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별것도 아닌 게 깝치고 있어. (1)
"무척 기대가 되는군요."
"하하하. 황 대인 덕분에 이런 것을 다 보는군요. 감사드립니다."
좌우에서 쏟아지는 찬사에 황문약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가 되레 초대에 응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려야지요.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와 주셨잖습니까?"
"하하하. 이런 진귀한 볼거리를 놓칠 수는 없지요."
이리저리 덕담이 오고 간다. 하지만 황문약은 그 와중에도 중인들이 비무에 나설 이들을 세세히 뜯어보고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이 단순히 볼거리를 찾아 이 먼 길을 왔을 리가 없다.
이들의 관심사는 두 문파의 자라날 후세대. 그중에서도 종남의 후기지수들이다.
상계와 강호는 먼 듯하지만 가깝다. 상행을 나서고 내내 무뢰배들에 맞서야 하는 상계는 강호의 정세에 언제나 민감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강한 문파는 그 자체만으로 투자의 대상이 된다.
결국 힘이란 돈을 끌어모으는 법이니까.
이들은 오늘 이 화종지회를 통해 종남의 후기지수들을 평가해 미래의 종남을 가늠하려 하는 것이다.
"종남과 화산의 비무라. 상대가 조금 아쉽긴 하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가까운 곳이라면 공동이나 무당도 있을 텐데. 상대가 화산이어서야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세인들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게 객관적인 평가겠지.'
황문약 역시 이들의 평가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백 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화산은 종남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드높은 구파일방 중 한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종남과 구파에서 퇴출되다 못해 거의 망하기 직전까지 몰려 버린 화산을 비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황문약의 시선이 건너편에 모여 있는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청명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자 황문약이 눈을 살짝 찌푸린다.
'질 내기를 할 사람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뭔가 묘책이 있단 말이렷다?
황문약이 미소를 지었다.
'선점한 곳에 다른 이들이 달려드는 건 그리 달갑지 않지만, 회수를 위해서는 화산의 명성이 퍼질 필요가 있겠지. 그러니 이번에는 두말없이 협조해 준 것이오, 소도장.'
황문약의 마음이 기대로 부풀기 시작했다.
과연 오늘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기대로 말이다.
연무장 한가운데에 선 운암이 양쪽에 서로 대치하고 선 화산과 종남의 제자들에게 신호를 보내고는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관중이 생겨 버려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그동안 꾸준히 이어 오던 화종지회다 보니 이끌어 나가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먼저, 각 파 이대제자들의 대표들이 일 대 일로 비무를 하겠습니다. 이대제자 중 열 명의 대표가 모두 열 번의 비무를 치르게 됩니다."
운암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선봉!"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측에서 한 사람씩 자리에서 일어난다.
진금룡과 백천.
각각 사문의 이대제자 중 수좌인 이들이었다.
"사형!"
"사형. 건승하십시오!"
"이기셔야 합니다!"
사제들의 응원을 들으며 백천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말해 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사제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연무장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건너편에서는 진금룡이 무척 여유로운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연무장의 한가운데에서 서로 마주 섰다.
"과연."
은하상단과 함께 섬서십대상단으로 불리는 대붕(大鵬)상단의 상단주 위자개(魏自開)가 진금룡을 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진금룡이 종남의 전성기를 열 인재라 하더니, 과연 그 풍모가 대단합니다."
"그야말로 청년 영웅의 모습입니다."
새하얀 백의 무복을 입고 목검을 한 손에 쥔 진금룡의 모습은 확실히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풍모만 본다면 건너편의 저자도 훌륭하지 않습니까?"
"이리 보니 둘이 닮은 것도 같습니다그려. 흑과 백이라. 그림이 되는군요."
검은 무복을 입은 백천 역시 진금룡의 모습에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확실히 기대감이 올라가는 모습입니다만, 화산의 제자가 과연 진금룡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지요. 사실 화산이 워낙 크게 휘청였던 건 사실이지만, 최근의 화산은 또 다를 수 있으니까요. 썩어도 준치라고, 과거의 화산을 생각한다면 혹여 이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그 누구도 백천이 진금룡을 이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화산은 과거의 화산이 아니다. 그건 이곳에 있는 이들이 오래전에 화산과의 거래를 끊었다는 사실이 증명하지 않는가? 혹여나 화산이 다시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 끈을 완전히 끊어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이 기대하는 것은 종남이 얼마나 강한 모습을 보여 주느냐 뿐이었다.
옆쪽에서 들리는 대화를 엿듣던 사마승이 살짝 얼굴을 굳힌다. 예의상 하는 소린 줄은 알지만, 그래도 저런 말은 영 기분을 더럽게 만든다.
'보여 주어라. 금룡아.'
이제 화산이 종남과는 감히 이름조차 나란히 거론될 처지가 아니라는 현실을.
그리고 현종 역시 입술을 꾹 닫고 백천을 바라보았다.
'네 모든 것을 펼쳐 보이거라.'
후회가 없도록.
모두의 기대와 우려가 집중된 가운데, 마주 선 진금룡과 백천이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진금룡 쪽이다.
"잘도 도망가지 않고 나왔구나."
백천이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화산의 대제자다. 내가 종남 따위에 도망칠 리가 없지."
"입은 살았구나."
진금룡이 가만히 검을 들어 백천을 겨누었다.
"개는 원래 잘 짓는 법이지."
"그 개에게 물려 볼 테냐?"
"내가 실수를 했군. 너는 심지어 개조차 되지 못한다."
"이……."
"어디 한번 덤벼 보아라. 어제 말한 대로 내가 친히 알려 주지. 네가 얼마나 하찮은 놈인지."
백천은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현종이 앉아 있을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장문인이 보고 계신다.'
개인적인 원한이나 사심 같은 것은 지금은 접어 둘 때다.
'나는 화산의 이대제자 백천이다.'
백천이 단호한 눈으로 진금룡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역시 목검을 들어 그를 겨눴다.
모두가 긴장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쪽은 화산의 대표하는 이. 그리고 상대 역시 종남을 대표하는 이다. 원래라면 가장 마지막에 맞붙어야 할 두 사람이 화종지회의 전통에 따라 가장 먼저 맞붙는다.
어찌 보면 이 승부로 화종지회의 결과가 거의 나와 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찌 관심이 가지 않겠는가?
막 누군가 입을 열려는 순간 백천이 움직였다.
파아앗!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린다.
가공할 속도로 앞으로 치고 나간 백천이 아무런 변화를 담지 않은 검으로 진금룡의 목을 일직선으로 찔러 들어간다.
스슷.
진금룡이 날아드는 검에 맞서지 않고 옆으로 비켜나듯 검을 피해 낸다.
쇄애애액!
백천의 검이 재빠르게 진금룡을 쫓았다. 손목이 살짝 흔들린다 싶더니 이내 검 끝이 수십 개로 불어났다.
화산 특유의 화려한 변초(變招)가 가미된 검이 연무장을 뒤덮는다.
"오오."
"굉장하군!"
"화산의 아이도 실력이 굉장한 듯합니다."
지켜보는 이들도 절로 감탄을 할 수밖에 없는 화려한 초식이었다.
비록 진검이 아닌 목검으로 펼쳐지는 검초지만, 그 예리함은 진검 못지않았다. 천하의 진금룡도 이 화려한 초식 앞에서는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는지 연신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화산의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며 불끈 주먹을 쥔다.
조걸이 흥분한 듯 소리쳤다.
"역시 백천 사숙이야! 사숙의 복호청양검(伏虎靑陽劍)은 그야말로 일절이라 부를 만하지!"
화산의 제자들이 저마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들은 안다.
백천이 그동안 얼마나 뼈를 깎는 수련을 해 왔는지 말이다. 지난 화종지회에서 굴욕을 당한 이후로 백천은 침식을 잊고 수련에 전념해 왔다.
폐관을 자청한 것도 백천이었다. 화산에서 가장 즐겁고 화려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스스로 사람과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검만을 돌아보겠다고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그런 이를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몰아붙인다.
백천의 검영(劍影)이 화려하고 날카롭게 진금룡을 몰아세웠다. 저 하나하나의 검영이 모두 날카로운 예기를 담고 있다. 실초와 허초가 뒤섞여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짠지 구분해 낼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 모습을 본 현종이 주먹을 꽉 움켜잡는다.
'저 아이가 언제 저 경지까지!'
저 정도라면 운자 배와 견주어도 그리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재능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저 정도일 줄이야!
백천의 선전을 지켜보는 모든 화산문도의 눈이 희망으로 물들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번은 다를지도 모른다.
윤종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청명아! 사숙이 몰아붙이고 있어!"
"그래."
"어쩌면 이길지도 모르겠다!"
"설마."
"응?"
윤종이 청명을 돌아보았다. 의자에 등을 기댄 청명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한다.
"뭘 때려야 이기든 말든 하지. 한 대 스치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승기를……."
"사형은 저게 승기를 잡은 사람의 얼굴로 보여?"
"응?"
윤종이 고개를 돌려 다시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백천의 얼굴은 힘겨움에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왜!'
백천은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발이 강렬하게 진각을 밟는다. 단단히 고정한 하체를 중심으로 끌어올려진 기운이 손끝으로 밀려들어 간다. 이윽고 검에 기운을 담아 있는 힘을 다해 휘두른다.
가볍게, 또 가볍게.
마치 나비가 날아들 듯 가볍지만 날카롭게!
하지만 그 가볍고도 날카로운 검은 진금룡의 몸에 결코 닿지 못했다.
'왜 스치지도 못하는 거냐? 왜!'
아득하다.
눈앞에 선 상대가 너무 아득하다. 마치 하늘 높이 치솟은, 깎아지른 절벽을 보는 것 같다.
감히 오를 엄두도, 넘을 엄두도 나지 않는 절벽.
이미 흠뻑 젖어 버린 백천은 눈으로 스며드는 땀을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
필사의 일격!
동시에 십이방(十二方)을 점한 백천의 검이 진금룡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카앙!
처음으로 휘둘러진 진금룡의 검이 날아드는 백천의 검을 튕겨 낸다.
검이 멈추자 연무장을 뒤덮던 검영도 사라졌다. 그제야 백천은 진금룡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미 흠뻑 젖어 버린 그와는 달리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진금룡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본다.
"충분히 즐겼겠지?"
"……너."
"멍청한 놈. 화산의 무학 따윌 아무리 익힌다고 한들 내 털 끝 하나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진금룡의 검이 빛살처럼 백천을 찔러 간다.
푸욱!
어깻죽지를 찔린 백천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군다.
"끄으……."
그는 신음을 토하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자 여유롭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오는 진금룡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몸으로 충분히 깨달아라. 네가 얼마나 멍청한지 말이다."
진금룡의 검이 사정없이 백천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