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별것도 아닌 게 깝치고 있어. (2)
차이는 애초부터 인정하고 있었다.
진금룡은 어릴 적부터 기재 중의 기재로 불리던 이였다. 백천이 아는 사람 중 천재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진금룡이었다.
이미 패배도 경험했다.
지난번 화종회에서도, 그리고 그 이전에도 백천은 진금룡을 상대로 승리하지 못했다. 철저한 패배의 쓴맛만을 보았을 뿐.
하나.
'좁혀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토록 노력했으니까.
청명은 그의 노력을 두고 제대로 된 게 아니라고 평했지만, 백천의 나름으로는 정말 뼈를 깎는 고련을 감내했다. 적어도 저 진금룡보다는 두 배 이상 수련을 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기진 못해도 조금이나마 차이를 좁히기는 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상상보다 참담하다.
퍼어어억!
"끅!"
진금룡의 검이 백천의 발목을 후려친다. 휘청이며 넘어질 뻔한 백천이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으며 이를 악 물었다.
진검이었다면 방금 발목이 잘려 나갔다. 진검이 아니라 목검이기에 이 정도로 끝난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진검이 아니기에 그에게는 패배할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왜 닿을 수조차 없는가.'
왜!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퍼어어억!
다시 날아든 진금룡의 검이 백천의 반대쪽 허벅지를 후려쳤다.
거의 뼈가 부러질 정도의 충격.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비명은커녕 신음조차 흘리지 않는다. 되레 목검으로 바닥을 후려치며 그 반동으로 몸을 앞으로 내던진다.
"으아아아아앗!"
그의 검이 진금룡의 머리를 노리고 내리쳐진다. 변화를 배제한 단순한 일격. 하지만 그만큼 빨랐고, 그만큼 날카로웠다.
"느려."
하지만 진금룡은 옆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고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 백천의 회심의 일격을 완벽하게 무위로 돌려 버렸다.
퍼어어억!
진금룡의 검이 백천의 좌측 어깨를 후려친다.
살이 터져 나가며 핏물이 쭉 치솟는다.
"끄윽."
한 번의 공격만 더 하면 비무를 완벽하게 끝낼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진금룡은 마무리를 짓지 않고 뒤로 한발 물러섰다.
그러더니 오만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백천을 내려다보았다.
"끄으으윽."
백천은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어찌어찌 다시 몸을 일으켰다.
"……."
핏발이 선 눈.
고통에 겹지만, 투지만은 잃지 않은 눈으로 진금룡을 노려본다.
"호오?"
진금룡이 놀랍다는 듯 백천을 바라본다.
"서 있기도 힘든 놈이 아직 독기는 살아 있군."
진금룡이 검을 들어 백천을 겨눈다.
"하지만 그뿐이다. 너는 평생이 가도 내 옷자락 하나 벨 수 없다."
"……어째서?"
"정말 이해력이 딸리는 놈이군. 그토록 이야기 해 줬건만."
진금룡이 주변을 쭉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만큼이나 너희 화산과 우리 종남의 차이가 크다는 뜻이지. 화산의 무학 따위로는 종남의 무학을 상대할 수 없다. 백 년! 천 년이 흘러도 마찬가지다!"
너무나도 오만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진금룡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 오만한 소리를 두 귀로 들은 화산의 문도들조차 입술을 질끈 깨물 뿐, 차마 소리쳐 노기를 토해 낼 수 없었다.
현종이 그 광경을 보며 질끈 눈을 감는다.
'대체 어디까지 감내해야 한다는 말인가?'
한 문파의 장문인 앞에서 이제 겨우 이대제자에 불과한 이가 저리 오만한 말을 내뱉는데도, 아무런 단죄조차 할 수 없는 그의 처지를 누가 이해할 텐가?
'선인들이시여.'
제 죄를 용서하소서.
하나, 진금룡의 오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백천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라도 나를 따라잡고 싶다면 당장 화산을 떠나는 게 좋을 것이다. 이곳에는 아무런 미래가 없다. 망한 문파에 남는 것은 조롱뿐이지."
백천이 이를 악물었다.
"나는…… 화산의 제자다."
"훌륭하군. 남자라면 그래야지. 다만……."
진금룡이 검을 들고 백천에게 쇄도한다.
백천이 날아드는 검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지만, 그의 팔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퍼벅! 퍼퍼퍼벅!
커다란 가죽 북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단번에 십여 대를 얻어맞은 백천이 끝내 모로 쓰러진다.
쿠웅.
의식을 잃은 백천을 슬쩍 돌아본 진금룡은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어. 아, 이런. 말하는 게 조금 늦었나?"
비릿한 미소와 함께 진금룡은 가볍게 목검을 회수하였다. 그리고 쓰러진 백천을 타 넘어 자신의 진영으로 향했다.
패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패배였다.
"사형!"
"사수우우욱!"
그제야 정신을 차린 화산의 제자들이 연무장으로 뛰쳐나왔다.
"사, 사숙!"
"함부로 건드리지 마!"
"……."
의식을 잃은 백천을 조심스레 안아 든 백상이 잠깐 침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이내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일갈한다.
"이건 너무 심하지 않소!"
제자리로 돌아가던 진금룡이 고개를 돌려 백상을 바라보았다.
"뭐가 심하다는 거지?"
"이건 비무요! 비무를 하는데 상대를 이토록 상하게 하는 법이 어디 있다는 말이오!"
"비무라……. 그러니 그 정도로 끝난 것 아닌가?"
"……뭐요?"
진금룡이 입가에 비웃음을 담았다.
"내가 진검을 들었다면 지금쯤 그가 어찌 되었을 것 같은가?"
"……."
"비무이기에 목숨이나마 건질 수 있었던 거지. 그렇지 않나?"
"어찌 이리 무도한……."
"그리 화내지 말게."
"……."
진금룡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적잖이 당황했으니 말일세. 설마 그렇게까지 약할 줄 알았나. 조금은 막을 줄 알았지. 그건 내가 사과함세."
백성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완벽한 패배.
그리고 정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조롱.
억장이 무너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다. 할 수만 있다면 저놈을 끌어다 천참만륙을 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지금 백상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형을 의약당으로 모셔라! 지금 당장!"
"예!"
사제들이 백천을 안아 들고 뛰어가자 백상이 목검을 뽑아 들었다.
"어디 그 잘난 종남의 검이라는 걸 나도 한번 견식 해 봅시다!"
"못 할 것도 없겠지. 서한."
"예! 사형!"
"상대해 줘라."
"알겠습니다!"
종서한이 씨익 웃으며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여유롭게 걸어 나오는 그를 보며 백상은 목검을 부러져라 움켜잡았다.
점점 험악해지는 비무장의 분위기와는 달리, 관중들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화기애애했다.
"과연 훌륭합니다."
"백천이라는 자도 생각보다 강했습니다. 하지만 진금룡의 성취는 예상을 뛰어넘는군요."
"과연 섬서제일기재라는 말에 어울리는 자입니다. 그리고 저런 이를 제자로 둔 종남 역시 섬서제일문파에 걸맞은 곳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말입니까. 하하하하."
황문약이 표정을 굳혔다.
'이래서 상인 놈들이란.'
동족혐오라고 해야 할까?
한 사람이 처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업혀 나가는데, 아무도 그런 사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비무라기에는 너무도 과한 손속을 보고도 탓하는 이 하나가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이들은 오로지 진금룡과 종남의 힘을 파악하여 어떻게 돈을 굴려 볼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황문약 역시 저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들에 대한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건 너무 처참한 패배다.'
백천과 진금룡.
화산과 종남을 대표하는 이들이 맞붙었음에도 일방적이다 못해, 당황스러울 정도의 결과가 나왔다.
마지막까지 백천은 진금룡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만약 화종지회가 끝까지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화산은 무슨 수를 써도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니, 몰락이 더욱 가속화될 확률이 높다. 누구도 화산을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황문약이 아무리 돈을 때려 박는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소도장.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자신 있게 사람들을 끌어모아 판을 벌리기에, 응당 비책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의심이 되기 시작한다.
'내가 소도장을 너무 과대평가한 건가?'
황문약의 시선이 청명에게 고정됐다.
"……사숙은 괜찮을까?"
"안 괜찮겠지."
"많이 다쳤을까?"
"많이 다쳤지."
"……."
청명의 심드렁한 반응에 결국 윤종이 살짝 노기가 올라온 얼굴로 일갈한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저분은 네 사숙이다. 사숙이 저리 처참하게 당했는데 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더냐?"
"진정해, 사형."
"이 녀석아!"
"진정하라니까."
가라앉은 청명의 목소리에 윤종이 살짝 눈을 반개했다. 평소 청명의 반응과는 다르다.
"그럼 이기기라도 할 줄 알았어?"
"……."
윤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기길 바란 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체면은 세울 거라 생각했다. 백천은 화산의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기재이니까.
어쩌면 지금 윤종이 이리 흥분하는 것도 백천이 다쳤다는 사실보다 너무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모른다.
'종남과의 격차가 이토록 컸다는 말인가?'
구파일방, 구파일방 하지만, 화산에 제자들은 구파일방을 그리 대단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들 역시 과거에는 구파일방 소속이었으니까.
지금은 몰락했지만, 시운과 노력이 합쳐진다면 언젠가는 그 구파일방과도 자웅을 겨룰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구파일방의 벽은 그들의 생각 이상으로 높고 거대했다.
청명이 피식 웃는다.
"노력한다고 다 될 것 같으면 세상에 고수 아닌 사람 없지. 중요한 건 노력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노력하는가야."
"……."
"봐. 지금부터 잘 봐 둬. 이대제자는 모두 질 테니까."
"전부 다?"
"이길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어. 아니, 한 명은 있는데……. 보아하니 걔는 안 나갈 것 같고."
윤종이 얼굴을 굳혔다.
지난 화종지회에서 이대제자들이 거둔 성적은 2무 8패.
처참한 성적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승부조차 이루지 못한다는 말 아닌가?
"……이렇게 지는구나."
이렇게 처참하게.
하지만 그때 청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종을 바라본다.
"져? 지긴 누가 져?"
"응? 네가 방금……."
"그건 이대제자고!"
"……."
청명이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감히 종남 놈들이 화산에서 이기고 돌아간다고? 누구 맘대로? 내가 두 눈 뜨고 있는 한 그런 꼴은 못 보지!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봐!"
"……."
"그러니까 몸 풀어. 아마도 우리가 좀 더 화려하게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아니, 그……."
그때였다.
"아아아아악!"
황급히 윤종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윽고 그의 눈에 바닥에 무참히 쓰러져 있는 백상의 모습이 들어왔다.
종서한이 쓰러진 백상을 발로 툭툭 걷어찼다.
"아직 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으으……."
"입만 살아 가지고는."
종서한이 백상을 일별하고는 고개를 들어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여봐라는 듯 비소를 지어 보였다.
청명의 입이 열렸다.
"아니, 근데 저 새끼가?"
"잡아!"
삼대제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청명을 잡고 늘어졌다.
그 꼴을 보며 종서한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별꼴을 다 보는구나. 여하튼 알 수 없는 문파라니까."
"오호라?"
청명의 눈이 살짝 뒤집힌다.
"그 주둥아리에 웃음이 언제까지 가는지 한번 보자."
너는 내가 딱 찍어 놨다.
이젠 후회해도 늦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