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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8화 (99/1,567)

98화. 별것도 아닌 게 깝치고 있어. (3)

"……장문인."

현종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멈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각주 현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하지만 현종은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멈추라고?

이걸 무슨 수로 멈추라는 말인가?

이 많은 섬서의 유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는 종남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더 해봐야 애들만 다칠 테니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을 하란 말인가?

그건 화산의 이름에 똥칠을 하는 일이다.

아무리 화산이 몰락했다지만……. 아니, 오히려 몰락했기에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이름과 자존심이다.

화산이라는 이름과, 화산의 문도라는 자존심을 지키지 못한다면 화산은 몰락한 명문이 아니라 그저 그런 삼류 문파로 전락해 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이 화산이 현판을 내리는 순간이다.

현종은 그럴 수 없었다. 스스로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다. 화산이 언젠가는 부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장문인으로서 그 말만은 뱉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처지를 충분히 알고 있을 현상이 저리 말을 할 만큼 상황은 극도로 좋지 못했다.

구 연패.

아홉 명이 연달아 졌다.

이미 역대 화종지회 중 최악의 성적은 달성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승패가 아니라 그 내용이었다.

무려 아홉 명이 승부를 겨루는 동안 상대를 제대로 건드려 본 이가 하나도 없다. 다 큰 어른과 어린아이가 싸우는 게 차라리 이보다 덜 처참할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 광경을 섬서의 유지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다.

'이 치욕을 어찌하란 말인가?'

현종의 눈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오장육부가 모조리 찢어지고, 심장을 손으로 잡아 뜯는 느낌이다.

그를 진정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건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치욕이 아니었다. 제자들이 지금 얼마나 큰 절망 속에 빠져 있을지 짐작이 가서였다.

상대의 힘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여 아이들을 사지로 밀어 넣었다. 이런 무능한 장문인 때문에 저 아이들이 겪을 심적 고통을 생각하니 날카로운 칼로 자신을 난도질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장문인……."

현종이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 이내 깊은 침음을 흘린다.

"……기호지세니라."

"하나……."

"나라고 속이 타지 않겠느냐?"

그 순간이었다.

"커헉!"

연무장 위에서 승부를 겨루던 마지막 이대제자가 검을 놓치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검수가 검을 놓쳤다는 건 어찌 보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다. 끝까지 교묘하게 손목만을 노려 끝끝내 이 결과를 만들어 낸 종남의 제자가 휘파람을 분다.

"검수가 검을 놓치다니, 말이 안 나오는군. 화산은 그런 것도 가르치지 않는 건가?"

조롱.

저 조롱이 이미 합의된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거꾸로 솟는 피를 어찌할 수가 없다.

십 연패.

이 이상 처참할 수 없는 결과다. 화산 장로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진다.

'정말 이렇게까지 벌어졌다는 건가?'

이제야 다시 화산을 일으킬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최근 들어 워낙 좋은 일들만 벌어졌으니까.

하지만 꿈속에 빠져 있던 이들 모두가 지금 이 순간 차가운 현실을 대면하고 있다. 결국 화산은 무파. 무학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그 어떤 호사도 의미가 없다.

이곳의 모두가 지금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수고했다."

"예, 장로님!"

사마승이 자리로 돌아온 악호(岳浩)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더없이 흡족한 결과다.

모두가 승리한 것은 물론이고, 비무의 내용 역시 몹시도 일방적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고무적인 것은 이 승부의 내용을 섬서의 유지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화산의 명성은 땅에 떨어져 두 번 다시 울려 퍼지지 않을 것이다.'

선대에서부터 수도 없이 바랐던 상황이 아닌가? 그 숙원을 다름 아닌 사마승의 손으로 풀게 되었다는 것이 기껍기 짝이 없다.

사마승이 슬쩍 귀를 기울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지켜보던 이들도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너무 일방적이군요."

"그래도 화산이라 기대를 좀 했건만…….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인 모양입니다. 화산은 이제 예전의 화산이라 할 수 없어요."

"알고 있던 사실 아니었습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처참하리라고는……. 사실 이제 저는 종남이 강한 건지 화산이 약한 건지 구분이 잘 가지 않습니다."

"둘 다가 아니겠습니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에요. 이제 화산은 정말 끝이 났나 봅니다. 이리 허망해서야…."

사마승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음 지었다.

여론은 완전히 종남 쪽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오늘 그의 목적은 종남의 위상을 드높이는 게 아니다. 바로 화산을 나락으로 떨어뜨려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싹마저 자라지 않게 불태워 버릴 필요가 있다.

"자, 이제는 마무리를 지을 시간이로군. 사숙들이 하는 것을 잘 보았느냐?"

"예, 장로님!"

종남의 삼대제자들이 결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주저하지 마라."

사마승이 눈을 빛냈다.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 인정사정 봐주지 마라. 저놈들이 다시는 무학을 익힐 생각도 들지 않게 박살을 내 버려야 한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사마승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나도 맑은 날이로군.'

그리고 너무나도 기분이 좋은 날이다.

"……."

윤종은 할 말을 잃었다.

옆쪽에 모여 있는 이대제자들을 차마 돌아볼 수가 없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이 지금 어떤 표정인지. 그리고 저들이 얼마나 큰 절망에 빠져 있을지.

그리고 그건 삼대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종남과의 차이가 이토록 컸다는 말인가?'

지금까지의 화종지회는 나름 어우러지는 맛이 있었다. 패배라는 것은 동일했지만, 지금처럼 사람이 개미를 눌러 죽이듯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그제야 윤종은 종남이 단 한 번도 화산을 진심으로 상대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차롄가?"

"……."

삼대제자들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들이 청명으로부터 수련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너무나도 큰 격차는 수련으로 얻은 자신감마저 앗아가 버린다.

아니, 근데 다 떠나서 지금 어…….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고…….

윤종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옆에 앉은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헉, 하며 숨을 죽였다.

으드드득!

이를 갈아 붙이는 소리가 윤종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든다.

청명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

사숙들이 한 명 한 명 패배할 때마다 얼굴이 조금씩 붉어진다 싶더니 이제는 숫제 만개한 매화처럼 붉게 물들어 버렸다.

그 얼굴을 본 윤종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청명의 옷자락을 잡았다.

'이 새끼 곧 터진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고, 청명 옆에서 삼 개월이면 눈치 보는 데는 도사가 되는 법이다!

윤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처, 청명아 일단 진정해라."

"……진정?"

그 삐딱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윤종은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내려놓……. 아니, 내려놓으면 안 되지! 지금 화종지회잖아! 장문인뿐만 아니라 종남과 섬서의 사람들이 다 보고 있단 말이다!

이놈이 여기서 발작해 버리면 어쩌면 이대제자가 모두 패한 것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윤종이 미친개를 달래는 심정으로 청명을 어르기 시작했다.

"처, 청명아. 잘 생각해 봐라. 네가 어제 그랬잖아. 사람이 거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내심이 중요하다고!"

"……인내심."

"그래! 인내심!"

"……사형."

"그래, 청명아. 네 말을 잘 기억하……."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응?"

청명의 고개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윤종 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윤종은 보았다.

청명의 눈이 반쯤 돌아 버린 것을.

"……나는."

청명이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몸을 일으킨다.

"원래 인내심이란 게 없어!"

자랑이다.

이 새끼야.

운암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창백할 수 없을 만큼 질려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이곳에서 내려가 버리고 싶다. 그러나 장문인의 지시가 떨어지지 않은 이상, 그는 이 화종지회를 계속 진행해야 한다.

"다음은…… 삼대제자의 비무를 거행하겠습니다. 각 삼대제자 중……."

그때였다.

"잡아! 그 새끼 절대 놓지 마!"

"청명아, 너 마지막에 나가기로 했었잖아! 이러면 곤란하다!"

"사람들이 본다고, 사람들이! 제발 우리끼리 있을 때만 하자!"

운암이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삼대제자들을 돌아보았다.

다닥다닥 뭉쳐 뭔가를 막으려는 삼대제자들 사이로 누군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걸어 나오려 한다.

'청명?'

저 아이가 왜?

의문은 넘쳐났지만, 일단 하던 말은 마저 해야 한다. 여기에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

"선봉은……."

"크아아아앗!"

하지만 운암의 말은 계속 이어질 수 없었다.

선봉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청명이 자신을 어떻게든 붙잡고 있던 사형제들을 뒤로 날려 버리고는 연무장 위로 쏜살같이 뛰어오른다.

"후우우욱!"

연무장에 오른 청명이 깊이 숨을 고른다. 그러더니 번들거리는 눈으로 종남을 노려보며 말한다.

"한 놈 빨리!"

"……."

"누구든 좋으니까. 한 놈 빨리 올라와. 다 뒈지기 전에."

사마승이 입을 딱 벌렸다.

"……저, 저 미친놈이!"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까지 미친놈일 줄이야. 종남뿐 아니라 섬서의 유지들이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 저토록 방자한 언행이라니!

"진정하십시오, 장로님."

진금룡이 재빨리 사마승의 발작을 막았다.

"망둥이가 뛴다고 같이 뛰어 놀 수는 없잖습니까. 곧 저놈도 제 주제를 알게 될 겁니다."

"으으음!"

그러나 여전히 언짢은 기색을 못 숨기고 크게 헛기침하는 사마승을 보며, 진금룡이 낮게 일갈한다.

"우량."

"예, 사숙!"

청명을 상대하기로 되어 있던 선우량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과 다르게 선봉으로 나왔지만, 달라질 건 없다. 저놈에게 제 주제를 알려 주어라!"

"예, 사숙! 걱정 마십시오!"

선우량이 목검을 움켜쥐고 몸을 날려 비무장에 올라섰다.

그리고 손에 쥔 검으로 청명을 겨누었다.

"그 방자한 주둥아리를 뭉개 주마. 나는 종남의……."

그 순간 청명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지더니 선우량의 코앞에 나타났다.

"선……."

선우량은 보았다.

그의 앞에 분노한 아수라 같은 얼굴이 불쑥 나타나는 것을. 그리고 그 모습이 갑자기 깜깜한 어둠으로 뒤덮이는 것도 말이다.

어둠?

대낮에 왜 어둠…….

아! 이게 어두운 게 아니라 가려진 거구나. 이게 눈앞에, 그러니까 이거…….

주먹?

그리고 그 순간.

화산의 문도들은 화산에 입문한 이래,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거대한 소리가 화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것을 듣고야 말았다.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회전한다.

선우량의 몸이 허공에서 십여 차례 이상 뱅글뱅글 회전하더니 바닥에 철퍼덕하고 엎어졌다.

"……."

바닥에 처박힌 선우량의 몸이 학질이라도 걸린 듯 파들파들 애처롭게 경련한다.

쓰러진 선우량을 본 청명이 이죽거리듯 말한다.

"별것도 아닌 게 깝치고 있어."

뒈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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