?"
그리고 살짝 떨떠름하게 말했다.
"내가 여기로 오느라 확인을 못 했는데 이번 달 상납……. 아니, 기부금은 화산으로 보냈는가?"
"……출발 전에 보냈습니다."
"그래, 그래. 아암. 편히 있어 주게. 모쪼록 편히! 하하하하하하!"
"……."
화산이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위립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