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거야. (1)
"대가리이이이이이이이!"
화산의 기세는 멈출 줄 몰랐다.
물론 일 차 예선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 격에 상대를 날려 버리는 일은 이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상대들도 이제는 화산파의 제자들을 경계하기 시작한 데다, 슬슬 강자만 살아남는 단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용케도 예선 마지막 날까지 단 일 패도 허용하지 않고, 파죽지세로 상대들을 쓸어 버리고 있었다.
호쾌하다.
가슴속에 쌓였던 것들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더없이 기꺼운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위립산이 뭔가가 걸린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다 좋은데.'
정말 다 좋은데.
왜…….
"그걸 검이라고 쓰냐? 너도 화산에 와서 절벽 좀 타야겠네!"
"어디 내 앞에 대가리를 들이밀어!"
"허리! 허리! 허리! 허리! 발목!"
"이게 피해? 피했어? 오냐, 너 오늘 한번 뒈져 보자!"
"……."
왜…….
왜 다들 저렇게 되어 버린 것인가? 어쩌다 저 지경이 되었나?
위립산이 과거 그가 방문했던 당시의 화산을 떠올렸다.
비록 낡고 반쯤 쓰러진 전각이 망해 가는 문파의 전형을 보여 주기는 했지만, 그 전각 안에서 살아가는 화산의 도인들은 하나같이 도인다운 풍모가 있었다.
그 맑디맑은 풍모를 얼마나 동경했던가?
그가 화산의 속가를 이어 온 것은 단순히 선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어린 시절 보았던 화산의 모습이 너무도 또렷하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
"잘한다! 대가리! 대가리!"
"……."
애처럼 좋아하는……. 아니, 아직 애기는 하지. 애는 맞는데!
여하튼 너무 좋아하는 위소행을 보고 있으니 뭔가…….
'이걸 대체 무슨 기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머리는 우려를 표하는데 가슴은 뜨거워지고 엉덩이는 절로 들썩인다.
화산의 제자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
'화산이 언제 이리 강해졌단 말인가?'
물론 위립산은 이미 청명과 그 일행의 활약을 두 눈으로 확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다.
위상과 관련없이 문파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이가 종종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이 문파의 위상을 올리고, 명문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기반을 만들어 낸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곳이든 딱히 큰 노력이나 과정 없이도 청명이나 백천 같은 이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다.
분명 좋은 일이긴 하나, 그것만으로 문파의 능력이 증명되지는 않았다.
한데…….
'왜 다들 이렇게 세냐고?'
안 진다고?
저 비무대회에서?
위립산이 눈을 끔뻑였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술 한 됫박을 걸고 싸우는 그런 허접한 대회가 아니다. 천하의 명문 중에서도 인정받는 후기지수들이 모여 싸우는 비무대회다.
그런데 아무리 예선이라고는 하나, 단 한 판도 지지 않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위립산은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결과에 흥분하고 있는 게 화영문의 제자들뿐이라는 것이다.
화산의 제자들은 이게 당연하다고 여기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동료가 싸우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지 심드렁한 얼굴로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
따아아악!
상대의 목을 검면으로 후려친 윤종이 쓰러지는 상대를 보며 낮게 말한다.
"나쁘지는 않았으나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것이오."
물론 화산의 문도들만큼 노력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윤종이 환호 속에서 비무대를 내려왔다.
"진짜…… 진짜 멋지다!"
위소행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얼마나 바랐던 광경인가.
화산의 제자들이 수많은 명문의 제자들을 연파하고, 강호에 그 이름을 드날리는 모습 말이다.
하나 실제로 그런 광경을 보게 되자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멍했다.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어떻게 다들 이리 강할 수 있지?'
청명과 그 일행들이야 원래 강했다. 하지만 설마 화산의 다른 제자들도 이토록 강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더구나…….
'이 사람도 이겼지?'
위소행의 눈이 옆쪽에 앉은 당소소에게로 돌아갔다.
분명 화산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이런 무위라니.
그 사실이 위소행에게 희망을 주었다.
'나도 가능할까?'
그는 당소소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육포를 뜯던 그녀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획 돌렸다.
"뭐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위소행이 우물쭈물하며 눈을 굴렸다.
그러자 당소소가 위소행 쪽에 있던 육포 바구니를 쭉 당겨 제 쪽으로 옮겼다.
"남의 육포 노리지 마라. 손모가지 날아가니까."
"……."
그때 비무를 마친 유이설이 돌아왔다. 그러자 당소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리 챙긴 물수건과 물병을 들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사고! 사고 여기요!"
"고마워."
"헤헤. 별말씀을요."
그를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는 당소소를 보며 위소행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 화산 사람이네.'
누가 봐도 화산인이다. 누가 봐도!
그때 앉아 있던 청명이 일어나더니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아, 지루해. 얼마나 남았어?"
"이제 한 시합 남았다."
"누군데?"
"백상."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상 사숙이면 무난하게 이기겠네."
"그렇지. 백자 배 중에서는 가장 강한 축에 드니까."
백천을 비롯한 유이설, 윤종, 그리고 조걸은 화산 내에서도 전혀 다른 경지를 걷는 이들이다.
청명을 포함한 이 다섯을 제외한다면 화산의 이대제자 중 최고수를 다투는 이가 백상이었다.
다른 이들이 무난하게 이겼는데 백상이 지는 건 상상이 가지 않는다.
"빨리 끝내라고 해 줘. 뭔 놈의 비무가 이렇게 지루해."
"……."
백천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명문의 후예들이 명예를 걸고 싸우는 비무를 지루하다고 느끼는 건 둘째 치고,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걸 보면 이놈은 정말 머리에서 뭐가 하나 빠져 있는 게 분명하다.
"금방 끝난다. 저 비무대에서 승부가 나면 백상의 차례니까."
"저 비무대?"
청명의 시선이 백천이 가리킨 비무대로 향했다.
"흐음."
비무대 위에서 대검을 든 사내를 보며 청명은 씩 웃었다.
"남궁 뭐시기네."
"그래. 단악검이다."
백천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 말투에 드러난 투지를 느낀 청명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단악검을 바라보았다.
'세긴 하네.'
세상에는 반드시 존재한다.
그 재능과 출신으로 하늘 아래 단 하나밖에 없는 자리를 노리는 걸물들이.
저 단악검 남궁도위가 그런 자였다.
아마 청명이 없었다면, 천하제일인을 두고 다투는 이 중에는 반드시 저 이름이 존재했을 것이다.
"어때?"
"뭐가?"
"이길 수 있겠어?"
백천이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물론 승부는 겨뤄 봐야 아는 것이다만……."
"다만?"
"……없군."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없다는 걸까?
"도무지 질 자신이 없다. 이 빌어먹을 놈아."
"오호? 우리 동룡……."
백천이 검을 뽑았다.
"아니, 백천 사숙이 자신감이 넘치네."
청명이 재빨리 말을 바꾸며 히히 웃었다.
"근데 사숙. 나 진짜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
"응?"
"물어봐도 돼?"
백천이 살짝 떨떠름하게 청명을 바라보았다. 겪은 일들이 있어서인지 이놈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불안해진다.
"……뭔데?"
"사숙이 진동룡이잖아?"
"백천이라고!"
"사숙네 형은 진금룡이고."
"……그런데?"
청명이 씨익 웃으며 묻는다.
"그럼 은룡이도 있어?"
"……있다. 우리 둘째 형."
"진짜?"
"무학에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못해서 대표로는 뽑히지 못했을 거다."
세상에, 진짜 은룡이 있었어.
청명은 떨떠름한 눈으로 종남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사숙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 딱 하나는 알겠네. 아버지 작명 능력이 지옥에서 나온 아수라 수준인데?"
"……공감해야 하는 나 자신이 서글프군."
진동룡……. 아니, 백천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여튼 사숙 방심하지 마."
"응?"
"저 새끼 세다."
어느덧 조금 진지해진 청명이 단악검을 보며 말했다.
"천재라는 것들은 한 번씩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보여 주거든. 상식적으로 수련의 강도, 검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경험 같은 강해질 수 있는 요소를 무시해 버리고 이해가 안 가는 성취를 이루어 버리지."
"저놈이 그런 천재라고?"
"아마도."
백천의 눈이 비무대 위의 단악검을 쫓았다.
'남궁도위.'
청명이 타인에게 이렇게 후하게 평가하는 건 처음 들어 본다.
백천이 평생의 벽이자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도 이기기 힘든 천재라 여겼던 진금룡조차도 지렁이 취급하던 청명이 아닌가?
그런데 천재라…….
'열받는군.'
백천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내가 꺾어 주지.'
백천이 단호한 의지를 벼리던 그때였다. 청명이 슬쩍 얼굴을 들이밀었다.
"의식하는 거야?"
"의식이 안 될 수가 있나?"
"호오? 아직 금룡이도 남았는데, 남궁 뭐시기를 의식한다고?"
"형님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야."
대수롭지 않은 듯한 말투였다. 청명은 피식 웃었다.
"오호. 우리 백천 사숙이 이제 진짜 꽤 건방지게 말할 줄 알게 됐네. 진금룡이 아무것도 아니라니."
"응? 내가 그렇게 말했나?"
백천이 살짝 어색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사숙."
"응?"
"건방 떨지 마."
"……."
백천이 움찔하였다. 어느새 청명의 눈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개구리는 올챙잇적 기억을 못 하는 게 정상이지. 강해진 이는 자신이 약자일 때를 기억하지 않아. 그러니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도 신경을 쓰지 않지."
"……."
"하지만 그 개구리 중에서 진짜 금와(金蛙)가 될 수 있는 건, 자신이 올챙이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개구리뿐이야."
거기까지 말한 청명이 얼굴을 풀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강해져서 기분이 좋을 거란 건 알아. 하지만 발밑을 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기어 올라온 이에게 발목이 잡혀. 그러다 보면 발목 날아가는 거야."
백천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금은 기세를 풀었지만, 한 번씩 청명이 이렇게 정색을 할 때마다 심장이 조여 오는 듯한 압박이 느껴졌다.
'이놈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이건 단순히 강함에서 나오는 기세가 아니다. 사람 그 자체에서 나오는 위엄이라고 해야 할까?
"명심하마."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우리 동룡……. 에헤이! 검은 왜 뽑고 그래, 또!"
백천이 피식 웃고는 검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 너는 밑을 항상 주시하는 개구리여서 금와가 됐다 이 말이냐?"
"응? 에이, 뭔 소리야. 나는 아니지."
"응?"
뜬금없는 겸손에 백천은 갸웃했다.
아니라고?
그러자 청명이 자신을 가리키며 배를 쭉 내밀었다.
"따지자면 나는 용이나 봉황. 용은 새끼여도 용이지."
"……."
"사숙은 개구리고. 이해가 안 가나?"
"……이 새끼가?"
백천이 막 청명의 목을 조르려는 찰나였다.
콰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비무대 주위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잠시 후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그 가운데 당당히 선 남궁도위의 모습이 보였다.
"승자는 남궁세가의 남궁도위요!"
남궁도위는 너무도 당연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듯, 딱히 감흥 없는 얼굴로 내려갔다.
"재수 없군."
"응. 마치 옛날의 누구 같네."
"내가 뭐?"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제 발이 저리는 분이 여기 계시네."
"끄으응."
백천이 별말을 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예전의 백천이라면 승리를 거두고 딱 저런 얼굴로 비무대를 내려왔을 테니까.
"저자도 대가리가 깨지면 정신을 차리겠지."
"호오? 자신 있어?"
"자신 있다고 해야지!"
백천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청명을 이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발목을 잡힐 수는 없다.
"좋은 대답이야. 그런데 남궁도위만은 아니거든. 몇몇 정말 눈에 띄는 놈들이 있었어."
"……그래?"
청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본선은 그놈들을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야. 가능한 한 많은 수가 남는 게 좋은데. 흐음."
청명이 볼을 긁었다.
"그런데 저 소림 놈들이 그리 만들지 않겠지. 보나마나 조작을 할 건데."
"조작? 소림이 조작이라고?"
"뭐 순진한 소리를 하고 있어? 쟤들이 공짜로 이 많은 애들 밥 먹이고 재우겠어? 얻을 게 있으면 얻는 게 기본이지."
청명의 말에 백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긴 하지만.'
왠지 소림만은 그러지 않을 거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 기대가 지금 깨어지는 느낌이다.
"어쨌든 예선부터 마무리하고 생각하자. 백상 사숙이 마지막이라고?"
"그래. 저기 올라간다."
백천과 청명이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대기하고 있던 백상이 황포를 두른 소림승과 마주하고 있었다.
'내가 끝인가?'
백상이 여유로운 동작으로 검을 뽑았다.
'모두 이겼는데 나만 질 수는 없지. 이놈을 이기고 예선을 전승으로 마무리한다.'
예선이라지만 전승이다.
이 결과는 근래에 화산이 만들어낸 최고의 쾌거이자, 업적으로 기억될 것이다.
화룡점정.
화려한 용 그림에 마지막 눈동자를 그려 넣는다는 심정으로 백상이 상대를 마주 보았다.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살짝 여려 보이는 몸과 아직 앳된 얼굴. 실력보다는 경험을 쌓기 위해 나왔다는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어쨌든 소림이다.'
백상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겉모습을 보고 약해 보인다고 생각했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강호인이 한둘이 아님을.
당장 청명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가 다른 곳에서 청명을 적으로 마주했다면 강해 보인다는 인상은 절대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싸웠다가 대가리가 깨졌겠지.
'방심은 금물. 무조건 최선을 다한다.'
"시작!"
승부를 겨루라는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백상이 이십사수 칠매검의 기수식을 펼쳤다.
"간다!"
우선은 매화분(梅花紛)으로 상대의 반응을 보고, 그다음에 곧장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어?'
그 순간 백상은 보았다.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상대의 주먹이 광휘로운 금빛으로 물드는 광경을 말이다.
'어어?'
그리고 그게 백상이 기억하는 마지막 광경이 되었다.
쾅!
짧고 거대한 폭음과 함께 소림승이 뻗은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의 권기가 백상을 휩쓸어 버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백상은 구슬픈 비명을 내지르며 비무대와 관중석을 넘어 소림의 담장 밖까지 날아갔다.
"뭐, 뭐야!"
"저 미친!"
관중은 물론이고 화산의 제자들마저 경악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지어 청명마저도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배, 백보신권? 대체 뭐야, 저 새끼?!"
비무대 위의 소림승을 바라보는 청명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