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힌덴부르크와의 만남 이후로,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신문에도 나오고 그 유명한 힌덴부르크에게서 직접 훈장까지 수여받은 전쟁영웅이다 보니 병원의 모두가 나를 특별대접 했다.
위생병과 간호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군의관들까지.
확실히 훈장의 위력은 남달랐다.
원 역사에서도 히틀러는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으나 힌덴부르크와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신문에도 나지 않았고.
지금의 나는 원래 역사 속의 히틀러와 비교하면 행적이 조금 달라진 셈이다.
하마터면 죽을뻔했지만,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시작이다.
힌덴부르크와 만나 그에게 훈장을 수여받았다는 것만 해도 큰 가산점이 될 테니까.
실제 역사에서도 히틀러는 1차대전 복무 중에 받았던 1급 철십자훈장의 덕을 톡톡히 봤다.
대다수의 정치인들이 전쟁 중에 안전한 후방에 있었던 것과 달리, 최전방에서 굴렀던 히틀러는 자신의 참전 경력을 적극적으로 홍보에 활용하였고, 대중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데 성공했다.
하물며 그 힌덴부르크한테서 직접 훈장까지 받았다? 게임 끝이지.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 것 같군.
***
부상이 완전히 회복된 나는 바로 본대로 복귀··· 하지는 않고, 보충대대로 보내졌다.
전장에서 부상을 입었던 병사는 보충대대를 거쳐 본대로 보내지는 게 규칙이라고 한다.
보충대대로 보내진 나는 상병에서 하사로 특진했다. 전장에서 세운 공과 1급 철십자훈장 수여가 특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듯했다.
상병 나부랭이에서 졸지에 하사로 진급한 나는 갓 입대한 훈련병들을 교육시키는 일을 맡게 되었다.
육군훈련소 시절이 생각나는구만.
이곳에서 한 달 동안 먹고 자고 해야 한다는 사실에 앞이 캄캄했었지.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내가 신병들을 가르치는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주목.”
“주목!”
“잘 들어라.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랑 눈치다. 빨리 뛰고, 빨리 움직여야 총에 맞을 확률도 줄어들고, 눈치가 빨라야 살 확률이 올라간다.”
“가스는 공기보다 무거워서 지면 아래에 남는다. 만약 너희들이 구덩이나 참호에 있을 때 가스 공격을 받으면,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 싶어도 함부로 방독면을 벗지 마라. 무조건 지면 위로 올라와서 벗어라. 단 1m 차이로 생사가 오갈 수 있으니까.”
“수류탄을 던질 땐 반드시 안전핀을 뽑고 던져라. 멍청하게 안전핀도 안 뽑고 그냥 던지지 말고.”
군복보다는 연필과 공책이 더 어울릴 나이의 소년들은 내가 하는 말을 주의 깊게 경청했다.
요즘 새로 입대하는 병사들은 너무 어리거나, 또는 너무 나이가 많아서 문제였다.
평소라면 학교나 탄광에 있었을 사람들이 지금은 군복을 입고 연병장을 돌고 있다. 이놈의 전쟁 때문에.
독일에 있는 모든 남성들을 쥐어짜 내는데도, 전황은 여전히 암울했다.
독일군은 연합군에 밀려 퇴각을 반복하는 중이었고, 배급은 갈수록 엄격해졌다.
“오늘 저녁 뭐냐?”
“뭐긴. 순무찜이랑 자우어크라우트지.”
“씨발, 또야? 오늘 아침에도 같은 거였잖아.”
“어제 저녁에도 같은 걸 먹었지.”
“조금만 참아. 전쟁에서 이기면 파리에서 스테이크를 썰게 될 테니까.”
“그래, 전쟁만 끝나면 이딴 ‘유사 식품’이랑은 영원히 작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승리할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러시아와의 휴전 때문이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로마노프 왕조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권력을 쟁취한 공산당은 독일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신생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휴전의 대가로 독일에게 발트 3국과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포함된 거대한 영토를 넘겨야 했고, 전 국민은 동부전선에서 거둔 대승리에 열광했다.
“호외요, 호외! 러시아가 휴전 협정에 서명했답니다!”
“드디어!”
“이제 남은 건 영국과 프랑스 놈들 뿐이군!”
“하하, 승리 만세! 독일 만세!”
시들했던 사기는 다시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쳤다.
국민들은 승리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정부 역시 이를 열심히 선전하여 국민들에게 승전이 코앞에 왔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훈련병들과 간호사들까지 곧 독일이 승리를 거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러시아가 혁명으로 무너졌듯이,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곧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래를 아는 내 입장에선 가소롭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지만.
***
1918년 10월 24일
“결국 이 방법뿐인가.”
“현 상황에선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각하.”
독일 해군참모총장 라인하르트 셰어와 대양함대사령관 프란츠 폰 히퍼는 최후의 작전을 준비했다.
비록 러시아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지만, 독일의 패망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라에서 남자란 남자는 씨가 마르기 직전이었고, 식량과 탄약 또한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
반면 연합국은 거대한 물주인 미국 덕분에 탄약과 식량이 차고 넘칠 지경. 거기다 병력까지 연합군이 독일의 몇 배나 되는 상황.
승리의 가능성이 사라진 지금, 휴전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선 ‘최후의 한방’을 적에게 먹여줄 필요가 있었다.
독일 해군은 남아있는 모든 전력을 총동원하여 영불해협을 돌파, 영국 본토와 벨기에 해안가를 타격하고 네덜란드 해안에서 영국 함대와 일전을 치른다는 계획을 세웠다.
누가 보더라도,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자살공격이나 다름없었다.
“영불해협을 돌파하고 템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영국 본토를 공격한다고? 이게 말이 돼?”
“씨발, 그냥 뒈지라고 해라.”
“어째서 우리가 이 미친 짓을 해야 한다는 거야? 난 안 해!”
이 무모한 계획이 알려지자, 수병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오랜 전쟁과 빠듯해진 배급량, 갈수록 심해지는 정부의 억압과 상관들의 명령에 불만이 쌓일대로 쌓인 수병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11월 3일,
“각하, 각하!”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호들갑인가?”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독일의 항구도시 킬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우리는 죽기 싫다!”
“전쟁은 지겹다! 전쟁을 멈춰라!”
장교들을 제압하고 항구를 점거한 수병들은 이내 시내로 쏟아져 나왔고, 수병들과 마찬가지로 정부와 군부에 대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전쟁을 멈춰라!”
“무능한 정부는 물러가라!”
“카이저는 책임져라! 죽은 내 아들을 살려내라!”
킬에서 시작된 불씨는 이내 독일 전역으로 튀었다.
집과 직장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행렬이 거리를 채우고, 전쟁을 일으킨 정부가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폐하,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더 이상 저들의 불만을 억누르기란 불가능합니다.”
“방금 의회가 공화정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내전이 터질지 모릅니다.”
“폐하, 신하 된 자로써 불충이오나······.”
“······.”
봇물 터지듯이 쏟아지는 비보에 한 가닥 남은 의지조차 상실한 카이저는 스스로 제위에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11월 9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이로써 독일은 제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이틀 뒤-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1차대전이 종결되었다.
***
전쟁에서 패한 독일은 모든 점령지에서 병력을 철수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의 병력들까지 해체해야 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비뿐만 아니라 군대의 규모조차 제한받게 된 탓에, 전쟁 이전부터 군대에 몸담고 있던 이들까지 군대를 떠나야 했다.
전시에 징집된 소년들과 중장년들은 물론이고,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군인이었던 보충대대 대대장도, 중대장과 행보관도 군복을 벗어야만 했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강제로 군대에서 쫓겨난 사람들과 달리, 내겐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
“하사 아돌프 히틀러, 명령을 받고 출두했습니다.”
“왔군. 자리에 앉게.”
문을 열고 들어간 회의실 안에는, 기다란 탁자를 두고 3명의 장교가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대령, 다른 두 명은 각각 원사와 상사였다. 필시 상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군에 계속 남는 게 허락된 이들이렷다.
“왜 불렸는지는 알고 있겠지?”
“예.”
“자네에게 선택권을 주겠네. 자네는 군대에 계속 남아있을 자격이 있네. 물론, 자네가 원한다면 군대에서 나가도 좋아.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으니 자네 마음대로 하게.”
남들과 달리, 목에 걸고 있는 훈장 덕분에 나는 순전히 내 의지로 군대에 남거나, 또는 군대를 떠날 수 있었다. 이 훈장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민간인이 되었겠지.
“밖에 나가서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도 좋네. 군에 계속 남는 것도 좋고. 하지만 나라의 형편상 이전과 같은 봉급을 줄 수 없다네. 아마도 한동안 말이야. 그건 감안해야 할 걸세.”
“하사.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솔직하게 대답하게.”
“저는···.”
호출을 받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내 선택은.
“군대에 계속 있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 언젠가 이곳을 떠날 예정이긴 했으나, 그것이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 적어도 잠자리와 식사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어디까지나 ‘당분간’이지만.
“그렇군. 잘 알겠네.”
“이만 나가도 좋네. 히틀러 하사.”
이로써 나는 히틀러 하사로 군대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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