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03화 (104/1,567)

103화.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을 만들어 주지. (3)

"꺽……. 꺼어억……."

"장문인! 장문인 정신 차리십시오! 의원! 의원은 아직 멀었는가!"

"의원은 무슨! 비켜 보게!"

현상이 현영을 밀어 내고 현종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신속히 기운을 밀어 넣기 시작한다.

'아니, 너무 좋아서 기혈이 흔들리는 일도 있나?'

놀라서 주화입마에 든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좋아서 그리된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 기이한 일이 지금 현상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기운을 밀어 넣어 내부를 다스리자 현종이 깊게 숨을 내쉰다.

"지, 진정이 됐네."

"……괜찮으십니까? 장문인?"

"괜찮냐고?"

현종이 현상을 획 돌아본다. 맹세컨대 현상은 단 한 번도 장문인이 저토록 눈을 희번덕거리는 건 본 적이 없다.

"지금 괜찮냐고 물은 건가?"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사형."

"이, 이게 대체 어찌……. 허어, 세상에. 허어……."

현종이 연이어 숨을 몰아쉰다. 아무래도 진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왜 아니겠는가?

현상은 현종을 이해했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도 지금 손이 벌벌 떨릴 지경인데, 장문인인 현종은 오죽하겠는가?

"운검아!"

"예, 장문인."

"네, 네가 아이들을 저리 가르쳤느냐?"

운검이 살짝 웃고 말았다.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저도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가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저건 삼대제자들이 자체적으로 진행한 수련의 결과입니다."

"자체적으로?"

현종이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운검을 돌아본다.

"사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게나."

운암이 들뜬 목소리로 운검을 재촉한다. 평소 항상 침착하던 그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도 청명이……."

"청명?"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이름이 나온다. 지금도 사실 내심으로는 그 이름이 나오리라 생각했다.

"저 아이는 대체 뭐 하는 아이라는 말인가?"

"장문인께서 입산을 허가하신 아이 아닙니까? 정말 전혀 모르시는 겁니까?"

"내가 뭘 알겠는가? 그저 찾아왔기에 인연이다 싶어 받아들인 게 전부인 것을."

그 인연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만들어 내고 있다.

화산이 마교로부터 화를 당한 이후로, 아니 그 이전 십만대산에서 선대가 전멸한 이후로 화산은 단 한 번도 종남을 이겨 보지 못했다.

사실 이겨 보지 못했다는 표현도 화산에서나 쓰는 거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는 말이 맞다. 그렇기에 저 사마승이 그리 도발을 해 댈 때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게 아닌가?

그런데 화산의 삼대제자들이 저 종남의 삼대제자를 이겨 버렸다. 심지어 그냥 승리도 아니라 완전무결한 압승이다.

'선조시여.'

현종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런 날이 오다니.

언젠가는 이날이 올 거라 굳게 믿었지만, 자신 대에는 불가능하리라 여겼었다. 그런데 꿈에서만 막연히 그려 보았던 그 광경을 막상 눈앞에서 보게 되니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장문인! 됐습니다! 저 아이들이 해냈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그래. 장하기 짝이 없어. 그래."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저 '그래'라는 말만 몇 번이고 반복할 뿐이었다.

'이제 이걸로 죽어서 선대들을 뵐 면목이 생겼…….'

어?

근데 쟤는 왜 또 나오지?

현종이 눈을 두어 번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허리춤에 목검을 찬 청명이 터덜터덜 비무장으로 걸어 나온다.

그러더니 현종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쪽을 보는 것 같습니다만?"

"저, 저 아이가 또 뭘 하려고?"

이제는 우려보다는 기대가 더 크다. 현종이 주먹을 꽉 쥐고는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청명이 입꼬리를 사악하게 말아 올렸다.

"……."

저거 도인이 지을 표정이 아닌데?

저, 저놈이 대체 또 뭔 짓을 저지르려고?

이 순간만큼은 태상노군의 노기도 살짝 외면하고 싶은 현종이었다.

"이……. 이이! 이 한심한 놈들 같으니!"

사마승은 노기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질끈 깨문 아랫입술이 찢어져 주르륵 핏물이 흘러내린다.

십 연패.

이 이상 참담한 패배가 없다. 먼저 십 연승을 했지만, 그건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저 화산에 패했다는 것, 그것도 압도적으로 패했다는 것이 그의 머리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심지어 화산이 상대가 아니더라도 십 연승 뒤에 십 연패를 하면 누구도 웃을 수 없을 것이다. 진 건 아니지만 기분 상으로는 패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 꼴을 하고도 눈을 뜨고 종남으로 돌아가겠단 말이더냐! 이 한심한 놈들! 화산 따위에게 져? 그것도 이리 처참하게!"

입에서 불을 뿜을 기세로 사마승이 노기를 토한다.

"이 머저리 같은 놈들이 종남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는구나!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화산에게 져? 화산에게? 이이익! 이 병신 같은 것들!"

삼대제자들은 차마 사마승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고, 모두 승리한 이대제자들도 찝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사마승이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거의 넘어갈 지경에 이르는 동안, 진금룡은 금방이라도 누구 하나 패 죽일 듯한 눈빛으로 삼대제자를 돌아보았다.

끝났다.

그가 원했던 완벽한 승리는 이미 거름통에 처박혔다. 심지어 '승리'마저도 무너졌다.

무승부.

화산과 무승부라니.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이 지금 그의 앞에 닥쳐오지 않았는가?

"빌어먹을……."

사마승이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욕설이 절로 흘러나온다. 핏발이 선 눈으로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던 진금룡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놈이!"

진금룡의 말에 사마승도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터덜터덜 비무장으로 걸어 나오는 청명의 모습이 보인다.

'저놈!'

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의 시작은 바로 저놈이었다.

"저놈이 또 왜 나온다는 말이냐!"

사마승의 일갈에 모두가 청명을 돌아본다.

"세상에. 이런 결과가 나오다니……."

"화산이 칼을 갈았나 봅니다. 정말 이건 상상도 못한 일이군요."

"십 연승이라니 그 종남의 삼대제자들이 저 화산의 삼대제자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화산의 삼대제자는 종남의 이대제자들이 보여 준 것 이상의 격차를 보여 주었다.

게다가 이리되고 보니 화산의 제자들을 상대하며 종남의 제자들이 보여 준 언행이 더 마음에 걸린다. 그때는 승자의 여유쯤으로 생각했지만, 화산의 삼대제자들이 별다른 도발이나 조롱 없이 깔끔하게 이겨 버리고 나자 새삼 그 모습이 추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실력으로도 이겼고, 태도 면에서도 이기지 않았습니까?"

"과연 명문 화산이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 양모는 감탄했습니다."

오른다.

오르고 있다.

화산의 입지가 미친 듯이 상승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황 대인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즐거운 비명을 애써 억지로 눌렀다.

이 비무를 기점으로 화산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개중에는 벌써부터 화산에 얼마를 투자해야 할지 주판을 두드리는 이들도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쉽게 계산이 서지 않을 것이다. 저들에게 있어 이 일련의 사태는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일 테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일이 있기 전에 미리 청명을 만나 화산에 투자를 한 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이었는지 실감하게 된다.

"그럼 이게……."

그 순간이었다.

"저기, 잠시만요."

누군가 비무대 위에서 황 대인 쪽을 향해 소리친다.

"응?"

황문약이 고개를 돌려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청명이 이쪽을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아까 그 아이가 아닙니까?"

"분명 청명이라 했지요. 선봉으로 이긴."

황문약은 주변의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며 청명과 시선을 마주쳤다.

척하면 착이라고 황 대인이 목소리를 돋워 대답했다.

"무슨 일인가, 소도장."

청명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 간다.

"중간에서 보셨으니 적당한 판단을 내리실 수 있을 것 같아 묻는 건데요."

"무언가?"

"누가 이긴 거죠?"

"으응?"

누가 이겼냐고?

그야…….

황문약이 안색을 굳혔다.

'소도장은 이 일은 무승부로 끝낼 생각이 없구나.'

무슨 논리를 들고 나올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리되면 호응을 해 줘야 한다. 황문약이 슬쩍 뒤로 고개를 돌려 모두를 보며 물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생각해 보니 승패를 가르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리에 모인 섬서의 유지들이 당황한 기색으로 생각에 잠기더니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무승부가 가장 타당하지만, 굳이 승부를 나눠야 한다면 좀 더 나이가 많은 이대제자들이 이긴 종남이 아니겠습니까?"

"에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화종지회의 의의가 뭡니까? 문파의 미래를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전력을 비교할 것 같으면 이대제자와 삼대제자가 모두 비무를 할 이유가 없지요. 장래성과 성장을 두고 본다면 좀 더 어린 삼대제자가 우세했던 화산의 승리입니다."

"허어, 그게 무슨 소리요. 가능성은 그저 가능성이 아닙니까. 저 삼대제자들이 영영 종남의 이대제자들을 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종남의 삼대제자의 사정도 봐줘야지요. 누가 봐도 저 아이들이 화산의 삼대제자들보다 어리지 않습니까? 저 나이 대는 한두 살 차이만으로도 굉장히 차이가 납니다."

"그리 따지면 화산의 이대제자도 종남의 이대제자보다 어리오!"

"아니, 이 사람이!"

결론이 나지 않는다.

서로 저마다 이유가 있다. 이리 보면 화산이 이겼다 할 수 있고, 저리 보면 종남이 이겼다 할 수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황문약이 웅성대는 중인들을 대표해 소리쳤다.

"소도장. 그 결론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일세."

"그렇죠?"

청명이 손가락을 튀겼다.

"그런데 이리 끝나 버리면 지켜보시는 분들도 찝찝하시겠죠. 게다가 돌아가시는 종남 분들도 께름칙하고, 보내는 우리도 영 개운하질 않을 거예요. 그래서 제 생각인데, 차라리 승부를 확실하게 가리는 게 나을 것 같거든요."

"……어찌 말인가?"

"간단하죠."

청명이 종남을 가리켰다.

"거기 이긴 사람이 딱 열 명."

"……."

종남의 제자들이 청명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화산에서 이긴 사람이 열 명."

"우, 우리는 왜?"

윤종이 당황해 말을 더듬는다.

청명은 양쪽을 번갈아 보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진 사람들은 빼고 이긴 사람들끼리 다시 한번 붙으면 되는 거죠. 그럼 누가 봐도 깔끔하지 않겠어요?"

'저게 미쳤나?'

'뭔 꿍꿍이야! 저기는 다 이대제자고 우리는 다 삼대제자인데!'

'아냐. 저놈이 지고 들어가는 싸움을 할 리가 없어. 분명 다른 조건이 있겠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청명이 조건을 달았다.

"대신!"

그럼 그렇지.

삼대제자들이 막 안도하려는 찰나 그들의 귓가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한 명씩 승부를 가리는 시시한 비무 같은 건 집어치우고! 붙으려면 제대로 붙죠.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연승전으로 갑시다. 이긴 사람은 계속 다음 사람과 다시 비무를 하는 거로. 마지막에 서 있는 쪽이 이기는 거죠. 어때요?"

청명이 사특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종남을 바라본다.

"쫄리면 뒈지시든가."

절대 피할 수 없는 도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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