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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6화 (106/1,567)

106화. 화산은 사라지지 않는다. (1)

세상이 고요해진다. 더없이 싸늘한 침묵이 화산에 내려앉았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고, 그 누구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학을 아는 이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건지 알기에 입을 열지 못했고, 무학을 모르는 이들조차도 지금 눈앞에서 뭔가 굉장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마승이 떨리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기본 검술만으로…….'

윤백을 제압했다?

그것도 단 한 번의 틈도 내어 주지 않고?

일련의 연격은 물이 흐르는 듯이 자연스러웠다. 그 검에 휘말린 윤백은 반격조차 해 보지 못했다.

과연 나라면 가능할까?

사마승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바로 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윤백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것이라면 사마승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기본 검술만으로 반격할 틈도 주지 않고 상대를 제압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설사 사마승보다 배는 강한 이가 오더라도, 지금 청명이 보인 신위를 똑같이 해 보일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다.

이건 얼마나 기본을 완벽하게 익혔느냐, 그리고 얼마나 시의적절하게 검을 펼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조악하게나마 비유하자면 거대한 뿌리.

화려한 가지와 굵다란 줄기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그 모든 것을 단단히 받치는 뿌리. 그 뿌리가 너무도 거대하게 뻗어 있는 것이다.

'저, 저놈은 대체 뭐 하는 놈이냐?'

뿌리가 거대하다는 데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저 아이가 거대한 나무로 자라리라는 것. 이 화산을 모두 덮고도 남을 거대한 나무가 되리라는 것!

그때 더없이 차갑고도 날카로운 음성이 사마승의 귀를 파고든다.

"다음."

청명을 바라보는 사마승의 눈이 떨렸다.

청명은 검을 겨눈 채 한없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이제 이 승부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저 청명이 지금 사마승이 생각하는 대로 자라난다면 언젠가 종남은 저 아이의 그늘에 가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

그 과거의 '매화검존'이 있던 때처럼 말이다.

"자, 장로님."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마승은 자신의 주위를 채우고 있는 제자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누구를 보내야 하는가?

그 순간이었다.

종서한이 으르렁대며 청명을 노려본다.

"장로님, 제가 나가겠습니다! 제가 나가 저놈을 쓰러뜨리고 화산 놈들에게 주제를 알려 주겠습니다."

"……."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지금의 종서한에게는 청명의 강함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찌해야 하는가?

살짝 고민하던 사마승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서한."

"예! 장로님."

"절대 쉽게 이기지 마라. 저놈의 진을 빼라."

"……예?"

"시키는 대로 해라!"

의아한 눈으로 사마승을 돌아본 종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가라."

"예!"

종서한이 목검을 움켜잡고는 비무장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러자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진금룡이 입을 연다.

"장로님."

"……."

"말씀드리기 조금 어렵지만……."

사마승의 시선이 진금룡에게로 향했다. 그의 얼굴을 본 진금룡은 움찔하여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차갑다.

너무도 차가워 한기마저 느껴지는 얼굴.

사마승은 이내 시선을 돌려 비무장을 노려보았다.

종서한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방심하지 않는다. 나는 상대를 얕보지 않는다. 나는 과신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실력만 다 낼 수 있다면, 저런 아이에게 질 리가 없다. 윤백처럼 방심하고 선기를 내주면, 저런 말도 안 되는 일도 벌어지는 것이다.

"윤백을 쓰러뜨린 것은 칭찬해 주마. 하지만 나는 다……."

뒷말은 입술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절로 닫혀 버린 입이 소리를 막고, 사고를 정지시킨다.

고요하다.

그의 앞에 서서 상단세를 취하고 있는 청명의 주변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것 같다.

'……이건?'

밑에서 지켜볼 때는 몰랐다.

하지만 마주 선 청명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지금껏 종서한이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진금룡에게도, 심지어 스승에게서조차 이런 느낌을 받아 보지 못했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간다.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그저 마주 선 청명을 눈으로 본 것만으로도 몸이 절로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반개한 청명의 눈이 종서한을 바라본다.

종서한은 순간 저도 모르게 목검을 들어 자세를 취했다. 머릿속에 가득 찼던 잡념들이 모두 사라진다. 오로지 이 세상에 그와 청명, 둘만 존재하는 것 같다.

그 순간.

스슷.

청명이 느릿한 걸음을 내디뎠다.

분명 눈으로 볼 때는 느릿한 걸음이었건만, 청명의 몸은 순식간에 종서한의 바로 앞에 도달해 있었다.

발끝으로 땅을 짓누른다.

밀쳐 오는 반동의 힘을 허리로 이끌고 허리를 뒤틀어 상체로 밀어 낸다. 그리고 그 힘을 그대로 이어받아 단호하게 검을 내리친다.

쾅!

그저 아무것도 아닌 내려치기.

힘, 속도, 그리고 정확성. 그저 기본 중의 기본.

그 기본을 더없이 충실히 지킨 일 검이 내는 위력은 단순한 기본을 넘어선다.

종서한의 다리가 휘청한다.

청명이 검을 붙인 그대로 한 발 더 전진한다. 자세가 흐트러져 균형을 잡지 못한 종서한이 억 소리를 내며 일순 몸을 뒤틀었다.

'아, 아니!'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종서한의 눈에, 자신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목검이 보였다.

'아…….'

종서한의 눈에 경악과 공포가 어렸다.

'말도 안…….'

콰앙!

종서한이 피를 뿌리며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이 검.

단 이 검이었다.

이대제자 중 두 번째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종서한이 단 이 검 만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 경악에 찬 시선을 받으며 청명이 다시 차갑게 일갈한다.

"다음."

청명이 가만히 종남을 바라본다.

이제는 종남도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이 굳어 버린 얼굴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아직 이르지.'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 그가 보여 줄 것은 아직 남았으니까.

패배를 주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다.

종남이 화산에 한 짓을 생각한다면, 패배 따위는 너무도 약한 벌에 불과하다.

오늘 이곳에서 청명은 종남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새길 것이다.

화산이 세상에 이어지는 한, 종남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시간을 넘어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낙인.

'너희는 저지르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질렀다.'

화산은 천하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청명의 만류에도 그의 사형제들은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초개처럼 그 목숨을 버려 천마를 막아 내었다.

그런데 그 대가가 고작?

가라앉는다.

꾹꾹 눌러 왔던 분노가 청명의 가슴 속에서 차가운 불꽃이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킨 천하에는 종남 너희도 있었지.'

그런데 종남은 그 은혜를 갚기는커녕, 매화검법을 훔쳐가고 화산을 괄시했다. 그리고 이제는 화산을 영원히 짓밟기 위한 수작까지 부리는 중이다.

'잘도 지금까지 참았지.'

청명은 오랜만에 스스로를 칭찬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하는 마음을 누르며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눌러 놓았던 분노를 이제 더는 참을 필요가 없다.

"다음!"

청명이 다시금 날카롭게 소리치자 종남의 문하들이 움찔하여 청명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쭈뼛쭈뼛 비무장으로 들어와 종서한을 둘러업고 나간다.

그중 하나가 남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청명과 마주 서선 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육합은 충분히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으로 가야지.

청명이 가만히 기수식을 취한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서 숨을 들이켜는 듯한 신음이 들려왔다.

"나, 낙화검!"

낙화검의 기수식을 취한 청명이 가만히 검을 들어 종남의 제자를 겨눈다.

그리고 이내 더없이 쾌속하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달라!'

조걸이 주먹을 꽉 움켜쥔다.

청명의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졌다. 조금 전 육합을 펼쳐 보일 때의 진중하고도 간결한 동작이 아니다. 마치 협곡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세차고도 날카로운 동작.

검법을 바꾼 것만으로도 사람이 달라진다. 어찌 한 사람이 저리 다른 검을 이토록 완벽하게 펼쳐 낼 수 있는가?

절벽에 자라난 고목에 핀 꽃이 세찬 바람을 맞아 휩쓸리는 것 같다.

쇄액!

육합을 펼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

가공할 쾌검이 종남의 제자를 향해 날아든다.

"큭!"

카캉!

어찌어찌 막아 내었다고 생각한 순간, 검이 찔러 들어온 속도보다 더 빠르게 회수되었다가 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다시 찌르고 들어온다.

'뭣!'

카캉!

목 바로 앞에서 막힌 검이 다시 회수된다.

쾌검을 상대하는 법은 찔러진 검이 회수될 때를 노리는 것. 그게 정석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종남의 제자는 감히 반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검이 회수되는 틈을 노려 공격하려는 순간, 회수되었던 검이 재차 찔러 들어온다.

"이익!"

더 빠르게.

캉!

더더욱 빠르게!

파앗!

제대로 쳐 내지 못한 검이 어깨를 스친다. 그저 스친 것뿐인데도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이 생생히 느껴진다.

"으아아아아아악!"

대처법을 찾지 못해 끝내 이성을 잃은 종남의 제자가 발악을 하며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퍼억!

하지만 검을 잡은 손에 채 힘을 주기도 전에, 청명의 검이 그의 목젖을 강타한다.

"끄르륵!"

종남의 제자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린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종남의 제자를 일별한 청명이 차갑게 일갈했다.

"다음."

윤종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저, 저게 낙화검.'

다르다.

윤종이나 조걸이 펼치는 낙화검과는 너무도 다르다.

육합이 검술의 기본에 충실한 검법이라면, 낙화검은 화산 검학의 중심이 되는 쾌(快)를 중심으로 한 검법이었다.

청명은 지금 검으로 그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이것이 낙화검이라고. 이것이 화산의 검이라고.

"……낙화검만으로."

그들이 익히던 검이다.

하지만 솔직히, 윤종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낙화검이 종남의 검처럼 뛰어난 무학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검법이 전부가 아니라지만,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화산의 무학은 종남의 무학에 미치지 못한다.

그게 지금까지 윤종의……. 아니, 삼대제자 전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백 마디 말 대신 단 한 번의 실전으로 그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화산의 무학은 절대 종남의 무학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게 굳이 청명이 육합과 낙화검만으로 저들을 상대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뭘 보고 있었던 거지?"

스스로 가진 것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이가 타인이 가진 것을 부러워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다.

"사형. 낙화검이……."

"그래."

조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윤종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눈을 떼지 마라. 저게 화산의 검이다. 우리가 익히고 우리가 전해야 할 화산의 검이다."

윤종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마 오늘 이 순간 이후로 화산의 제자들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저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봐 버린 이상 절대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의 눈에 검을 들고 있는 청명의 등이 보인다.

언제나 입으로만 떠들어 대던 저 떠버리가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 말 없이 저 등으로 그들을 이끌고 있다.

'더 보여 다오.'

화산의 검이 무엇인지.

화산의 검이 얼마나 강한지.

세상이 점점 고요해진다.

윤종의 시선에 청명의 모습이 더 크게 차올랐다. 온 세상에 오로지 청명만이 서 있는 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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