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상이몽 (4) >
1942년 1월 17일
소련 모스크바 외곽
스탈린은 약속대로 나와 구데리안이 말한, 붉은 군대의 장비들을 보여주었다.
소련군이 운용 중인 거의 모든 화포와 전차, 항공기들이 도열되어 있었다.
한 대씩만 가져다놨을텐데도 수량이 워낙 많아 줄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히야, 어마어마하군.”
“과연 대국다운 스케일입니다.”
“허허허.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십니까들.”
스탈린은 나와 구데리안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맨 앞줄은 탱켓과 장갑차, 경전차들이, 뒷줄에는 중형전차와 중전차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전차 반대편에는 각종 야포와 대전차포가 전차들을 마주 보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우리, 특히 구데리안은 눈을 빛내며 러시아인들이 독일 사절단을 위해 준비한 장비들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잠재적 적국의 장비를 눈앞에서 볼 기회는 흔치 않으니 말이다.
“이게 T-34로군요.”
T-50 경전차 다음이 그 유명한 T-34 중형전차였다.
“생긴 게 꼭 판터를 닮았는데요. 멀리서 보면 판터와 구분이 어렵겠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헤스의 말에 구데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도 판터는 T-34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물건이라, 외형이 서로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판터를 처음 본 소련군들은 독일군이 T-34를 노획해서 사용하는 줄 알았다지.
소련군이 전시한 T-34의 수량은 2대로, 따로 설명은 없었지만 나는 그것들이 각각 1940년형과 1941년형임을 알 수 있었다.
T-34 1941년형은 1940년형보다 주포가 조금 더 길고, 포방패의 모양도 달랐기 때문이다. 대신 관측창은 똑같군.
“어? 이거는....”
“이것도 T-34인가요? 생긴 조금 다른데....”
“이 전차의 이름은 T-43이라고 합니다. 모든 면에서 T-34보다 우수한 중형전차지요.”
나와 구데리안의 대화에 끼어든 쿨리크가 자랑스레 떠벌였다.
미키마우스를 닮은 포탑 때문에 T-34 1942년형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전차였다.
크기는 T-34와 비슷한데, 보기륜과 차체 측면의 형상이 완전히 달랐다.
포탑도 잘 보니 큐폴라가 달려 있는 게 실제 역사의 T-34/76 1943년형의 그것이었다.
다포탑 전차인 T-28과 T-35는 T-34보다 크고 요란하게 생겼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쓰레기라는 소리를 들은 물건이라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없었다.
구데리안도 같은 생각인지 대충 훑어보기만 하고 다음 전차로 넘어갔다.
보로실로프의 이름을 딴 KV 전차의 종류는 4대였다. KV-1 1941형과 여기에 증가장갑을 추가한 버전인 KV-1E, 152mm 곡사포를 탑재한 KV-2, 마지막으로 107mm 전차포를 탑재한 KV-3.
독일 협상단은 우선 KV-2의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포탑에 한번 놀라고, 육중한 주포에 두 번 놀랐다.
포탑의 크기가 차체의 반보다 큰 전차라니. 이건 듣도 보도 못했는데. 구데리안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왜 독일군이 이놈에게 거인을 뜻하는 기간트(Gigant)라는 별칭을 붙여줬는지 알만했다.
이건 커도 너무 크지 않나? 대체 이놈을 만든 개발자들은 뭔 생각으로 이놈을 설계했는지 모르겠다.
저렇게 커서야 위장은 꿈도 못 꾸겠군.
“어떻습니까, 저희 소비에트 연방의 전차들을 직접 보신 감상이?”
우리가 오랫동안 KV-2를 바라보고 있자 스탈린이 은근슬쩍 옆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나는 솔직한 감상을 말하고픈 욕망을 억누르고, 스탈린이 좋아할 만한 대답을 꺼냈다.
“이거야말로 러시아다운 전차 같군요. 이토록 강렬한 인상의 전차는 처음입니다. 특히 저 주포, 저렇게 큰 포에서 발사한 포탄에 맞으면 우리 독일의 티거도 한방에 유폭을 일으키겠군요. 우리 과학자들은 왜 이런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거이거, 엄청난 칭찬이시군요.”
사실 우리 독일에도 이놈과 비슷한 물건이 하나 있다.
실제 역사에선 슈투파라고 불렸던 브룸베어가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덩치만 큰 허당에 가까웠던 KV-2와 다르게 브룸베어는 종전까지 전선 곳곳에서 큰 활약을 했다.
포탑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워 차체에 균열이 생길 정도로 무리를 준 반면에 브룸베어는 주포가 차체에 고정되어 억지로 무거운 포탑을 돌릴 필요 없이 차체를 돌려 조준만 하면 되는 데다 무게는 KV-2보다 덜 나가면서 정작 방호력은 브룸베어가 월등히 좋았다.
하지만 이걸 스탈린에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KV-3는 KV-2만큼은 아니지만, 이놈도 상당한 크기의 포탑을 자랑했다.
특히 탑재된 107mm 주포는 KV-2의 152mm 전차포보다도 더 쓸모 있어 보였다.
장포신이라 사거리도 더 길 테고, 조준도 더 정확할뿐더러 연사력도 상대적으로 더 좋다.
“여기 이 전차가 소련에서 가장 강력한 전차일 겁니다.”
“오호라....”
보로실로프의 말에 구데리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척 보기에도 티거보다 큰 전차이니, 구데리안은 이놈을 상당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나 역시. 자세한 스펙은 모르지만, KV-1이나 KV-2보다 훨씬 강력한 전차임은 틀림없었다.
실제 역사에서 KV-3는 독소전쟁의 갑작스러운 발발로 프로토타입 몇 대를 끝으로 양산이 취소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독소전쟁이 발발하지 않았으니, 이놈의 양산은 순조로울 터.
역사에는 등장하지 못한 무기들이 섞여 있는 전차와 다르게, 화포는 평범했다.
45mm 경대전차포하며 각종 무식하게 생긴 중곡사포들.
항공기도 화포와 다르지 않았다. 짜리몽땅한 I-16부터 Yak-1, Yak-7, MiG-1, MiG-3 등등.
“다 아는 기체들이구먼.”
T-43과 KV-3이 섞여 있던 것처럼 생각지도 못한 놈이 섞여 있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처음 보거나 이 시기에 없는 놈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단, 완전히 안심할 수도 없는 게 스탈린이 일부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T-43과 KV-3까지 보여준 것을 보니, 딱히 숨기는 것 같지도 않은데.... 애매하군.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전쟁 말기까지 숫자에선 밀려도, 질적으로는 소련기들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평가 받는 독일기들이니까. 해군도 마찬가지.
문제는 전차다. 독일로 돌아가면 구데리안과 자세한 얘기를 나눠야겠군.
***
세르게이 코틀초프 소령은 세 번째 마호르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임무는 독일 사절단의 숙소 곳곳에 설치한 도청기를 통해 독일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도청하여 그중에서 쓸만한 정보들을 추려내는 것이었다.
머리에 헤드폰을 쓴 NKVD 요원 30명이 의자에 앉아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정해진 교대시간 외에는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급한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갈 때조차 코틀초프 소령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대비한 예비 인원들이 있지만, 요원들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손을 들고 허가를 구하는 것보다 교대시간까지 용변을 참는 것을 선택했다.
잘못해서 상관에게 무능력자로 인식되면 그 후의 생활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도청한 대화 중에 건질 만한 것들은 딱히 없었다.
그래서 코틀초프는 초조했다. 독일 협상단이 독일로 떠나는 그 날까지 수확이 없으면, 그는 틀림없이 굴라그로 보내질 것이다.
운이 나쁘면 총살형이겠지. 지금까지 코틀초프의 동기들도 비슷한 이유로 처형당하거나, 굴라그로 쫓겨났다.
이유는 무능력. 무능력은 소련 사회에서 근친상간과 동성애와 맞먹는 크나큰 죄였다.
국가는 결코 중범죄를 저지른 반동분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코틀초프는 밤에 잠을 자다가 침대에서 알몸으로 끌려 나와 두들겨 맞거나, 한겨울에 장갑 없는 맨손으로 통나무를 나르는 일을 하기 싫었다.
그는 지금의 안락한 생활이 좋았고, 오래도록 그것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성과를 내야 하는데.....
‘빌어먹을. 하나라도 좋으니 뭐라도 좀 나오면 좋으려만.’
코틀초프는 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새 담배를 꺼내기 위해 담뱃갑에 손을 뻗었다.
이때 12번째 의자에 앉아있던 요원 한 명이 잽싸게 종이에 뭔가를 끄적이곤 손을 들었다.
“소령 동지!”
화장실에 가기 위해 허락을 구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코틀초프는 담뱃갑을 내버려 두고 손을 든 요원에게로 달려갔다.
“뭐 하나 건졌나?”
“예. 직접 들어보십쇼.”
코틀초프는 예비용 헤드폰을 썼다.
요원이 듣는 것과 같은 대화가 헤드폰에서 흘러나와 코틀초프의 귀로 흘렀다.
-....니까 무슨 여자?
-금발에 뺨에 점 있는 여자. 너도 봤잖아.
-그러니까 그 여자가 SD에서 심어놓은 스파이라고?
-그래.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당연히 내가 SD에 있었으니까 알지. 그 여자와도 몇 번인가 마주친 적이 있거든. 대화는 나눠본 적 없지만. 여자도 날 아는지 나를 보고 놀라더라고. 아무 얘기도 안 했지만.
-러시아인들이 알면 깜짝 놀라겠군. 기껏해야 NKVD 정도만 생각하겠지, SD 요원이 자기들 사이에 섞여 있으리라고 누가 알겠어?
이어지는 웃음소리.
코틀초프는 쾌재를 불렀다.
숙소의 독일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는 모두 녹음되고 있으니, 증거는 이미 확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코틀초프는 헤드폰을 벗으며 독일인들의 대화를 캐치 해낸 요원의 등을 두들겼다.
“잘했어, 동무. 계속하도록.”
자리로 돌아간 그는 메모지에 자신이 직접 들은 정보를 간략하게 썼다.
그리고 부관을 불러 제7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
“이번 판도 제가 이겼습니다.”
“에잉.... 계속 내가 지는구만. 원수,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총통을 상대로 이상한 장난은 치지 않으리라 믿소.”
“제가 미쳤다고 감히 총통께 장난질을 치겠습니까. 아무튼, 계속하시겠습니까?”
“포커는 그만하고, 젠가나 하지.”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상당한 재미를 보장하는 게임으로 알려진 젠가는 원래 1983년 영국에서 레슬리 스콧 여사가 만든 게임이다.
일정한 크기의 나무 블록을 쌓아서 만든 탑을, 역으로 블록 하나씩 빼내며 마지막에 탑을 무너뜨린 사람이 지는, 엄청나게 단순하면서도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게임.
역사대로 젠가가 세상에 나오려면 41년은 더 기다려야 하지만, 내가 가진 미래의 지식 덕분에 젠가는 훨씬 일찍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스콧 여사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니 뭐 괜찮겠지.
1941년에 나온 젠가는 미니어처 세트와 더불어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며 유럽 각지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여기에도 샤흐트가 고안한 가챠 시스템을 적용해 내 친필사인을 동봉시켜 팔자 판매량이 더욱 늘었다.
처음 젠가를 선보였을 때 나를 바라보는 표정들이란.
이 간단한 걸 어째서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생각해내지 못했지? 라고 묻는 듯한 측근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자랑은 여기까지 하고, 슬슬 연극을 할 차례군.
“구데리안 원수. 소련인들의 전차를 본 감상은 어떻소?”
“경전차들은 그다지 새롭지 않지만, 중형전차와 중전차들은 확실히 느낌이 달랐습니다.”
“나도 그렇소. 개인적으로 가장 위협이라 느꼈던 건 KV-2와 KV-3이었소. 그 두 전차는 판터, 티거와 최소한 동등한 수준으로 보이던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총통 각하. 지금 개발 중인 신형 중전차라면, 충분히 소련의 중전차를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아, 그래. 그게 있었지. 자그마치 15cm 포탄을 정면에서 방호해냈다고 하니 기대가 크오.”
“맞습니다. 그 전차가 실전에 배치되면, 어떤 전차도 상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구데리안이 나무 블록을 잘못 빼내는 바람에 탑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드디어 내가 이겼군.”
“방금 건 대화하느라 실수한 겁니다. 다시 하시죠.”
***
소련에 머무는 나흘 동안, 우리는 우리를 도청하는 소련인들에게 열심히 역정보를 뿌렸다.
그렇다고 너무 티가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소련인들이 역정보임을 깨달으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수포가 되고 말 테니.
그리고 도청을 통해 얻어낸 정보들이 스탈린에게 닿으려면, 그전에 베리야를 먼저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도청기록 중에 사실은 베리야가 독일 스파이라는 말이 섞여 있다.
스탈린에게 보고가 되지 않을뿐더러 역으로 베리야가 우리의 계략을 간파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최대한 그럴듯하면서도, 적당한 선의 사실을 지어내는 게 중요했다.
“전에 하이드리히가 내게 말하더군. 소련의 주코프를 매수해서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어떻겠느냐고.
내가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는데 하이드리히는 무척이나 자신 있어 하는 눈치였소.”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이드리히 말로는 모스크바에 잠입한 SD 요원이 주코프의 친척과 만나는 것까지 성공했다는데, 그 뒤부터는 연락이 끊겼다는군.”
“해군장관 쿠즈네초프와 공군의 노비코프에게도 접촉을 시도했는데, 이 둘에게선 조금 성과가 있다고 했소. 둘 다 스탈린 욕을 하면서, 소련에 정치적 위기 상황이 발생할 경우, 독일이 자신을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던데.”
“투하체프스키가 처형당했을 때는 모든 게 끝장났다 싶었지. 그자가 독일과 내통하고 있다는 걸 소련이 알았으니, 이제 소련에 깔아둔 정보망이 붕괴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여겼소. 그런데 투하체프스키만 처형당하고 그걸로 끝났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베리야가 우리가 말한 정보들을 듣고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가뜩이나 군부를 휘어잡아 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두길 원했던 놈인데, 지금쯤 드디어 군부를 박살 낼 절호의 기회가 왔다며 기뻐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느새 시간이 흘러 1월 20일, 소련 방문 마지막 날이 되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분위기는 제법 좋았다.
스탈린은 독일로 떠나는 우리를 위해 고별 만찬을 열었고, 그 자리에서 내게 특별한 선물을 건넸다.
“받으시지요, 총통. 제 작은 성의입니다.”
“이게 뭡니까?”
“상자를 열면 알게 되실 겁니다.”
“오, 이건....!”
상자 안에 든 물건은 권총이었다. 그것도 금으로 도금된 마우저 C96.
특이하게도 총열과 그립을 줄인 소련제 마우저 C96인 ‘볼로 마우저’가 아닌 원본 마우저 C96으로 상아로 된 그립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약자인 ‘A.H’가 새겨져 있었다.
“선물이 마음에 드실런가 모르겠습니다.”
“아주, 아주 마음에 듭니다.”
“다행이군요. 선물이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노심초사했습니다, 하하하!”
스탈린이 말하길, 내게 선물한 마우저는 로마노프 왕가가 사용하던 물건이라고 한다.
그립에 새긴 이니셜만 빼면, 거의 손대지 않았다고.
“벌써 돌아가실 때가 되어 무척 아쉽습니다. 올해가 끝나기 전에도 모스크바에 오셨으면 합니다.”
“아이쿠, 물론이지요. 스탈린 서기장도 베를린에 와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저희만 대접받을 수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베를린이라.... 좋습니다. 언젠가 제가 베를린으로 가지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자, 건배!”
“건배!”
두 개의 투명한 크리스털 잔이 부딪치자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소련에서의 마지막 파티는 첫 연회보다 훨씬 화려하고 장엄했다.
파티 도중에 스탈린은 내게 은밀히 다가와 속삭이듯이 말했다.
“독일로 돌아가시면 첫날에 제가 권했던 제안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요.”
또 이러네 진짜. 이러려고 선물까지 준 건가 싶었지만, 선물까지 받고 몇 시간 뒤면 독일로 떠나는 마당에 굳이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서기장. 장군들과 얘기를 한 번 나눠보도록 하지요.”
“총통께서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길 기대하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와인을 마시면서도 그럴 일은 절대로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