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저는 화산의 장문인이 될 사람입니다. (4)
"드디어!"
위소행이 눈앞에 펼쳐진 인산인해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님!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그래. 정말 먼 길이었구나."
위소행의 말을 들은 위립산도 깊게 숨을 내쉬었다.
"장문인도 무심하시지. 천하무림대회에 참가를 하시면, 참가한다고 연통이나 하나 넣어 주시지. 그럼 훨씬 일찍 도착했을 것 아니더냐."
"장문인께서도 대회를 준비하느라 바쁘시지 않았겠습니까. 이게 어디 보통 일입니까?"
"그렇지, 그렇지. 네 말이 옳다."
위립산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무림대회라니.'
가슴이 떨려 온다.
이름은 천하무림대회지만 실제로는 천하명문대회에 가깝다. 강호인들에게 인정을 받고, 강호를 이끌어 나가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 문파만이 소림의 초대장을 받고 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는 건, 그 문파가 강호의 동도들에게 명문임을 입증했다는 의미가 된다.
'화산이 이런 곳에 참가하는 날이 올 줄이야.'
몰려 있는 군웅들을 바라보는 위립산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화산의 속가인 화영문을 운영하면서 얼마나 많은 설움을 받았던가?
망해 자빠진 문파의 속가면 대체 얼마나 망한 곳이냐고 비웃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니. 차라리 그 정도면 양반이지.
화산의 존재조차 알지 못해서
'그런 곳이 있소?'
라고 묻는 이들에게 웃음을 보여야 했던 시절을 생각하니 새삼 눈가가 시큰해진다.
"본산 분들께서 좋은 성적을 내 주시겠죠."
"소행아."
"예! 아버님!"
"기대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
위립산이 진중하게 말했다.
"천하의 명문들이 실력을 겨루는 자리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물론 화산은 언젠가는 천하제일문파가 될 테지만, 아직은 천하를 지배하던 명문들과 격차가 있을 것이다."
"예."
"그러니 어떤 성적을 내더라도 실망할 것 없다. 우리는 그저 혼신의 마음을 다해서 그분들을 응원하면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주먹을 꽉 쥐는 위소행을 보며 위립산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지 않았던가?'
화산은 지금도 과격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여기에 더 큰 기대를 하는 것은 본산에 막중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
'그저 본산에 기대기만 해서는 안 된다. 우리 화영문이 화산의 영광에 도움이 되어야지.'
위립산이 내심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다들 가자꾸나."
"예!"
그의 수제자인 엽평이 위립산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본산의 어른들께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괜찮다. 그분들도 지금 바쁘시겠지. 오늘 비무가 끝난 뒤에 인사를 드리러 가도 나무라지 않으실 게다."
"알겠습니다."
인파의 끄트머리에 도착했지만 워낙 멀어서 비무대가 잘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화영문의 나이 어린 제자들은 아직 키가 작아서 제대로 비무를 보기가 어려울 듯했다.
"으음.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자꾸나."
"예."
화영문의 제자들이 인파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거센 반발이 터져 나왔다.
"어엇, 밀지 마시오!"
"이 사람들이! 늦게 와서 어딜!"
"죄송합니다. 조금만 안으로 가겠습니다."
위립산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험악한 얼굴의 사내 하나가 인상을 쓰며 위립산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
"그쪽은 어느 문파기에 이리 경우가 없어? 당신 눈에는 일찍부터 나와 자리를 잡은 이들이 안 보여? 어? 보이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죄송은 얼어 뒈질 죄송이야? 확 모가지를 꺾어 버릴라!"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이곳에 있는 이들도 다들 무인이다 보니, 냉랭한 기세에 몸이 살짝 떨릴 지경이다.
위립산이 헛기침을 한 후 정중히 말했다.
"먼 길을 달려 도착했는데, 아이들에게 본산 분들의 모습을 좀 더 보여 주고 싶은 마음에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누구는 사문 없나? 그래서 그쪽 사문이 어디신데?"
"저희는 남영의 화영문 소속입니다. 화산의 속가문파지요."
"화영문? 어디서 들어 본 적도 없……."
말을 하던 험악한 얼굴의 사내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기이한 눈빛으로 위립산을 보았다. 심지어 눈동자를 떨기까지 했다.
"저……. 사문이 어디시라고?"
"화영문입니다."
"아니. 거기 말고……요. 어디 속가시라고?"
"……화산입니다."
"화산?"
"예."
"그……. 화산채……. 아, 아니! 대회에 참가한 화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반응이 왜 이렇지?
그리고…… 화산채?
위립산이 의아한 눈으로 사내를 보다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만?"
앞을 막아섰던 이가 슬쩍 뒤를 돌아본다. 그러더니 낮게 헛기침을 했다.
"아……. 화산이셨구나. 화산."
"……."
응?
사내의 묘한 반응에 위립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으르렁대던 사내가 굉장히 어색한 얼굴로 어깨를 움츠린다.
"화, 화산의 속가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 이쪽으로 가시지요. 제가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예?"
사내가 뒤쪽을 돌아보더니 크게 소리쳤다.
"여기 화산의 어린 속가 제자들이 왔답니다. 길 좀 터 주시오."
"화산?"
"화산의 어린 제자라고?"
"……거참, 무서운 말이로군."
응?
무서워?
위립산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이들도 다들 비슷한 반응이었다.
흥미가 있는 듯 이쪽을 바라보다가도 위립산과 눈이 마주치면 획 하고 고개를 돌린다.
마치 뭐랄까 어…….
'저잣거리에서 행패를 부리는 왈패 놈들을 보는 모양새가 아닌가?'
그런데 왜 화영문을 그런 눈으로 보지?
왜?
"자자. 얼른 얼른 길을 여시오!"
"비켜 드려! 화산 분들이시다!"
"아, 옆으로 좀 가라니까!"
"화, 화산?"
사람들이 우르르 좌우로 길을 여는 어이없는 상황을 보며 위립산은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이쪽으로 가시오."
"저기 앞쪽으로 가면 화산파가 있는 곳이 있소."
"하하하! 화산의 속가라니. 어깨에 힘 좀 바짝 주시겠는걸?"
"그렇지, 그렇지! 하하하!"
그들의 반응에 위립산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더욱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하지만 그걸 알아볼 시간은 없었다.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앞쪽에서 우렁찬 호명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다음! 화산의 청명!"
'청명?'
화산과 청명. 그 익숙한 두 단어의 조합을 들은 위립산이 반색하여 고개를 쭉 뺐다.
하지만 그의 시야는 순식간에 들썩이는 관중들로 인해 가려졌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화산신룡! 화산신룡이다!"
"화산파의 화산신룡이 나왔다!"
청명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갑자기 귀가 터질 듯한 함성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뭐, 뭐야!"
"화산신룡? 청명 도장님?"
너무 열광적인 반응이라 순간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위립산이 황당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위소행도 당황을 감추지 못하다가 고개를 빼꼼 들고 비무대 위를 바라본다.
비무대 위로 휘적휘적 올라가는 한 사람의 등이 보였다.
"도장님이다!"
물론 뒷모습만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등짝으로
'귀찮아 죽겠는데 자꾸 사람 불러 대네.'
하는 마음을 표현할 이가 여기서 청명밖에 더 있겠는가?
"우승이다, 화산신룡!"
"한 방! 이번에도 한 방이다!"
터져 나오는 함성과 응원 때문에 벌써 귀가 먹먹했다.
다른 비무가 시작된 것도 아니다.
이 앞 비무대에 청명이 올라서고 있을 뿐, 다른 비무대에서는 화영문이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비무가 쭉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청명이 올라오는 순간 소림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어 버렸다.
화영문의 제자들이 모두 놀란 토끼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저 비무는 봐야 한다.
명실공히 화산 후기지수 중 최고수라 할 수 있는 청명의 비무가 아닌가?
저걸 보지 못하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다.
하지만 청명이 등장하는 순간 달아오른 군중은 쉽사리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별수 없이 위립산은 키가 작은 아이들을 들어 올려 주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위소행은 비무대 위로 올라선 청명을 보며 감탄했다.
'청명 도장님!'
어떤 식으로든 크게(?)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자리에서 이토록 큰 환호를 받는 사람이 될 줄이야.
청명과 그리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없는 위소행조차 가슴이 절로 뿌듯해지는 기분이었다.
'믿습니다!'
그는 동경이 잔뜩 어린 시선으로 홀린 듯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위립산은 자신의 아들이 안 좋은 쪽으로 물드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만면에 미소를 띠고 가슴을 쭉 폈다.
"하하하하. 화산이 이토록 환호를 받는 문파가 되다니!"
어쩐지 눈시울이 붉어지는 위립산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들려오는 환호에 조금씩 이상한 것이 섞이기 시작했다.
"대가리를 깨 버려!"
"구파니 어쩌니 하고 거들먹거리는 것들 다 박살을 내 버려라!"
기이한 열기가 들끓는 그 환호성을 들으며 위립산이 허허 웃어 버렸다.
'괜찮을까?'
……어떻게든 되겠지.
청명은 쏟아지는 환호를 받으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뭐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이렇게……."
"우와아아아아아아! 화산신룡이다!"
"이번에도 뭔가 보여 줘라, 화산신룡!"
"우승! 우승이다! 화산파가 우승한다!"
청명의 입꼬리가 살짝 떨린다.
"헤헤. 그렇게 칭찬한다고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닌데. 헤헤헤헷."
청명이 히죽히죽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강한 인상을 남기려면 무뚝뚝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자꾸 칭찬만 받으면 헤벌쭉하게 된다.
'이게 다 칭찬을 못 받고 커서 그런 거라니까!'
- 칭찬받을 일을 해야 칭찬을 해 주지! 이 망둥이 같은 놈아!
"끄으응."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그가 매화검존으로 살 때는 공교롭게도 강호에서 비무대회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열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비무대회는 꾸준히 열렸지만 그의 배분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는 이상할 만큼 열리지 않았다.
그가 후기지수일 때는 후기지수 비무대회가 열리지 않았고, 그가 장성했을 때는 후기지수 비무대회만 열렸…….
"아니, 이 새끼들이? 지금 생각해 보니 일부러 그랬구나!"
하기야.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는 청명의 실력이 널리 알려져 있을 때니 비무를 피할 만도 했다.
쯧쯧쯧. 이 한심한…….
- 실력이 아니라 악명이 널리 알려졌겠지, 이놈아.
"거 안 찾을 때 불쑥불쑥 나오지 마시라니까!"
- 내 맘이다.
"끄으으응."
청명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내렸다.
하긴 저 양반도 보고 싶으시겠지.
만약 청명이 등선하여 선계에 있었어도 이 대회만큼은 어떻게든 보려고 구름을 좌우로 밀어 냈을 것이다.
"그러니 좋은 결과를 내긴 해야 하는데……."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하다 보니 서글퍼진 탓이다.
어린놈들 재롱이나 보고 박수나 쳐야 할 나이에 그 어린놈들 사이에 껴서 비무질이라니.
원래 그의 자리는 지금 장문인들이 앉아 있는 저곳이다. 아니, 원래의 몸으로 왔다면 저기 있는 놈들을 싹 다 바닥에 꿇려 놓고 신발이나 닦으라고 했겠지.
그런데 되레 그들 앞에서 재롱을 떨어야 할 상황이라니.
이래서 인생은 모르는 것이다.
"쯧."
청명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진송이라고 했었나?'
무당의 제자다.
명문 중의 명문인 무당의 제자. 그중에서도 비무대회 대표로 이십 인 안에 든 아이다. 그럼 그 실력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니 당당…….
어?
쟤 왜 저래?
청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상대로 나온 진송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 기이한 반응에 청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
"히이이이이익!"
"……."
청명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진송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난 채 땀만 뻘뻘 흘려 대고 있었다.
"너 어디 아파?"
"……아, 아닙니다."
"말투는 왜 그렇고?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냐?"
"아닙니다! 진짜 괜찮습니다!"
"……."
물론 진송은 괜찮지 않았다.
하필 청명의 상대라니.
'내가 저 괴물을 어떻게 이겨! 저 괴물은 무진 사숙을 때려잡은 놈이라고!'
어디 무진 사숙뿐이던가?
허산 장로님도 잠시지만 저 괴물 놈과 동수를 이뤘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일대제자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무진 사숙에, 장로님이라니.
막말로 그가 무진과 겨룬다면 삼 초가 지나기 전에 다리가 분질러질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무진을 이긴 괴물을 대체 무슨 수로 상대하란 말인가?
이리 보는 눈이 많지 않았으면 비무고 나발이고 그냥 줄행랑을 놓고 말았을 것이다.
'저건 숫제 괴물이라고!'
겁에 질린 진송을 보며 청명이 피식 웃었다.
"진짜 괜찮니? 많이 아파 보이는데."
"괘,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냥 긴장을 많이 해서."
"아, 그렇구나."
"예! 예! 그렇습니다!"
청명이 진송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는 짓이 꽤 귀엽다.
"보아하니 사람 보는 눈은 있는 것 같고. 그럼 괜히 서로 힘 빼지 말고 기권하지?"
"아, 아닙니다. 도전해 보겠습니다."
"진짜?"
"예!"
"꼭?"
"……예?"
청명이 살짝 입술을 실룩이며 검을 검집째 뽑아 들었다.
"그렇군. 꼭 붙어 봐야 알겠다 이 말이지?"
"……."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덤비겠다는 그 기상은 칭찬해 주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어차피 끝난 것 귀찮게 손을 움직여야 한단 말이지. 그런데 굳이 꼭 싸워 보시겠다?"
"어, 그게……."
"오냐. 내가 그 기상의 대가로 성심성의껏 상대해 줄 테니까 제대로 한번 붙어 보자!"
살기로 눈을 희번덕대는 청명을 보며 진송이 환하게 웃었다.
'그냥 항복하자.'
일단 살고 봐야지.
허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