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을 만들어 주지. (2)
"저기 봐."
"응?"
청명이 비무장을 가리키며 윤종에게 말했다.
조걸이 걸어 들어가는 동안 종남의 제자들이 우르르 나와 쓰러진 공진을 들쳐 업고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종남 애들은 어떤 것 같아?"
"어떻다니?"
"셀까? 약할까?"
"당연히 강하지."
윤종의 대답에 청명이 살짝 눈을 반개하고는 그를 바라본다.
"그런데 사형이 그 센 놈을 이기셨다?"
"모, 몰아가지 마라. 사실이 그런데 어쩌겠느냐?"
낄낄 웃은 청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세지. 맞아, 세. 나이에 비하면 엄청 세지. 그런데 반대로 말하자면 약하기도 해."
"……그게 무슨 소리냐?"
"그 나이에 배워야 할 것에 비해 너무 많이 배웠으니까."
"많이 배우고 익히면 좋은 거 아니냐?"
"사형."
청명이 손을 뻗어 집의 형상을 그린다.
"무학이란 탑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야. 바닥이 얼마나 튼튼하고 아래층이 얼마나 튼튼한가에 따라 얼마나 높은 탑을 쌓을 수 있느냐가 결정되지."
"……그렇지."
"그런데 쟤들은 일 층을 채 다 짓기도 전에 이 층을 올리고, 이 층을 채 다 짓기도 전에 삼 층을 올렸어. 층을 계속 올리면서 아래층을 보강하는 중이라 이 말이지."
"……."
"그런 애들이 일 층을 완벽하게 지은 탑이랑 부딪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무너지겠지."
"바로 그거야."
청명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한 건 사형들의 일 층에 있던 목재를 다 걷어 내고 돌을 쌓아 올린 것뿐이야. 짓기는 힘들어도 한번 지어지면 잘 무너지지 않지."
"……나는 이해가 안 가는데. 그 수련에 그런 의미가 있었다고?"
"무학의 기본이 뭐야?"
"응?"
청명의 얼굴이 살짝 진지해진다.
"무학의 기본은 하나다. 내 몸을 완벽하게 써서 상대를 정확하게 가격하는 것. 그 하나에서 뿌리가 뻗어 나가 줄기가 서고, 가지가 펴지는 거지. 나는 사형들이 그 뿌리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뿐이야."
"으음."
"봐."
청명이 비무장을 가리켰다. 조걸이 어느새 나온 종남의 제자와 뒤엉키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하체, 깔끔한 검로, 모든 것을 침착하게 바라볼 수 있는 안력. 그리고 그 무엇보다……."
조걸의 검이 상대의 검을 밀어 내며 일격을 가한다.
"단 한 번의 일격에 전신의 모든 힘을 쥐어짜 낼 수 있는 집중력."
퍼어어억!
청명이 피식 웃는다.
종남의 제자가 바닥에 쓰러지고, 조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앞의 상대를 바라본다. 연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자신이 한 일을 자신도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다.
"지금은 그거면 돼. 그거 하나면 비슷한 나이대의 애들은 다 때려잡는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보통은 반쯤 흘려버리기 마련인 매화단의 효능을 청명이 완벽하게 흡수시켜 줬다는 것. 그리고 청명이 처음 화산에 왔을 때부터 이어진 수련을 통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육체를 만들어 냈다는 것.
육체와 내력에서 뒤지지 않는다면 검술의 숙련에서 승부가 갈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설프게 이것저것을 다 익힌 이들은 한 가지를 죽어라 판 이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조걸이 제자리로 돌아와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이어 다음 삼대제자가 비무장으로 뛰어 올라갔다.
완전히 기세를 탄 모습.
빨리 싸워서 자신의 성취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모습이다.
"나는 그래도 이해가 안 간다. 이게 그리 쉬운 일이라면…… 왜 다른 문파는 그런 수련을 하지 않았다는 거냐?"
"쉬워?"
청명이 삐딱하게 고개를 꺾는다.
"지금까지 수련한 게 쉬웠던 모양이지?"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개념적으로는 쉬우니까……."
"사형."
"응?"
"사형은 하루에 삼분의 이를 공부하고, 남은 시간에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부모를 진심으로 봉양하고, 약자를 기만하지 않으며, 재물을 탐하지 않고, 위로는 예의를 다하되, 아래로는 존중을 잃지 않고, 친우를 진심으로 대하며, 나라에는 충성을 다하면서 살 수 있어?"
"……못 하지."
"왜 못 해? 그것만 지키면 군자가 되는데."
"그야……."
윤종이 입을 다물었다. 청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진정한 군자가 되는 법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 조건을 평생 지키며 진짜 군자로 불리는 이들은 시대를 통틀어 두셋. 이 넓은 중원 땅에서 겨우 그 정도다.
다시 말하자면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이 뻔히 알고 있는 것도 행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낙숫물은 바위도 뚫는다. 언제나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선인들은 끝도 없이 노력과 정진을 강조하지. 이유가 뭔지 알아?"
"글쎄……."
"사람은 그걸 못 하거든."
청명이 피식 웃었다.
사실 과거의 청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그는 기본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고 또 들었음에도, 언제나 더 강한 검술, 더 높은 경지를 갈구했다.
심지어 생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위로만 시선을 줬을 뿐, 아래는 내려다보지 않았다.
죽고 나서야 새삼 알게 된 일.
"죽을 만큼 수련하고, 매번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고, 정진하고 또 정진한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실제로 해내면……."
청명이 턱짓으로 비무장을 가리켰다.
퍼억!
또 하나의 종남의 제자가 휘청이며 뒤로 물러난다. 낭패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퍽 인상적이다. 그리고 화산의 제자는 틈을 주지 않고 그런 종남의 제자를 몰아붙였다.
"저렇게 되지."
"……."
"보통은 알아도 못 해. 사람은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이지 못하니까. 그걸 누가 강제로 시킨다? 삼 일이면 다 드러누워서 못 하겠다고 난장을 부리겠지. 아니면 도망치거나."
윤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그러지 않았던가. 그걸 멱살 잡고 강제로 끌고 온 사람이 바로 청명이다.
"네가……."
"사형들이 한 거야."
청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
"그걸 버텼을 때 이미 승부는 났어. 더 볼 것도 없지. 제 발밑을 보지 못하고 위만 보는 놈들은 발 디딜 곳이 없으니까. 날개가 자라나지 않은 새가 하늘을 날겠답시고 뛰어오르면 그제야 알게 되는 거지."
청명이 실려 나가는 종남의 제자를 보며 혀를 찼다.
"발에 닿는 게 없다는 걸. 그럼 추락하는 거야, 지금처럼."
윤종의 눈이 떨렸다.
수련을 과하게 시킨다는 생각은 했다. 강압적인 수련법에 정말 미친 듯이 욕을 퍼붓고 싶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참았다. 그래도 구르고 구르다 보면 어떻게든 더 강해진다는 생각으로 버텨 냈다. 그런데 그 모든 수련이 이리 멀리까지 내다본 것이었단 말인가?
'이놈은 대체 이런 걸 어디서 배운 거지?'
도무지 청명을 이해할 수 없는 윤종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퍼어어어억!
또 하나의 종남 제자가 바닥에 쓰러진다.
알 수 있다.
그의 사제들은 그리 무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적어도 대표로 나가는 열 명은 윤종과 조걸을 제외하면 다들 대동소이한 실력이었다.
앞선 비무에서 이토록 크게 차이가 났다는 말인즉, 뒤에 이어질 비무의 결과도 달라질 게 없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이긴다고?'
화산의 삼대제자들이 종남에게?
화산이 종남에게?
이제야 실감이 난다.
그들은 지금 종남을 상대로 승리하고 있다. 바로 그 종남을 상대로 말이다.
"우, 우리가 이기는 건가?"
윤종의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부정할 도리는 없지만, 그 사실을 믿는 것도 쉽지 않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화산의 제자로서 종남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굳이 믿을 필요도 없었다.
윤종이 무슨 생각을 하든 비무는 진행되고 있고, 그 결과는 그들의 앞에 현실로 나타났으니까.
한 명.
또 한 명.
"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비무가 끝난다.
순식간에 열 번의 비무가 마무리된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겼다아아아아!"
"전부 이겼어! 빌어먹을!"
"청명아! 우리가 해냈다! 우리가!"
삼대제자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한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이들마저 있었다. 심지어 이대제자들도 그들에게 달려와 사질들을 얼싸안고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축제라도 열린 것 같은 분위기.
십 연승.
삼대제자 모두가 종남의 제자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십 연패 뒤에 이어진 십 연승.
어느 쪽의 기세가 더 좋을지, 어느 쪽이 더 큰 승리감을 얻었는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화산에 삼대제자들은 마침내 종남의 삼대제자들에게 완승을 거두고 만 것이다.
"청명아!"
윤종이 감격에 겨운 얼굴로 청명의 손을 붙잡았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고맙다! 네 덕에……."
윤종이 정말 말하기 싫은, 숨겨 둔 진심을 막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이겨?"
뚱한 목소리와 함께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분위기가 급격하게 식어 간다.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 모인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청명의 고개가 옆으로 삐딱하게 젖혀지는 모습을.
'저 새끼 또 왜 저래?'
'또 시작이네. 또! 내가 진짜 심장이 떨려서!'
모두의 불안한 시선을 받으며 그가 가만히 입을 연다.
"이걸로?"
"……또,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벌써 열 번 졌는데, 이렇게 열 번 이겨 봐야 어차피 무승부 아냐?"
그야 그렇지.
"그래도 그게 어디……."
"사형이 모르는 모양인데."
"응?"
"무승부 그런 건 내 사전에 있을 수가 없어!"
청명이 다시 눈을 희번덕거리기 시작했다.
'아, 제발.'
'분위기 좋을 때는 좀 자중하자. 청명아, 좀!'
"무승부우우우? 종남이랑 무승부우우우? 내가 그런 꼴 당하면 쪽팔려서 평생 얼굴을 못 들고 다닌다!"
그리고 저승에 가서도 죽도록 욕을 퍼먹겠지.
장문사형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가슴에 비수처럼 박히는 말을 빙글빙글 돌려 가며 찔러 댈 테다. 다른 사형제들은 또 어떤가? 그를 묶어서 끌고 다니며 조리돌림 할 게 분명하다.
'내가 그 꼴은 못 보지.'
청명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겨우 무승부로 끝낼 거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생때같은 매화검법을 빼앗긴 것도 아직 덜 갚았는데, 장문인 앞에서 망발을 하고 화산을 무시한 저놈들을 곱게 돌려보내 준다고?
그럼 청명이 아니지.
청명이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야. 아암, 이제 시작이지. 이제! 저것들은 걸어서 못 돌아가. 흐흐흐흐."
광기가 번들거리는 청명의 눈을 보며 삼대제자들이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완전 맛이 갔는데?'
'얘는 전생에 종남파 놈 칼에 찔려 죽었나? 왜 종남만 얽히면 저렇게 눈이 돌아가지?'
'이만큼 하고도 부족하면 대체 무슨 짓을 더 하려고?'
그 순간이었다.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윤종도 덩달아 벌떡 일어섰다.
"야, 야! 얘 막아야……."
"사형!"
윤종이 평소처럼 크게 소리치려던 찰나, 청명이 답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그 기세에 눌린 윤종이 얼떨떨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걸 한 동작도 놓치지 말고 봐. 모두 마찬가지야. 알았어?"
사형제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명이 비무대로 향한다.
모두가 그 등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이제는 수도 없이 보게 될, 화산을 이끄는 자의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