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을 만들어 주지. (4)
진금룡이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 애송이가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인 거지?'
비무를 하자고?
화산의 삼대제자와 이대제자가? 그것도 연승전으로?
그걸로 승부를 가리자는 건가?
"이……."
진금룡이 이를 갈았다.
종남을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다. 종남의 이대제자를 거지발싸개로 보지 않고는 감히 할 수 없는 제안이다!
화산의 삼대제자들이 깔끔하게 이겼다고는 하지만, 배분이 왜 배분인가?
웬만한 재능이나 노력으로는 쉽게 넘을 수 없기 때문에 배분이다. 배분 간의 격차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문파의 위계가 무너진다. 그렇기에 수많은 명문들이 배분을 지키며 제자를 받는 시기를 나누지 않는가?
아무리 화산의 삼대제자들이 강해졌다고 한들, 그건 그 배분끼리의 이야기다. 이대제자와 삼대제자의 비무 같은 건 살면서 들어 본 역사가 없다.
이런 제안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망둥이 같은 놈이……!"
진금룡이 이를 갈며 일갈하려는 순간 사마승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자, 장로님."
"진정하거라."
"하나……."
사마승이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린다.
"이미 체면은 땅에 떨어졌다. 이제 와 체면을 지키자고 저 제안을 거절해 봐야 겁이 나서 달아났다는 소리만 들을 것이다."
진금룡이 입술을 깨문다.
부인할 수가 없다. 저 빌어먹을 놈이라면 그런 말을 퍼뜨리고도 남을 것 같다. 차라리 공손하거나 부드러운 제안이었다면 거절할 명분이라도 있었겠지만, 저리 도발을 해 대는데 무슨 수로 거절하란 말인가?
이건 받을 수도 없고,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제안이다.
사마승이 고개를 들어 청명을 바라본다.
"청명이라고 했느냐?"
"네. 전에는 잘 기억 못 하시더니 이제는 하시네요."
"네 제안은 잘 들었다. 하지만 네가 감히 화산을 대표하여 종남에게 제안을 할 위치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장문인께 직접 물으시면 되죠. 뭐, 어려운 일이라고."
"이……."
저놈은 같은 대답을 해도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을 줄 아는 놈이다.
"나는 네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무릇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는 법. 화산에서는 너를 그리 가르치더냐?"
매우 치사하지만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일단 기분이 나쁘면 나이와 예의를 들어 공격하라. 오래전부터 내려온 확실한 공격법이 아니던가?
"화산은 그렇게 안 가르치는 것 같은데, 제가 입문한 지가 얼마 안 돼서 아직 제대로 못 배워서요. 부모도 없이 고아로 자란 몸이라 좀 부족한 면이 있으니 이해해 주시면 되겠네요."
"어……."
거기서 왜 부모가 나오나.
그럼 내가 뭐가 되나?
사마승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급히 할 말을 찾는 동안, 청명은 황문약 쪽을 응시하며 물었다.
"어때요?"
"아, 아니 다 좋은데 그걸 왜 우리한테……?"
"여기 화산과 종남 말고는 거기 계신 분들밖에 없잖아요.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한 거죠."
그리고 판을 만들어 줄 사람도 필요하고.
이렇게 섬서의 유지들을 끼워 넣어 버리면 종남은 체면 때문에라도 이 승부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상대와의 승부가 무서워서 물러났다는 것은 무파(武派)에 있어서 더할 수 없는 치욕이니까.
황문약이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슬쩍 뒤쪽의 유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찌 생각하시오?"
"으음. 공정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 즐거운 비무를 좀 더 볼 수 있다면 저희는 좋지요!"
"사실 보고 싶기는 합니다. 저 삼대제자들이 종남의 이대제자들을 상대로 얼마나 선전할 수 있을지 말입니다. 무척 기대가 되는군요."
황문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당연히 찬성할 것이다. 잣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화산의 삼대제자들을 종남의 이대제자와 붙여 본다면 저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쪽은 그 승부를 무척이나 바라네, 소도장."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양쪽 분들만 허락해 주시면 될 것 같은데. 장문인! 장문인께선 어떠십니까!"
현종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 대체 뭘 어쩌려고?"
현종이 황당해하자 운검이 넌지시 말한다.
"허락하시지요, 장문인."
"허락?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허락하라는 말이더냐?"
"머리가 좋은 아이입니다."
"……."
운검이 단호하게 말했다.
"조금 과한 면이 없지는 않으나, 저는 저 아이와 대화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어리숙하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외려 때때로 제 머리 위에서 저를 가지고 놀려 든다는 느낌마저 받았습니다. 장문인께서도 저 아이에게 현기가 흐른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그랬다만……."
확실히 청명에게는 그런 면이 있었다.
아이의 탈을 쓴 노인 같은 부분.
"그런 아이가 지금 우리가 우려하는 부분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반드시 대책이 있을 터이니 허락해 주십시오. 무엇보다……."
운검이 깊게 숨을 내쉬고 빙그레 웃었다.
"이제 와 진다고 해서 뭐가 문제겠습니까? 저희는 잃을 것이 없습니다."
현종이 가만히 운검을 바라보았다.
그 두 눈에 담긴 확신.
다른 장로들의 시선도 확인한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운검의 말대로 이 모든 것이 저 아이의 계획하에 이뤄진 일이라면.'
남은 일도 믿고 맡겨 볼 만할 것이다.
아이에게 너무 과도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화산은 잃을 것이 없다.
설사 이어지는 비무에서 처참하게 패한다고 해도 벌어 놓은 것을 반도 까먹지 못할 것이다.
결심을 굳힌 현종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산은 찬성하겠소."
그 즉시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 이리되면 종남에서 물러설 수가 없을 텐데!"
"오늘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는군요. 오늘 본 것을 내 널리 알려야겠습니다. 그냥 종남 아이들을 보러 온 곳에서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화산은 화산입니다. 왜 화산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명문으로 불려 왔겠습니까? 부침은 있을지언정 몰락은 없는 법이지요."
어느새 태도를 바꾼 유지들의 말을 들으며 황문약이 쓴웃음을 지었다.
'박쥐 같은 것들.'
하지만 저게 장사꾼의 속성이고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힘이 있고 장래성이 있는 이들과는 어떻게든 친교를 트고 싶어 하는 게 사람 아니던가?
다시 말해 지금 이들의 눈에 화산이 거래 가치가 있는 곳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하면…… 종남은 어떻게 나올까?'
황문약이라면 이 제안은 절대 받지 않는다. 이건 남는 게 없는 장사니까. 하지만 황문약이 사마승의 입장이라면?
'받아야지.'
무인에게는 장사꾼과 달리 모든 걸 다 내주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하나가 있다.
바로 자존심이다.
유리한 제안을 받고도 꼬리를 말고 물러났다는 소리는 죽어도 들을 수 없는 게 무인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렇다면 종남도 찬성하겠소!"
그렇지!
이렇게 나오지!
황문약이 흥미진진해진다는 얼굴로 두 진영을 바라보았다.
윤종이 기겁한 얼굴로 비무대 위로 박차고 올랐다. 그리고 황급히 청명을 붙잡아 질질 끌고 간다.
"왜 이래?"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항의하자 윤종이 구석에 그를 몰아넣고 작게 속삭였다.
"인마! 어쩌려고 이러냐?"
"뭘?"
"우리가 이대제자들을 어떻게 이겨! 종남의 이대제자다! 진금룡이란 말이다! 저 양반은 섬서제일기재라고."
"호오? 그래?"
"서, 설마 우리가 저 양반도 이길 수 있는 거냐? 우리가 그만큼 강해졌다는 말이냐?"
"사형."
"응?"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
"물에 빠진 놈 건져 놨더니 보따리로 사람 후려치고 자빠졌네! 뭐? 누굴 이겨?"
"아, 아니……. 그냥 물어본 거지. 혹시나 해서."
살짝 기대하기는 했다. 사알짝.
"꿈도 꾸지 마. 절대 못 이긴다."
특히나 저 진금룡은.
다른 이대제자라면, 어찌어찌 조걸 정도는 한번 해볼 만하다 정도? 음…….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그리고 진금룡이 나서는 순간 화산의 삼대제자들은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박살이 날 것이다.
청명이 이들에게 가르친 것은 같은 나이대의 상대에게는 확실하게 먹히지만, 기초고 나발이고 차이가 너무 나 버리면 답이 없다.
"그, 그럼 어쩌려고?"
청명이 씨익 웃었다.
"계획은 간단해 그러니까……."
"차륜전이다!"
사마승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놈들이 노리는 것이야 뻔하다. 차륜전을 통해 한 사람이라도 이기겠다는 거지. 삼대제자 아홉이 연속으로 붙어서 힘을 빼 놓은 다음 마지막 하나가 확실하게 이기겠다는 뜻이다."
사마승은 청명의 말에 함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순식간에 간파했다.
이긴 자는 계속해서 싸운다.
다시 말하자면, 지지 않은 자는 싸움을 멈출 수 없다. 연속으로 이기게 된다면 체력을 낭비하면서도 계속 비무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마 저놈은 선봉으로 금룡이가 나갈 것으로 생각했겠지."
진금룡이 선봉으로 나선다. 화산의 삼대제자 아홉이 진금룡의 힘을 빼 놓는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청명이 나서서 힘이 빠진 진금룡을 이긴다.
아홉 번의 패배와 단 한 번의 승리.
하지만 이 한 번의 승리는 아홉 번의 패배 이상의 가치가 있다. 종남을 대표하는 후기지수 진금룡이 화산의 삼대제자에게 패했다는 것은 섬서의 모든 무가를 들썩이게 하는 사건이 될 테니까.
사마승이 이를 갈았다.
"간교한 놈."
사마승이 고개를 돌려 진금룡을 바라본다.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진금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하지 않으면 됩니다. 열이면 열. 스물이면 스물. 얼마든지 상대해 주겠습니다."
"아니다."
"……예?"
사마승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적의 노림수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
그러자 진금룡이 영 마뜩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네가 나서서 열을 꺾는다고 그게 무슨 자랑이 된다는 말이더냐? 화산의 삼대제자를 상대하기 위해 네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만 나올 뿐이다."
진금룡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애초에 기울어진 이 싸움은 어떤 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너는 대장을 맡는다."
"……예, 알겠습니다."
"선봉은……."
사마승이 고개를 돌려 한 사람을 가리켰다.
"네가 나가거라, 유백(劉柏)."
"예, 장로님!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모두 이기지 못해도 좋다. 체력이 달린다면 그냥 내려오거라. 저놈들의 검에 쓰러지는 모습만은 절대로 보이면 안 된다. 알겠느냐?"
"예!"
사마승이 이를 갈았다.
유백이 모두를 쓰러뜨리면 최고고, 설사 그러지 못한다더라도 둘 정도에서 끝내는 게 최선이다.
'그럼 차봉으로 종서한? 금룡이가 나갈 수 없으니 종서한이 최선이다. 이송백 저 녀석은 최근에 너무 기세가…….'
"어엇?"
그 순간 그의 좌우에서 당황스러운 헛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사마승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뭐, 뭐야?"
그리고 사마승은 보았다.
비무대 구석으로 끌려갔던 청명이 어깨에 목검을 걸친 채 건들건들 걸어 나오는 것을.
"계획은 뭔 계획이야, 얼어 죽을. 내가 계획이다."
청명이 피식 웃으며 검을 내렸다.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을 만들어 주지. 종남."
담담하고도 끓어 넘치는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