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설과 전설의 만남 (4/150)

전설과 전설의 만남

절체절명의 순간, 몸을 앞으로 숙여야 한다는 판단이 머리를 스쳤다.

찰나의 판단이 목숨을 구했다.

몸을 앞으로 숙인 덕택에, 적병의 총검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중심을 잃은 영국군은 그대로 땅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적이 괴로워하는 사이 나는 옆구리에서 총검을 뽑아 적에게 달려들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날 엿 먹인 놈들에게 복수하기 전까지 죽을 수 없다. 인간적으로 다섯 번이나 죽었으면 됐지!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거야?

생존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 결과, 망설임 없이 상대의 가슴팍에 총검을 꽂았다. 총검을 빼내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피를 쏟아내며 죽어가는 적병의 손에서 총을 빼낸 뒤, 참호로 돌아와 몰려드는 적들을 향해 사격했다.

2, 3명가량의 적군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확인했을 때, 총탄이 바닥났다.

리-엔필드 소총은 게베어 1898 소총과 탄약이 달라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주변에 버려진 무기가 있나 확인하다가, MP18 기관단총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예비용 탄창도 주변에 널려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것을 주운 뒤 참호 가까이 다가온 적들에게 난사했다.

철조망을 손으로 잡아 벌리던 두 영국군이 걸레짝이 되고, 수류탄을 던지려던 중년의 병사가 수류탄을 쥔 채로 고꾸라져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적들의 수가 예상보다 많았고 끝끝내 몇 명이 살아남아 참호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참호로 뛰어든 적병의 뒤통수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자, 수박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피와 뇌수가 얼굴에 튀었다.

소매로 대충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낸 뒤 탄창을 교체하는데 앞에 뭔가가 떨어졌다. 수류탄이었다.

반사적으로 방금 내가 쏴죽인 적병의 시체에 눈길이 갔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적병의 시체를 수류탄 위로 던졌다.

시체가 수류탄을 덮는 동시에 수류탄이 폭발했다.

나는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모든 의식이 꺼진 동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어둠과 침묵뿐.

***

“오, 살아있군.”

“정신이 드나?”

눈을 떴을 때, 나는 간이침상 위에 누워있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얼마나 기쁘던지. 이미 5번의 죽음을 맛보았기에 죽는 것이 그렇게까지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죽고 난 뒤에 있을 일이 두려울 뿐.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군의관이 말하길, 처음엔 죽은 줄 알고 구덩이에 파묻으려다가, 시체치곤 몸이 따뜻해서 확인해보니 숨을 쉬고 있어서 여기로 데려왔단다.

“자네는 참 운이 좋아. 하마터면 산 채로 매장당할 뻔했는데.”

“그, 그렇습니까?”

생매장이라니. 하마터면 또 같은 죽음을 맞이할 뻔했네.

몸을 일으키는데 가슴팍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머리를 밧줄로 묶은 것처럼 두통이 심하기도 했고.

군의관 말에 따르면 가슴에 자잘한 파편이 박힌데다 폭발로 인해 머리가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한다. 파편은 모두 제거했고, 머리에도 큰 이상이 없으니 푹 쉬면 나을 거란다.

“그건 그렇고, 자네 정말 굉장한 활약을 했더구만.”

“?”

“혼자서 전차를 두 대나 날려버리고, 몰려드는 적들을 죄다 쓸어버렸다면서? 목격자들 말론 자네 혼자서 수십 명을 상대했다고 하던데. 자네가 아니었다면 전투에서 졌을 거라고 입을 모아 말하더군.”

“어···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자네 공적을 따지면 최소 철십자훈장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모르는군. 상병, 자네 이름이 뭔가?”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아돌프 히틀러라. 일단 자네 소속 부대에 보고해두겠네.”

며칠 뒤 나는 다른 부상병들과 함께 독일 본토인 아헨에 있는 군인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군인병원은 확실히 전방의 의료소보다 나았다.

제대로 된 침대에 누울 수 있고, 위생병들보다 간호사들이 더 많은데다 툭하면 들려오던 포성도 들리지 않았다.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바로 식사다. 병원에서 주는 식사는 전방에서 먹던 것보다 훨 나았다.

매 끼니마다 순무가 나오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삼시세끼 모두 순무만 줄기차게 먹던 전방과 달리 이곳에선 빵과 감자도 나오고 가끔씩 고기도 나온다.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었지만, 고기 구경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어딘가.

오늘은 간만에 고기가 나와 병실에 있던 모두가 환호했다. 메뉴는 소시지구이에 잘게 채 썬 양배추와 삶은 강낭콩.

소시지는 누린내가 심한데다 질겼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요즘같이 음식이 귀한 시국에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으니까.

나이프로 소시지를 얇게 썰어 천천히 음미하고 있는데, 어제 옆 침대에 새로 들어온 부상병이 속이 더부룩하다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 귀중한 소시지를 반이나 남겨둔 채로.

“좀 먹을래요? 난 입맛이 없어서 영.”

“어? 정말 그래도 되나?!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상관없어요. 버리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

이토록 귀한 소시지를 선뜻 남에게 내어주다니. 마음씨가 넓은 건지 정말로 속이 불편한 건지.

괜히 미안해진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소시지 고맙수. 댁 이름은 뭐요? 이 귀한 소시지를 준 은인의 이름 정도는 알아둬야지. 참고로 난 아돌프 히틀러요.”

“레마르크입니다. 에리히 파울 레마르크.”

순간 입을 물고 있던 소시지를 도로 뱉어낼 뻔했다.

레마르크?

그 레마르크라고?

<서부전선 이상없다>, <개선문>,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등 수많은 명작들을 남겼으며, 나치에 정면으로 반대하다 외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그 작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맙소사, 그 전설적인 작가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니.

그러고 보니 레마르크는 서부전선에서 싸우다가 부상을 입어 후송된 적이 있다고 했지.

훗날 독재자가 되는 사람과, 그 독재자에 반대하여 탄압을 받다 외국으로 망명을 떠난 소설가가 같은 병실에서 만나게 되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세상일은 참으로 오묘했다.

“저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내가 말이 없자 의아해진 레마르크가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뇨. 그냥, 아는 사람과 이름이 비슷해서 말이지.”

레마르크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시기는 1차대전이 끝나고 11년이 지난 1929년의 일이므로, 내가 그를 알아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대충 지어낸 거짓말인데, 레마르크는 그것을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렇군요. 그 사람이랑은 친한 사이였습니까?”

“어? 어, 조금 아는 사이였소. 술친구의 술친구라고 해야 하나. 장래희망이 소설가였던 친구였는데,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그래요?”

내 말을 들은 레마르크는 뜻밖에도 얼굴이 환해졌다.

“우연이군요. 마침 저도 장래에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거든요.”

“그렇소?”

나는 괜한 마음에 여러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주로 어떤 주제를 다룰 생각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아직까지 확실하게 정해놓은 것은 없습니다만, 언젠가 전쟁에 관한 글을 쓸 생각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전쟁에 관한 글을 말입니다.”

“그렇군. 내 느낌인데, 왠지 당신에겐 소설가의 기질이 있는 것 같소. 그렇게 생겼거든. 유명해지거든 내 이름 정도는 기억해주쇼.”

“칭찬 감사합니다. 히틀러 씨는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소.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던 터라,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

사실 생각해둔 일이 따로 있지만, 지금 밝힐 필요는 없겠지.

“그렇군요.”

레마르크와는 이후에도 여러 대화를 나눴다. 전쟁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또 전쟁 중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등등.

다음날, 레마르크는 수술을 받으러 떠났고 그의 침대에는 다른 부상병이 들어왔다.

회진을 돌던 군의관에게 레마르크는 어디로 가고 다른 사람이 왔냐고 물으니 치료를 위해 다른 병실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뜻밖의 만남을 곱씹으며 이전처럼 가만히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그랬는데······.

“이 중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누군가?”

평소처럼 아침 회진 시간에 군의관 대신 정복을 차려입은 장교 두 명이 병실에 나타나 말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제가 아돌프 히틀러입니다만······.”

장교 둘은 즉시 내 쪽으로 고개를 꺾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네가 아돌프 히틀러라고?”

“그렇습니다.”

“바이에른 왕국 육군 리스트 연대 소속이 맞나?”

“예.”

“계급은?”

“상병입니다.”

“확실하군.”

그들이 대뜸 병실에 나타난 이유는 다름 아닌 나 때문이었다.

“축하하네, 히틀러 상병. 자네의 활약상이 신문에까지 실렸는데, 알고 있나?”

“신문에 말입니까?”

내가 신문에 실렸다고?

“그래. 반응을 보니 몰랐던 모양이군. 아무튼 자네, 걸을 수 있나?”

“가능은 합니다. 뛰는 건 무리지만.”

“어차피 서 있기만 하면 되니 상관없어.”

“지금 당장 준비하게. 군복은 깨끗한 상태겠지? 아니면 우리가 준비해주겠네.”

“저,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아서-”

“지금 힌덴부르크 원수께서 이곳으로 오고 계시네. 그분께서 직접 자네에게 훈장을 수여하실 예정이고.”

“힌덴부르크?!”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병실에 있던 모두가 술렁거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병실 밖을 기웃거리던 간호사들과 다른 부상병들도 힌덴부르크의 이름을 듣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1차대전 당시 러시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전후에는 대통령까지 되어 히틀러와 나치의 집권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준 독일 현대사의 거물.

아직 전쟁 중이라 대통령이 되려면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하지만, 이미 힌덴부르크는 동부전선에서 거둔 무수한 공적들 덕분에 독일 전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었다.

이 당시 힌덴부르크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그의 생일인 10월 2일이 공휴일로 지정되었을 정도다.

그 힌덴부르크와 만나게 된다고?

실화냐?

***

힌덴부르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원 정문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 있었다.

이놈의 인기하곤. 자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보며 힌덴부르크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있던 일이지만, 수많은 인파가 귀찮게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저 규모야말로 자신의 인기의 증거가 아니라면 뭐겠는가?

“진짜 힌덴부르크다!”

“장군님!”

“각하! 각하!”

힌덴부르크는 자신을 반기는 인파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 뒤, 곧장 병원으로 들어갔다.

오늘 그가 이런 작은 병원에 온 이유는 부상병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모습을 찍기 위해 온 사진기자들만 수십 명이었다.

“이름이 뭔가, 젊은 친구?”

“아, 안톤입니다, 원수 각하.”

“이마의 그 상처는 어쩌다 생겼나?”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그만···.”

“그렇군. 그 상처는 자네가 가진 용기의 증거일세.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노원수는 병실을 돌아다니며 부상병들과 악수를 나누고, 그들에게 이름과 나이, 출신지, 부상을 입게 된 경위를 물었다.

신문기자들은 부상병들과 얘기를 나누는 힌덴부르크와 자신들의 수첩을 번갈아 보며 열심히 펜을 움직였고, 사진기자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그렇게 모든 병실을 돌아다니던 힌덴부르크는 이번 행사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훈장 수여식을 위해 병원 최상층으로 향했다.

훈장 수여자들은 힌덴부르크가 도착하기 전부터 차렷 자세로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런, 이런. 이 늙은이 하나 때문에 우리 영웅 나리들을 귀찮게 만들었구만.”

“아닙니다!!!”

가볍게 한 농담조차 이들에게 그렇지 않게 들렸나 보다. 그는 껄껄 웃으며 수여자 한 명 한 명과 악수하고 그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중위 프란츠 뵈머, 자신의 소대를 지휘하여 아군의 퇴각을 성공적으로 엄호하였으므로 훈장을 수여함.”

“대위 다비트 지슈코프스키, 군의관으로써 성심성의껏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대위 헤르베르트 할버슈타인, ···하였으므로 훈장을 수여함.”

훈장을 수여받은 이들은 경례와 함께 우렁찬 목소리로 원수의 질문에 대답했다.

어느새 마지막 훈장 수여자의 차례가 되었다.

“상병 아돌프 히틀러,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적 전차 2대를 격파하고, 다수의 적 보병들을 사살하여 적의 공세 의지를 크게 꺾어 아군의 승리에 일조하였으므로 이에 훈장을 수여함.”

솥뚜껑만한 손으로 마지막 남은 1급 철십자 훈장을 잡던 힌덴부르크는 상병이란 말에 흠칫했다.

이번 훈장 수여자들 중 유일한 사병 계급이었다.

“대단한 친구군. 계급은 겨우 상병인데 전차를 두 대나 잡다니. 아주 용감한 병사야.”

“감사합니다, 원수 각하!”

힌덴부르크는 어느 용감한 상병의 목에 훈장을 건 뒤, 으레 하는 질문을 던졌다.

“아돌프 히틀러라고 했나? 그래, 어디 출신인가?”

“부산··· 아니, 브라우나우암인 출신입니다.”

고령 때문에 귀가 어두운 힌덴부르크는 맨 처음 튀어나온 부산이라는 단어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뒤의 브라우나우암인이란 말은 얼추 알아들었다.

“브라우나우? 그럼 자네는 체코인인가?”

히틀러가 태어난 곳인 오스트리아의 브라우나우암인과 체코의 브라우나우는 발음이 서로 비슷해 많은 사람이 헷갈려 하곤 했다.

“아닙니다. 전 오스트리아인입니다.”

“그래? 내가 착각을 했나 보군. 그런데 오스트리아인이 독일 육군에 복무하다니. 참 별일이구만.

뭐, 아무튼 됐어. 출신지보다 중요한 게 바로 전쟁터에서 적과 싸울 수 있는 용기니까. 그렇지?”

“맞습니다.”

“씩씩해서 좋군. 꼭 젊은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단 말이야. 자네처럼 용감한 젊은이들이 많으면 좋으련만. 안 그런가?”

“저보단 각하가 독일에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힌덴부르크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냥 용감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말솜씨가 제법 있군. 갈수록 호감이 가는 친구일세.

“이 친구, 말도 참 기특하게 하는군.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히틀러, 히틀러라. 내 잘 기억해두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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